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17화 (117/214)

제117화

기숙사 지붕 위.

이안은 무릎에 손을 올리고 앉아 텔로미어관을 주시했다.

그의 발치에는 사냥개가, 그의 어깨에는 오목눈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둥지를 튼 셋이 동시에 보고 있는 곳, 알리노헤르 교수실.

교수실에선 적색 불빛이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 빛이 꺼진 후.

사각 창가 너머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연기는 잠깐 멈칫하더니, 앞뒤 재볼 것도 없다는 듯 쏜살같이 이안에게로 날아들었다.

소 꼬리를 뱅글뱅글 돌리면서.

“나 무사히 다녀왔다, 이안.”

“수고했어, 로르.”

“히히. 수고는. 염탐하는 거 무척 재밌더라.”

“염탐꾼이 체질에 맞나 본데? 그렇다면 앞으로 종종?”

“언제든 나야 좋지.”

“그나저나 교수실에서 뭐 들은 거 있어?”

“두것들 작당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게 문제인 거다.

진부한 그 말, ‘거기서 거기’란 말이 사람 골 아프게 하는 데엔 일등 공신이 되기도 하니까.

계속 말해보라고 이안이 눈짓을 보내자 로르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사냥꾼 그것이 그리 말했다. 뷔트시겐 가주의 약점이니까 너에 관한 책을 잡아야 한다고.”

“…….”

“뷔트시겐 가주의 약점? 웃기고 자빠졌네. 멍청한 것들이 헛다리 짚는 꼴이라니.”

“하하. 다른 건?”

“정령에 관해서 얘기하던데.”

“정령?”

“처음부터 너한테는 폰투스의 매혹이 통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너에게 뭔가가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새였어. 매혹을 차단할, 숨겨둔 정령이 있을 거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단 말이지.”

이안은 폰투스 때문에 비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여튼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굴러가는 여자였다.

조각난 단서만으로 이만큼이나 유추해내다니 말이다.

“그동안 대머리독수리가 되겠다 싶을 정도로 머리카락을 만져대더니만.”

그 버릇으로 의심을 품은 것이다.

기실 폰투스는 누군가를 유혹할 때마다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매혹의 정령을 발동시키기 위한 신호였던 것.

이 행동 하나로 그 여자는 주변의 사람들을 제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그 못된 처먹은 손버릇을 내 앞에서도 수시로 반복했었지.’

참으로 열심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제게는 매혹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몸에 마력핵이 없다는 사실 때문.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핵이 없으면 정신계 공격이 통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핵이 생긴 다음에는 녹스로 인해서였다.

‘녀석이 가진 특유의 마력 파장 때문이지.’

그 파장이 정신계 공격에 완벽한 면역을 갖게 해주어서다.

이 사실을 알 리 없으니…….

이안은 저 멀리 불빛이 새는 알리노헤르 교수실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냥꾼이 냄새를 맡았다면 조심해야겠네.”

“필히 그래야겠더라. 기감이 어찌나 뛰어난지. 그것이 자꾸 내가 숨어 있는 비늘을 보는데, 어후.”

“왜 또 식겁하셨구만?”

“병에다 지릴 뻔했다.”

“아이고, 고대종께서 엄살은.”

“히히. 말이 그랬다는 거다. 그래도 그것이 확실히 알리노헤르 가 사람이긴 사람이더라.”

“기감 자체가 남들보다 스무 배가량 뛰어나니까 아무래도.”

“그게 그것들의 혈족 특징이라지?”

덕분에 알리노헤르 가는 언제나 중임을 맡았다.

기감이 원체 뛰어나 등급을 무시하고 상대의 기운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이 때문에 살리카 가주가 알리노헤르를 보낸 것이겠지.

“무튼. 애초부터 뭘 눈치채고 날 조사하러 온 건 아니란 거네.”

혹시나 했었다.

의심 많은 살리카 가주가 알과 저를 연결해 본 건 아닌가 하고.

다소 비약일 수 있는데 금덩이를 훔친 도둑의 심정 같은 거였다.

알을 얻을 수 있는 조건, 그걸 저나 살리카 가주 둘 다 아는 상황에서 가주가 저를 표적으로 삼았으니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지레 찔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책을 잡기 위해서라니 그나마 다행이군.’

최악은 피한 셈이었다.

그렇다고 잠재된 위험이 완전하게 제거된 건 아니었지만.

그를 알기에 로르가 오목눈이, 아니 텔로스를 발굽으로 톡톡 건드렸다.

“이안.”

“응?”

“녹스는 되도록 텔로스 안에서 지내게 해라. 아카데미 내에서만큼은.”

“아, 그래야지.”

