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아주 염병들을 다채롭게 떤다.]
이를 보다 못한 녹스가 콧방귀를 세게 뀌었다.
못 볼 꼴을 봤다는 듯한 추임새에 이안은 몸을 들썩이며 폭소했다.
-왜, 귀엽잖아.
[귀엽긴. 소름 끼치게 유치하구만.]
-예전엔 애들이 맘에 쏙 든다고 졸개 삼고 싶다 하더니.
[그때랑 같니?]
-그럼 뭐가 달라?
[예전엔 솜털이 보송했는데, 지금은 시커먼 장닭들이 돼선.]
-장닭.
하여튼 비유가 찰지다.
이안은 녹스의 비유에 또다시 배를 부여잡고 파안대소를 했다.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장닭이 우는 것 같았으니까.
-애들 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여간에 회귀한 티 좀 내지 마라. 애들 크는 게 다 그렇지 뭐, 라니. 너는 그 애가 아니니?]
이안의 넉살에 녹스는 턱으로 녀석의 정수리를 꽉꽉 눌렀다.
아저씨처럼 굴지 말라는 뜻.
적당히 마음을 담아 눌러대다가 녹스가 턱이 눌린 발음으로 옹알거렸다.
[그나저나 쑥쑥 크는 게 저것들만은 아닌 것 같군.]
-응?
[저것들보다 빨리 자라는 게 있지 않으냐. 이번에 도움이 된 네놈의 금고 말이다.]
-아아, 수도에 있는 내 개인 금고?
[그래, 그거.]
-내가 이번에 그놈 덕을 좀 톡톡히 봤지.
이안은 치유학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며 입매를 올렸다.
알리노헤르에게 엿을 먹이는데 사용했던 그 상자들.
상자는 오로지 이안의 개인 자금으로 구매한 것이었다.
그리고 개인 자금은 아침 이슬을 판매해 벌어들인 수익금이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그 짧은 기간에 금화가 그 정도로 쌓일 줄이야.]
-그러게. 상상 이상이던데.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러다 얼마 안 가 네 아비보다 더 부자란 소리 듣겠다.]
-그럼 나야 좋지. 어차피 나중에 쓸 곳도 많이 생길 텐데.
돈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그것은 자유의 또 다른 말이었으니까.
기실 돈에 쪼들리다 보면 선택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제약을 받다 보면 사고의 폭이 좁아지고, 눈앞의 작은 이익에 눈이 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추구했던 목적이나 가치, 그런 것들을.
‘예전의 내가 그랬었지.’
은화 한 개가 없어서 쫄쫄 굶기 일쑤였던 시절.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어느샌가 살리카 가주를 막겠단 목적이 희미해져 갔다.
그게 어디 잊어서야 될 일이던가.
설령 기억 상실에 수십 번 걸릴지라도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건데…….
목적을 놓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인간다움마저 같이 버렸더랬다.
가짜 점쟁이 노릇을 하며 남의 아픔까지 이용했으니까.
<어이쿠. 집안에 우환이 끼었습니다. 죽음을 옮기는 붉은 모자 정령들이 기웃대는 것이.>
<이대로 놔두면 이 댁의 아픈 어린 도련님이 곧 급살을 맞을 것이오.>
<이를 어쩌나. 내가 쓴 술식 하나면 저것들을 당장에 내쫓을 수 있는데. 어디 한 번 봐 드릴까?>
돈이 없으면 사람이 어디까지 바닥을 치는지 보여주는 실로 부끄러운 과거였다.
왜냐면 붉은 모자 정령을 불러들인 게 저였기 때문이다.
“크흠.”
이안은 낯이 뜨거워지는 상념을 얼른 접어 한편에 밀어 넣었다.
뭣 같은 과거는 끄집어내 봐야 제 얼굴에 똥칠하기만 될 뿐이다.
없는 셈 칠 순 없으나, 굳이 되감을 필요는 없잖은가.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 이안은 끊겼던 대화를 도로 이어붙이려고 입을 달싹거렸다.
“무튼 나중을 위해…….”
그 순간.
그르르릉.
바로 앞쪽에서 짐승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에 이안은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렸다.
멈추란 신호에 곧장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숨마저 작게 내쉬었다.
이전의 들뜸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온통 경계심뿐이었다.
“이안, 여기까지가 교수님들이 정해주신 경계선이지?”
“어. 별이끼 나무 군락지가 끝났으니까.”
“여기를 넘어가면 뼈도 못 추린다고 들었는데…….”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경계선 너머는 가지 않는 게 좋고, 가더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그건 동쪽뿐 아니라 그라나토스의 어느 방향이든 똑같았다.
중간 지점인 별이끼 나무의 군락지까지는 괜찮은데, 그 이상은 위험하다.
