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12화 (112/214)

제112화

“뭐지, 이안 뷔트시겐?”

알리노헤르는 말꼬리가 잘린 게 불쾌한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살리카 가주가 아니면 그게 설령 황제라도 저럴 위인이었다.

가주의 충성스러운 개는 아무나 되는 것이랴.

교수의 반응이 어떻든, 이안은 양해를 구했으니 말을 이어갔다.

“교수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흠. 할 말이 있다면 수업 끝나고 해라. 이런 식으로 예의 없이…….”

“예의 없이 굴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수업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수업 전이건, 후건 너희가 할 일은 없다.”

“아,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오해?”

“다름이 아니라, 그저 격을 갖추려는 것뿐입니다.”

“……격?”

이안은 의문을 표하는 알리노헤르를 응시했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자기만 다른 인간인 양 굴고 있는 알리노헤르.

저런 부류는 허공에 뜬 말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상책이었다.

노상 ‘격, 격’ 거리니 그 격, 맞춰드려야지.

한쪽 입가를 비죽 올린 이안은 곧장 손가락을 튕겼다.

신호에 맞춰.

드륵. 드르륵.

짐수레를 끈 열 마리의 브라우니들이 속속 약제실로 들어섰다.

난데없는 등장에 다들 ‘뭐지? 뭐야?’라며 어리둥절함을 드러냈다.

주변이 소란스럽더라도 브라우니들은 제 할 일만 했다.

짐수레에 실린 상자들을 내린 뒤 바닥에 차곡차곡 쌓는 것 말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을 잡아 쌓더니, 브라우니들은 상자의 열을 아홉 줄로 예쁘게 맞췄다.

누가 완벽주의자들 아니랄까 봐 참.

“의뢰를 완수했습니다.”

할 일을 마친 브라우니가 딱딱한 인사를 건네고선 질서정연하게 떠났다.

총 열이던 정령의 수가 빠지면서 복작거림이 일시에 줄었다.

대신 상자에 뭐가 들었을까 하는 호기심은 왕성하게 부풀었다.

상자와 그 상자의 주인인 이안을 번갈아 보는 아이들.

이안은 아이들의 시선을 모조리 흡수하며 알리노헤르 쪽으로 다가갔다.

“교수님께서 매번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에루리안의 것들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교수님의 격에 맞추려고.”

이안은 건조한 표정만큼 딱딱하게 첫 번째 상자를 열어젖혔다.

상자에는 엄지손톱만 한 무당벌레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알록달록한 날개와 세밀한 더듬이, 앙증맞은 몸체.

반질반질하게 생긴 무당벌레가 단박에 시선을 강탈했다.

“억! 파르티오다.”

“저거 약제를 자동으로 분류해주는 마도구 아냐?”

“워어어어. 저거 한 개에 백골이 넘잖아. 근데 도대체 몇 개가 들어있는 거야?”

“장난 아닌데? 저거 다 합치면 대체 얼마냐?”

이안은 아이들의 조잘거림을 뒷배경 삼아 알리노헤르를 직시했다.

그 얼굴엔 어느새 유들유들함만 남겨져 있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파르티오입니다.”

굳이 분류용 마도구를 준비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교수님께선 이제 굳이 열과 성을 다해서 책장을 엎지 않으셔도 된다는 얘기지요.”

“…….”

“물론 교수님이 수고를 더는 만큼 저희도 여유가 생길 테고.”

이안의 도발에 알리노헤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드러내는 패임.

빙하 같던 평정심이 미약하게 깨지고 있었다.

엿 먹으라고 그간 방치한 건데, 되레 역풍을 맞았으니 오죽하랴.

한데도 알리노헤르는 그러지 않은 척 미간을 억지로 폈다.

“하! 겨우 5일 만에 농땡이를 피우려 드는군. 역시 에루리안 것들은.”

“에루리안 것들이니 그렇지요.”

“무슨 의미지?”

“교수님 말마따나 비루먹은 목숨줄을 오-래 연명하려면, 분류보단 수련에 집중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수련? 미천한 그 실력이 수련 좀 한다고 나아질까.”

“나아질지, 아닐지는 해 봐야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하면 이 말로, 저 말을 하면 저 말로.

