제111화
콰앙. 콰아아앙!
오늘도 화가 많은 클로에는 책상을 연달아 내리쳤다.
“알리노헤르, 알리노헤르르르릇!”
그년이 아이들에게 어찌했는지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모조리 들었다.
경멸과 낮잡음…… 아니지, 고기 방패라니!
“뚫린 주둥이라고 어디서 우리 애들에게 그딴 망발을!”
알리노헤르가 왜 그러는지 알기에 클로에로선 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순전히 자신 때문이었다.
제가 담당하는 반이라 이러는 거였다.
애들을 당장이라도 뼈째 씹어먹으려고 구는 것이 말이다.
그런 마당에 순혈주의자란 특질까지 더해졌으니…….
“하! 미친년! 지가 뭐라고. 뭔데 우리 애들을 무시해.”
장담컨대, 요 나흘은 서막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 계속 아이들을 업신여기고 말로 폭력을 가하며 괴롭히겠지.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따지러 가려는데, 그런 클로에를 부드러운 음색이 붙들었다.
“이번이 통상 57번째입니다, 클로에 교수님.”
“……아직 안 가셨습니까, 스톨레 교수님?”
“교수님이 재미있어서 지켜보고 있던 참입니다.”
“대체 뭐가 재밌다는 겁니까?”
“교수님이 화를 내다 알리노헤르 교수의 멱살을 잡으러 가는 거, 그거 말입니다.”
“설마 57번째라는 것이?”
“예. 멱살을 잡은 횟수입니다. 정말 많지 않습니까? 이제 나흘 됐을 뿐인데.”
“그걸 다 세다니, 스톨레 교수님도 참…….”
“후후. 참 더럽게 할 일 없는 인간이구나, 그리 생각하고 있으시죠?”
“후우. 놀아줄 기분이 아닙니다. 할 얘기가 있다면 다음에 하죠.”
“할 얘기는 없지만 여기 있겠습니다. 클로에 교수님이 키우는 화분이라 생각하세요.”
스톨레의 능청에 클로에는 엉덩이를 도로 의자에 붙였다.
솔직히 저도 놀랐다.
알리노헤르와 대거리를 57번이나 했다니 말이다.
그래도 잘못했단 생각이나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눈곱만치도.
클로에는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솟아 다시금 주먹으로 책상을 후려쳤다.
“할 일이 더럽게 없는 건 알리노헤르지요. 나를 엿 먹이려고 우리 애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지 않습니까.”
“두 분 사이가 앙숙이라더니 과연.”
“처음부터 그년…… 크흠. 알리노헤르가 문제였습니다.”
“아아.”
“나만 보면 치통 걸린 개새끼마냥 어찌나 아르릉 거리던지.”
“일전에 교수님께 들은 말과는 사뭇 다르군요.”
“일전에?”
“어렸을 때는 알리노헤르 교수가 교수님을 무척 잘 따랐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그랬죠. 그림자처럼 종일 찰싹 붙어서 내가 하는 거라면 뭐든 따라 했으니까요.”
“그 정도였습니까.”
“내가 먹어야 먹고, 내가 잠을 자야 자고. 심지어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같은 시간에 갈 정도였습니다.”
“흠.”
“근데 열다섯쯤이었나? 그때를 기점으로 갑자기 돌변해선 지금까지…… 하아.”
“아하.”
스톨레 교수가 대답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내며 안대 끝을 문질렀다.
그의 버릇이었다.
생각할 게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마다 안대를 문지르는 것은.
“그거 아십니까, 클로에 교수님.”
“그렇게 되물으니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드네요.”
“후후. 왜요. 다음 말을 듣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까?”
“하하. 아닙니다. 스톨레 교수님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긴 하네요.”
“그럼 말을 편하게 하죠.”
스톨레는 잠깐의 틈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추측이긴 합니다만.”
“으음?”
“아마도 증오나 열등감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알리노헤르 교수가 교수님에게 가지는 감정이.”
“그게 무슨.”
“일종의 종용일지도요.”
“종용?”
“알리노헤르 교수가 누굽니까. 클로에 교수님을 지키던 수호자가 아니었습니까.”
“…….”
“가신의 영광은 곧 자신이 지키는 직계의 권세에 달렸고. 한데 교수님께서…….”
“아……. 내가 열다섯에 가문을 박차고 나와버렸으니.”
“예, 그래서지요.”
스톨레는 생각에 잠긴 클로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알리노헤르 교수는 되찾고 싶은 겁니다. 교수님이 가문으로 나가며 잃어버렸던 권세를.”
“…….”