한데도 이안을 비롯해 C반 전체가 이곳까지 와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진상 교수 알리노헤르 때문.
이안은 소리를 쫓아 주변을 기민하게 살폈다.
“어차피 알리노헤르 교수가 내준 시험을 완수하려면, 경계선을 넘어가야 해.”
“와. 경계선 너머에 있는 마물들 울음소리만 들어도 살이 떨려 죽겠다.”
“조심해야지. 저 너머에 있는 것들은 특히나 예민하니까.”
이안은 경계선에 시선을 둔 채로 치유학 수업의 끝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수준에 맞는 수업을 가르쳐 달라?>
알리노헤르가 살기를 아지랑이처럼 피우며 나직이 뇌까렸다.
과연 사냥꾼이었다.
뼛속까지 후비는 습한 기운에 이안의 전신이 욱신거려왔다.
그만큼 알리노헤르의 기세가 흉흉했다.
오죽하면 당장이라도 목이 뜯겨나갈 것 같단 착각이 들었을까.
<그래, 좋다. 원한다면 기꺼이 해드려야지.>
눈가를 번들거린 알리노헤르가 삐딱하게 짓씹었다.
대드는 먹잇감을 당장이라도 짓이겨버릴 것 같은 사나운 어조였다.
<단, 증명부터 해라. 내게 수업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 마침 그를 증명해 내기에 적당한 게 있군.>
<호랑줄무늬 물고기의 비늘, 그것을 구해와라.>
<치유학 수업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는 재료니, 고매한 학생들께서도 불만이 없을 터.>
알리노헤르가 비죽이며 시험이랍시고 들이민 지랄 맞은 과제.
이건 겉보기에는 그럴싸해도, 실상은 실패하라고 준 거였다.
호랑줄무늬 물고기 자체가 구하기 어려운 재료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 여자도 변한 게 없네.’
제 맘에 안 들면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하는 막돼먹은 그 성미.
그 성미에 죽어 나간 사람이 몇이던가.
핏물의 강을 몇 개나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무수히 많다.
언젠가는 그 성미가 부메랑이 되어 그 여자의 발목을 잡고 말 것이다.
그에 대해 생각하며 이안이 비죽 입꼬리를 올린 그때.
내내 조용히 있던 레브가 화가 난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알리노헤르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미치긴 했지. 에그르 2성 이상이 잡는 걸 과제로 내줬으니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2성도 최소 넷은 돼야 잡을 수 있는 물고긴데.”
“그 넷도 반드시 ‘생존 사냥꾼’이 있어야 하고.”
생존 사냥꾼.
‘약점 파악’ 기술이 있는 정령을 보유한 정령사이다.
상대의 약점을 한 방에 간파할 수 있어 굉장히 강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그들은 되레 사냥에는 젬병이다.
정령을 보유한 순간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하락하기 때문이다.
이런 치명적인 단점에도 생존 사냥꾼이 되려는 자들은 많다.
금화를 갈퀴로 쓸어 담을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였으니까.
“생존 사냥꾼도 없는데 우리보고 죽으란 얘기지.”
말을 할수록 분통이 터지는지 레브가 어조를 더욱 높였다.
녀석답지 않게 흥분할 만했다.
이건 맨손으로 칼 열 자루를 쥔 사람에게 덤비는 꼴이었으니까.
이안은 혈압을 올리는 레브의 어깨를 툭 치곤 자신 있게 내뱉었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실까.”
“하긴. 계획 살인마인 네가 있는데.”
“괜한 걱정했다 싶지?”
“조금? 근데 솔직히 걱정보단 교수 때문에 너무 짜증 난다.”
“그러니까 이 과제를 깔끔하게 완수해서 알리노헤르 면상을 뭉개버리자.”
“좋지. 가자, 이안.”
둘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목적지가 분명한 걸음을 뗐다.
호랑줄무늬 물고기의 서식지인 그라나토스 동북쪽 용암산으로.
* * *
“…….”
이안은 발길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깎아지를 듯한 천 길 낭떠러지가 동공에 박혀 들었다.
까마득했다.
게다가 짙은 설백색 안개가 자욱해선지 밑바닥은 보이지조차 않았다.
하염없이 밑으로 끌어당겨 지는 것 같은 느낌.
“다들 절벽에 너무 붙지 마.”
이안은 아이들에게 경고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즉시 절벽 아래를 보던 아이들이 곧장 서너 발자국 물러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레브만은 이안 옆에 남아 주변의 지형을 살폈다.
“이안 너도 조심해라. 안개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 현혹되는 것 같다.”
“어. 저 안개에 그런 효과가 있는 것 같네. 그나저나 길이 참 뭣 같다.”