말하는 족족 이안이 받아치자 알리노헤르가 팔짱을 억세게 끼었다.

일종의 방어 태세였다.

“핑계가 진부하군. 감히 교수의 수업 재량에 반기를 드는 것치곤.”

“그 재량이라는 것도 객관적 판단이 선행되어야 납득이 가지요.”

“그러니까 납득하지 못 하시겠다?”

“그럼 묻겠습니다. 교수님께선 어떤 사심도 없이, C반의 재량을 판단하신 게 맞습니까?”

“…….”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기초 중의 기초, 일곱 살 정령사나 하는 분류를 던져주었겠지.

이안은 상자에 손을 얹은 채 알리노헤르를 삐뚜름하게 보았다.

이런 식으로 수업에 대해 반박한다고 진상짓을 그만둘 인사가 아니었다.

이걸 빌미 삼아 치졸한 짓을 더하면 더했지.

그러니 알리노헤르가 이다음에 할 일 역시 불 보듯 빤했다.

분류 다음의 과정을 들이밀겠지.

“제가 말입니다. 앞날을 좀 볼 줄 압니다.”

“또 무슨 헛소리지?”

“교수님께서 재량껏 판단하신 기준, 그 기준으로 준비했을 다음 수업이 뭔지 알고 있다는 뜻이지요.”

“알고 있으시다?”

“예, 당연히.”

“아아.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들어나 볼까.”

“답이 너무 간단해서 민망하지만, 굳이 수줍게 꺼내보자면 ‘추출’이겠지요.”

“…….”

이안의 확신에 알리노헤르가 움찔했다.

실제로 오늘 수업에서 내밀려고 했던 것이 추출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찌 알고…….

속내를 꿰뚫린 것 같아서 언짢음이 밀려왔다.

한데 그 기색마저도 눈치챈 듯 이안의 입꼬리가 사선으로 휘었다.

“…….”

“그래서 말입니다. 교수님을 대신해 제가 미리 신경을 좀 썼습니다.”

이안은 지체하지 않고 보란 듯이 두 번째 상자를 열어젖혔다.

이번 역시도 마도구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추출용 마도구인 ‘펠로그래피’가 말이다.

흔히 ‘대롱 여우’라고 불리는 이것은 긴 주둥이를 이용해 원재료의 성분을 손실 없이 뽑아내는 역할을 한다.

수치로 따지자면 거의 10할에 육박한달까.

사람이 추출할 경우 최대 수치가 6할인 것을 감안 한다면, 굉장히 경이로운 수치였다.

그러니 대롱 여우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는가.

품절 대란이 일어나서 지금은 구할래도 구할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추출용 마도구를 본 알리노헤르의 눈꺼풀이 일순 파르르 떨렸다.

‘……5일을 잠자코 있더니 작정하고 덤벼드는군.’

때를 기다린 것이다.

상대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을 최적의 때를.

능구렁이 같은 놈.

알리노헤르는 잘게 떨리는 눈가를 누구도 모르게 지그시 억눌렀다.

“이안 뷔트시겐, 학생의 신분으로 교수의 권위에 도전하지 마라.”

“도전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권위를 세워 드리려는 것이지.”

“어쭙잖은 소리는 그만…….”

“교수님의 수업 공간을 교수님의 ‘격’에 맞게 탈바꿈시키는 것, 그것이 교수님을 위한 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능청을 떤 이안은 고개가 모로 꼬아진 알리노헤르를 빤히 보았다.

보아하니 슬슬 열이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이 전권을 휘둘러야 할 수업에서 선수를 뺏겼으니 그럴밖에.

본디 알리노헤르의 성향이 그렇다.

서열을 중시하고, 월권행위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권위를 침범한다 싶으면 가차 없이 잘라내 버린다.

설령 그게 목숨일지라도.

“이를 위해 아직 준비한 것들이 많습니다, 교수님.”

이안은 유려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남은 상자들을 마저 깠다.

세 번째, 네 번째, 열 번째…… 그렇게 스물일곱 번째.

상자가 열릴 때마다 약제학 관련 물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이리라.

이안의 손이 움직이는 족족 알리노헤르의 독기어린 눈빛도 진해져 갔다.

‘겨우 이 정도에.’