“정히 저놈이 답답하다고 쫑알대면 그라나토스에 풀어놔 버려. 거긴 사냥꾼이라도 녹스의 기척을 절대 감지할 수 없을 테니까.”

로르가 채 입을 닫기도 전에 텔로스가 미친 듯이 팔짝팔짝 뛰었다.

자고 있던 녹스가 깨어난 것이다.

[내가 자는 사이에 대체 뭔 작당들이야? 어디다 날 가둬 놔?]

“갇혀있기 싫으면 아예 그라나토스에서 나가 살래? 그럼 나야 좋지.”

[뭐? 이 시커먼 소가 속까지 시커메선.]

“히히. 왜?”

[허구한 날 날 쫓아내고 이안이랑 둘이서만 살 궁리를 하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이 재수탱이야.]

“그럼 이안을 죽일 겨?”

[…….]

“거봐. 자기도 뾰족한 수가 없으면서. 그래놓고 성질만 부리긴.”

[으으으.]

“그러니까 텔로스한테 얌전히 붙어있어.”

말발 대전에서 이긴 로르가 발굽을 딱딱 부딪쳤다.

승리를 자축하는 손짓이었다.

그 경쾌한 발굽을 웃으며 보다가 이안은 쪼그린 몸을 펴며 일어섰다.

저 발굽을 한층 경쾌하게 만들 일이 하나 있었다.

“로르.”

“응?”

“루체한테 가자.”

“……나? 진짜 나? 녹스 아니고?”

“어. 루체가 오라던데. 녹스도 같이.”

“진짜로오오오오?”

믿기지 않는지 로르가 연거푸 물으며 앞발을 꼬무작거렸다.

그 움직임에는 좋은데, 좋아할 수 없는 복잡함이 담겨있었다.

이안은 쉽사리 따라오지 못하는 로르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다, 로르.”

“안 되지, 절대 안 돼. 내 동생의 허연 털이 벌써 생각이 안 나는데.”

“그나저나 루체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뭔지 궁금하네.”

“할 말?”

“다른 관리자도 부른다는 걸 보면……. 흐음.”

이안이 의문을 갖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로르의 고개도 같이 기울어졌다.

덩달아 사냥개의 고개도, 오목눈이의 목도 옆을 향했다.

대체 그게 뭘까, 라는 듯이.

* * *

<아, 맞다. 나는 뭘 좀 가지고 갈 게 있거든. 일단 기숙사에 들렀다 갈 테니까 너희 먼저 출발해.>

<너무 늦지 않게 와라.>

소 꼬리를 흔든 로르는 이안이 기숙사 쪽으로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느릿하고 여유로운 그림자가 오늘따라 어찌나 당돌해 보이던지.

그 뒤태를 지그시 보다가 로르가 대뜸 녹스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정확히는 오목눈이의 옆구리였다.

“이안 저놈은 말이야. 세상에 다시 없을 놈이야.”

[그걸 이제 알았간?]

“진즉부터 꼴통인 건 알았지. 근데 이번 건 좀 세지 않았어?”

[세긴 셌지. 내가 다 식은땀이 났으니까.]

“초열의 우두머리를 두고 어떻게 맞짱 뜰 생각을 하지? 겨우 에르그 1성인 녀석이.”

[훗. 내 제자잖아.]

거들먹댄 녹스는 콧대를 세우며 어제의 무용담을 세차게 되감아 보았다.

<물러서! 뒈지고 싶지 않으면.>

초열의 우두머리의 등장에 주춤하던 것도 잠시.

이안은 일절 망설이지 않고 라젤린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러더니 바람에 찬기를 실어 호수 온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금세 살얼음이 낀 호수.

그 탓에 호랑줄무늬 물고기의 움직임이 둔중해지자 우두머리의 동공이 일순 움찔거렸다.

[크으으으. 그 상황에서 물고기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다니.]

“난 그 협박이 먹힌 게 더 신기하다.”

[물고기가 죽어버리면 우두머리도 살 수 없으니까.]

“하긴. 살려면 애송이의 협박이라도 들을 수밖에 없었겠지.”

[네가 그 우두머리의 눈빛을 봤어야 하는데.]

“왜 나 처음 봤을 때랑 똑같았어?”

[염병한다. 그 썩은 동태 눈깔하고 같았을까. 보기만 해도 어?]

“회까닥 돈 눈빛?”

[어. 그거, 그거. 근데 그 눈빛이 내 옆에도 있더라고. 완전 똑같이.]

“히히. 이안?”

[어떻게 알았대?]

“안 봐도 뻔하지. 그딴 상황에 눈깔이 안 뒤집히면 이안이 아니지.”

[푸흐흐흐흘.]