“그러게. 건너라고 있는 곳은 확실히 아니다.”
“여기를 건너야 호랑줄무늬 물고기의 서식지에 갈 수 있는데…….”
두 사람 앞에 펼쳐진 풍경은 기묘했다.
징검다리 형식으로 무심히 툭툭 솟은 9개의 기암절벽.
그것은 누군가의 발길을 허락지 않는 듯, 풀 한 포기 없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몸통의 절반가량이 설백색 안개에 잠긴 채로 말이다.
그로 인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울거리는 천공의 섬 같달까.
정말 묘했다.
이안은 기암절벽의 몸체를 따라 가장 윗부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산봉우리는 접시처럼 평평했다.
하여 스무 명 정도는 그곳에 너끈히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의 간격이 꽤나 넓어 그냥 건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나의 간격이 대략 성인 두 명을 이어놓은 정도였으니까.
“일단 산봉우리 사이를 잇는 땅을 만들고…….”
이안이 눈가를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방도를 강구 하던 때였다.
촤아아아악.
첫 번째 기암절벽 근처에서 용암 기둥이 하늘까지 솟구쳤다가 쑤욱 하고 꺼졌다.
날름거리며 안개를 태우는 불똥들이 어찌나 위협적인지.
건널 생각 말라는 경고를 하는 듯했다.
이안은 불똥에 흔적 없이 녹은 자갈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생각에 잠긴 구김.
그것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레브가 은근슬쩍 제 생각을 덧붙였다.
혼자서만 그렇게 애쓰지 말라는 듯이.
“건널 땅도 땅이지만 뭣보다 이렇게 솟구치는 용암이 제일 문젠데.”
“심지어 초열이라 그냥 건넜다가는 바로 녹겠다.”
“그러게. 뼈도 못 추릴 것 같다.”
“게다가 분출되는 간격이 일정하지도 않네.”
“그러니까. 방금은 산봉우리 양옆이었는데 아까는 11시 방향에서 나왔어.”
“너무 제멋대로라 대처가 쉽지는 않겠는데?”
용암 기둥은 분출되는 간격이랄 게 없어서 그때그때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대책이 최선의 수인 경우였으니.
만일의 변수를 대비해 레브와 먼저 몇 마디 나눈 후.
이안은 솟아오른 용암 기둥을 주시하며 올리브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올리브, 이번 용암이 가라앉는 즉시 신호를 줄 테니까 건널 땅을 만들어.”
“캬캬캬. 내가 심히 중요한 역할이구만? 좋아. 2성 장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주지.”
쪼그려 앉아있던 올리브가 쪼작쪼작 어깨를 움직거렸다.
요동치는 어깨춤의 선으로 보아 신이 난 것 같았다.
난관이 있다손 치더라도 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맘에 든 모양이다.
하여튼 못 말린다.
이안은 옅게 웃으며 도로 기암절벽 사이에 시선을 두었다.
10여 초?
맹렬하던 용암 기둥이 꺼지려는 듯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움직일 시점이었다.
이안은 용암이 가라앉자마자 즉각 올리브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
진즉부터 이안을 주시하고 있던 올리브가 거칠게 대지를 후려쳤다.
뒤이어 발리올들 또한 똑같은 행동을 했다.
일제히 대지를 뒤흔들자 기암절벽 사이에 흙길이 생겨났다.
콰콰쾃.
흙길은 여려 겹으로 덧대어지며 튼튼하고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내가 먼저 갈 테니 다들 조심히 따라와.”
선두는 당연히 이안이었다.
혹여 모를 만일의 위협에 대비하려는 거였다.
선두를 따라.
무리의 중간은 올리브가, 후미는 레브가 맡아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이안, 나는 보호막을 칠게.”
레브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쏴아아아.
일사불란하게 루하흐와 그 정령들이 파도를 일으켰다.
흙길 양옆을 잇는 아치형의 파도는 동굴처럼 이안 일행을 감쌌다.
용암의 열기에서 보호하려는 것.
신비로운 코발트색 파도의 보호막 덕에 해저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해서 압박해 오는 주변의 열기를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기암절벽에 가까워질수록.
“후우.”
“헉. 허억.”
대기를 압박하는 열기가 상상을 뛰어넘었다.
숨통이 조여왔다.
이대로라면 물에 익은 찜닭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덕에 바빠진 건 레브 이하 루하흐들이었다.
끊임없이 파도의 보호막을 덧칠해야만 했으니까.
잠깐의 틈만 둬도 살이 벌겋게 익어버리는 상황에 죽을 둥 살 둥 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이고, 힘들다.’라는 곡소리를 벗 삼아 도착한 첫 번째 산봉우리.
이안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