최고의 엿은 상대가 싫어하는 짓을 하는 거였다.

월권행위? 싫어하면 해줘야지.

비식 웃은 이안은 제대로 열 받아 보라는 듯 말문을 열었다.

“격에 맞는 환경도 갖춰졌겠다, 이제 제대로 수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인즉, 지금까지는 내가 똑바로 하지 않았단 것이냐.”

“그건 교수님께서 가장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

코웃음 친 알리노헤르가 세모꼴이 된 동공을 옆으로 굴렸다.

약제실을 훑어보는 시선에 비친 건 아이들이었다.

풍기는 기운들이 약하디 약한 비루먹은 것들 말이다.

“감히 에르그도 못된 후진 페이라조 따위가 수준을 운운해?”

“등급과는 상관없습니다. 수업의 방향에 대해 논하는 것, 이는 학생의 정당한 권리니까요.”

이안은 ‘권리’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자신이 쥘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명분이었으니까.

기실 어떤 일을 따질 때 옳고 그름은 그다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상대보다 내 명분이 우위에 섰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그리고 제가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껏, 교수님께서 직무를 태만하셨단 증거입니다.”

“감히!”

“지난 5일은 적응 기간이라 칠 테니, 수준에 맞는 수업을 해주십시오.”

교수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이안의 당당한 요구.

이에 알리노헤르 주변으로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 * *

“캬캬캬캬캬.”

까마귀 같은 올리브의 웃음이 숲의 동편을 요란하게 때렸다.

얼마나 소리가 큰지 정령들이 놀라서 통통 튈 정도였다.

“내 인생 최고의 통쾌함이었다.”

무슨 얘기인지 단박에 알아챈 듯 아이들이 너도나도 주절거렸다.

“말이라고. 알리노헤르 표정이 진짜 죽여주지 않았냐?”

“죽여줬지. 이안이 상자를 깔 때마다 안 찌그러지려고 애쓰는 게.”

“캬아. 나는 진짜 그 표정을 무덤까지 가져갈 것 같다.”

“속이 다 시원하더라. 이안이 한 방 먹였을 땐.”

“난 앞으로 이안을 영원히 형님으로 모실 거다.”

다들 하나같이 신난 표정이었다.

붕 떠 있어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맞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찍어낸 듯 똑같은 표정들 가운데 올리브의 표정은 단연 압권이었다.

터지기 직전의 감자 같달까.

그 얼굴을 하고선 올리브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얼마면 되는데. 얼마면 이딴 수업 때려치울래.’ 이안 형님의 주옥같은 그 말씀, 너희도 들었지?”

“무슨. 네 헛소리랑 완전 딴판이었거든.”

“딴판은. 내 갈비뼈에 새긴 그 말씀을 어떻게 잊는다고.”

“올리브 저거 또 약 친다.”

“어디서 덤터기를. 믿음이 부족한 것들이 귓등으로 흘려들어 놓고는.”

“하여간 올리브 이 자식은 주둥이로 매를 벌어요.”

과대 포장의 끝은 매타작이었다.

아이들은 올리브의 등짝을 두드리면서도 연신 웃고 떠들어댔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입을 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알리노헤르를 떠올리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 번들한 낯짝을 이 정도로 찌그러트릴 날이 어디 쉬이 오랴.

“흐흐흐.”

아이들은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충분히 만끽했다.

씹고, 뜯고, 맛보고.

알리노헤르의 표정을 낱낱이 해부해보길 얼마쯤.

생각의 끝머리에 올리브가 뚝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오스틴의 팔을 툭 치며 ‘알지?’란 눈빛을 발사했다.

올리브가 보낸 모종의 눈짓을 접수한 오스틴.

오스틴은 알았단 뜻으로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이안 쪽으로 몸을 홱 틀었다.

그 뒤.

“이안 형님.”

이안을 장난스럽게 부르며 장엄히 엄지를 들어 올렸다.

‘존경합니다, 형님.’이라고 말하는 손가락.

이에 아이들 또한 엄지를 척 치켜들고 일제히 이안을 쳐다보았다.

유치하고 웃긴데 이게 또 나름의 맛이 있었다.

그래서 이안 또한 똑같이 엄지를 아이들에게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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