“근데 말이야. 좀 많이 궁금하다. 대체 초열의 우두머리는 그 시간에 왜 나온 거야?”

시종 가볍던 대화의 끝머리.

로르가 녹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줄였다.

이에 녹스 또한 귀를 쫑긋거리며 로르에게로 바싹 붙었다.

[그게 말이지…….]

“뭐 아는 거 있어?”

[다 끝나고 안 건데, 호수 쪽에 누군가가 장난질을 쳐놨더라고.]

“장난질?”

[응. 공간 조작. 정오인데 저녁으로 보이게끔.]

“설마…….”

로르와 녹스의 시선이 동시에 어느 한 곳에 못 박혔다.

정확히는 올드 로즈가 만발한 사각의 창가에 말이다.

* * *

다그닥.

동쪽 관리자인 오쿨루스는 미밀나무의 꼭대기에 올랐다.

허공에 동동 뜬 채 끝없이 위로 이어진 계단.

오쿨루스의 발굽이 닿을 때마다 계단의 색이 알록달록하게 변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항상 누군가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군.”

그래서이리라.

계단을 밟고 있으면 퍽 기분이 고양되었다.

기분 좋음을 타고 형형색색의 무한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길 10여 분.

오쿨루스의 시야가 급변하며 공간이 통째로 바뀌었다.

“…….”

이동된 곳은…… 어딘가의 집무실이었다.

책상에 놓인 화려한 깃펜, 돌돌 말린 고급스러운 양피지, 실론흑단의 책상.

작은 물품 하나까지도 고아한 집무실은 묵직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용하는 이의 향취가 묻어나는 곳이 공간이지 않던가.

오쿨루스는 주인의 성정이 드러나는 공간의 끝자락으로 시선을 느릿하게 이동시켰다.

그곳에는 어떤 노인이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은발에 은색 동공을 지닌 노인이.

그 노인에게 다가간 오쿨루스가 그의 이름을 익숙한 듯 불렀다.

“라에라트.”

“……아.”

고개를 든 노인이 상대를 확인하더니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어쩐지 손길에는 곤란함이 묻어나왔다.

“‘라에라트’라고 부르지 말게, 동쪽 관리자.”

“황제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별스럽긴.”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그래서라고. 그 이름의 무게에 걸맞은 자는 한 분뿐이지.”

최고의 정령사인 초대 황제.

그가 가졌던 무수한 업적과 영광은 지독히도 찬란하게 빛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였다.

초대 황제의 이름이 드높아질수록 후손들은 그 이름이 버거워졌다.

제가 그리 불릴 때마다 영광을 깎아 먹는 것 같았으니까.

더러 어떤 황제는 편집증적으로 그 이름을 멀리하기도 했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지만 현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라에라트라는 이름이 몹시 무거워 조금쯤은 거리를 두고 싶었다.

황제는 밀려오는 상념을 접고 고갯짓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아서 얘기하세.”

“그래야겠네. 황제가 내내 올려다보게 할 순 없으니 말일세.”

눈높이를 인간에게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하여 오쿨루스는 으레 그래왔듯이 목을 아래로 늘이며 발을 연거푸 굴렸다.

다각. 다각.

발 굴림에 청록색 털이 흩날린 직후였다.

오쿨루스는 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요염한 자태의 여성체가 되었다.

인간의 형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황제와 대면할 때는 예외였다.

맞지 않는 눈높이로 상대의 목을 혹사할 필요는 없으니까.

걸터앉듯 오쿨루스가 자리를 잡자 황제가 틈을 두지 않고 운을 뗐다.

“크흠.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어딘가 모르게 조바심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황태자가 죽었을 때조차 무서우리만치 침착하던 황제였는데.

어째 지금은 여유라곤 쌀알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대에게 연통을 보냈네.”

“그게 무엇이냐 되묻지 않아도 알겠군.”

“관리자 그대가 짐작한 대로일세. 그 아이.”

황제의 음색은 한없이 가라앉아 낮게 굴러갔다.

“솔직히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지. 심히 잘 알고 있는데…….”

“…….”

“아무래도 그 아이가 알을 얻은 것 같아서 말이네.”

“흐응?”

“이안 뷔트시겐, 뷔트시겐의 어린 적자가 말일세.”

황제의 말이 끝나자 침묵이 흘렀다.

수 초?

잠깐의 정적 후에 황제가 속이 타는 모양인지 입술을 축이며 중얼거렸다.

“그 아이밖에 없지. 이 제국 내에서 탑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는.”

“왜, 알을 얻을 수 있는 조건 때문에?”

“그렇다네.”

“한데…….”

오쿨루스가 침잠하는 황제의 음색을 낚아 올리듯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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