“해서 분풀이를 하며 종용하는 것이지요. 돌아오라고.”
클로에는 스톨레 교수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관점이었다.
그의 말대로 가신의 영광은 모시는 자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클로에는 충분히 자부심이 될 만했다.
다들 그녀를 두고 뷔트시겐 가주를 제칠 천재가 탄생했다고들 수선을 떨어댔으니까.
일족의 관심을 독차지한 ‘클로에 살리카’의 곁을 지키는 자.
그 수식을 코앞에서 놓쳐버린 알리노헤르는 분개했을 것이다.
본디 권력욕이 넘쳤으니까.
클로에는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을 토해냈다.
“그래요. 내 잘못이 있다 쳐요. 하지만 알리노헤르의 모든 선택이 내가 원인일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당연히 그렇지요.”
“그리고 살인에 미친 ‘사냥꾼’이 되기로 한 건 순전히 알리노헤르의 결정이었어요.”
살리카 가주는 사냥꾼을 중요시한다.
드러내지 않고 음지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이는 곧 사냥꾼이 되면 가주의 측근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여 알리노헤르는 오직 가주의 눈에 들고자 사냥꾼이 되었다.
“누군가의 선택을 누군가의 탓으로 떠밀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스톨레 교수는 또다시 안대를 문질렀다.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화려한 무늬가 이지러졌다.
금세 제 모양을 찾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반듯해졌지만.
“염려되는군요.”
“염려라니요?”
“교수님을 미워하는 알리노헤르 교수가 교수님을 물어뜯으려 할까 봐.”
“하하핫. 괜한 걱정을 하십니다. 튼튼한 거 빼면 시체인 나를 두고.”
“…….”
“게다가 내 성미를 모르십니까? 같이 물어버리면 물었지,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요.”
“차라리 팔이나 다리면 낫지요. 그게 마음이면…….”
말꼬리를 흐린 스톨레 교수의 고개가 창가 쪽으로 향했다.
자연히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 탓에 스톨레의 창백한 얼굴이 더 하얘져 빛을 뿜어냈다.
화한 빛 때문일까.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릇 대화라는 건 표정이 반인데…… 스톨레는 꼭 대화 말미에 저렇게 표정을 감춰버린다.
이를 본 클로에는 눈가를 한껏 찡그리며 스톨레를 쳐다보았다.
‘또 저런다.’라는 눈빛을 하고선.
그 모습에 옅게 웃은 스톨레는 부러 구렁이 담 넘듯이 대화를 넘겼다.
“후후. 내가 공연한 말을 꺼냈군요. 구경하러 와선.”
“화분이라 생각하라더니 정말 말이 청산유수더군요.”
“이런, 비밀이 들통났군요. 실은 내가 한 말발 합니다.”
스톨레는 시종 가벼운 태도를 보인 뒤에 은근슬쩍 본심을 얹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지요. 한 마디 살짝 덧붙이자면, 멱살은 적당히 잡으세요.”
“글쎄요. 그건 내 성미와 맞지 않아서.”
“알리노헤르 교수는 교수님이 놀아주지 않아도 앞으로 많이 바빠질 겁니다.”
“으응?”
“클로에 교수님의 제자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테니.”
“하하하핫. 내 제자들이 보통은 넘지요.”
* * *
포로롱.
이안은 약제실을 날아다니는 오목눈이를 찬찬히 보았다.
포실포실한 흰색 털에 또랑또랑한 눈망울, 작은 몸집.
누가 봐도 그냥 새지, 텔로스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형상이었다.
포롱. 포로롱.
형상 변환이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는 기물 텔로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로스는 지금껏 검의 형태 외에는 다른 모습을 취한 적이 없었다.
소유자들이 그걸 원했으니까.
형상이 바뀐 탓인지 텔로스가 유난히 활발하게 움직였다.
붙박이지 않은 자유로움이 기꺼운 것이리라.
그로 인해 텔로스의 날갯짓엔 가차 없이 속도가 붙었고, 이 때문에 애꿎은 피해자가 생겨났다.
[우욱. 멀미 난다. 얘 좀 어떻게 해봐라, 이안.]
바로 녹스였다.
기척을 감추려고 텔로스 안에 들어가 있는 녹스 말이다.
다 죽어가는 녹스의 목소리에 이안은 텔로스를 불렀다.
재깍 날아온 텔로스는 군말 없이 이안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괜찮아, 녹스?
[찻잔에 넣고 빙글빙글 돌려진 것 같다.]
-다른 건. 답답하진 않았고?
[딱히. 넓은 초원도 있고 생각보다 쾌적하다. 한데…….]
-왜?
[딱 하나 맘에 안 드는 게 있긴 하다.]
-응?
[텔로스 요놈이 말이다. 말 못 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말이 너무 많다. 고막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원.]
-하하. 녹스 네가 맘에 들었나 보다. 웬만해선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녀석이 아닌데.
[에고를 가진 녀석이라 한 고집하는 건 알고 있다.]
-텔로스에 넣으려 해도 다른 정령들은 다 튕겨냈지, 아마?
[그러거나 말거나 오래 머물 곳은 아니다.]
녹스가 짧게 혀를 차며 툴툴거렸다.
[내 존재를 그것이 알면 안 돼서 이리 모양 빠지게 숨어 있다만. 에잉.]
-벌써 지친 거야? 오늘 치유학 수업은 꼭 직관하겠다면서.
[직관해야지. 내 오늘 있을 꿀잼을 절대 놓칠 순 없다.]
-어째 구운 옥수수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맨입으로 봐도 아마, 오늘 그 망할 년의 낯짝은 별미일 것이다.]
불퉁하던 녹스가 난데없이 킬킬거렸다.
그 소리에 묻은 어떤 단어에 자극받은 것일까.
잠자코 있던 텔로스가 날개를 펴며 잘게 지저귀었다.
찌르르 찌르르.
요즘 텔로스는 망할 년이라는 말만 들으면 꼭 저렇게 우짖었다.
자기 또한 그년, 알리노헤르가 싫다는 의미였다.
[사람을 고기 방패라고 부르다니. 쯔읏.]
-인성이 터진 진상이라 그렇지.
둘의 뒷담에 텔로스가 이안의 손등을 박차고 힘차게 날아올랐다.
주변을 휘젓는 몸짓이 흡사 알리노헤르를 쪼는 것 같았다.
댕댕한 움직임을 따라 이안의 시선이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
그러다 자연스럽게 정지한 시선.
이안은 아이들에게서 짙게 풍겨 나오는 우중충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들 안색이 어둡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난 5일간 보인 알리노헤르의 행태 탓이었다.
갖은 짜증과 멸시를 팍팍 뿌려대는데 어찌 모르랴.
‘격이 안 맞다.’, ‘비루먹다.’, ‘하등하다.’ 등을 말끝마다 달아대는데.
거기다.
마구간에서 나는 냄새가 난다며 수업 내내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는데.
정말이지 교수의 작태는 아주 가관이었다.
이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 아이들은 인상을 팍팍 구기며 주절거렸다.
“우와. 부임 5일 만에 분위기를 이렇게 조질 수도 있구나.”
“그것도 나름 재주라면 재주다. 기깔난 재주.”
“확실히 보통은 넘지. 입만 열면 사람 기분 엿 같게 만드니까.”
“난 다른 뭣보다 이제 향수의 ‘향’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그니까. 그 교수가 향수를 손수건에 뿌릴 때마다 진짜.”
“으윽. 얼마나 독한지 내 코가 다 썩을 것 같더라.”
아이들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일제히 코를 막았다.
지금 당장에 그 향수 냄새가 진동한다는 듯이 말이다.
“근데 웃긴 게 뭔 줄 아냐? 알리노헤르가 우리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던데?”
“하긴. 다른 반한테도 장난 아니더라.”
모두까기 달인, 알리노헤르 교수.
그 여자는 C반을 특히 무시했지만 다른 반도 예외는 아니었다.
A반, B반 따지지 않고 얼마나 독설을 퍼부어대던지.
덕분에 그 미끈한 낯짝들이 며칠 새 죽상이 되었더랬다.
그 모습을 보고도 알리노헤르는 도리어 조소를 날렸다.
알리노헤르가 싫어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비루먹은 에루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싫으면 오질 말지 왜 여길 와서는.”
“그러게나 말이다.”
C반이 쑥덕거리고 있는 사이, 논란의 중심인 알리노헤르 교수가 들어왔다.
인사는 없었다.
당연히 눈이 마주치는 법도 없었다.
기본값으로 무시를 깐 알리노헤르가 귀찮다는 듯 말을 쏘았다.
“오늘 역시 너희의 격에 맞게…….”
“알리노헤르 교수님.”
이안은 알리노헤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리슬쩍 끼어들었다.
퍽퍽한 공기를 타고 흐르는 나직한 음색.
이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안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뭔 일인가 싶었으니까.
사실 요 며칠간 이안은 알리노헤르에게 먼저 말을 건 적이 없었다.
하다 못 해 시선조차 교수 쪽으로 두질 않는데, 말을 붙인다고?
그렇다면 필시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두 사람을 비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