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18화 (118/214)

제118화

“테시우스, 그대도 알지 않나? 황가의 핏줄이 아닌 자가 알을 얻으면 그 즉시 수호자가 죽인다는 것을.”

“……그러니 답답한 걸세. 근거들이 충돌하고 있으니 말이야.”

“흠. 그래서?”

“이에 대해 누군가와 상의를 하고 싶은데, 적절한 사람이 주위에 없더군.”

“정령사 협회가 있지 않나.”

“협회장 그자를 부른 순간부터 나달거릴 입들이 생기겠지. 그 입들을 거치면 내 의도가 왜곡되어 뷔트시겐에 전달될 테고.”

발이 없어도 천 길을 간다는 소문은 그랬다.

예를 들어 황제가 기록관에게 ‘글씨체가 예쁘다.’라는 말을 했다 치자.

그 말이 몇 사람을 거치면 변형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황제가 기록관에게 예쁘다고 말하며 개수작을 부렸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소문이 무서운 것이다.

형체는 없으나 누군가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죽일 수도 있으니까.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황제로선 대화 상대를 신중히 골라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쪽 관리자는 적절한 상대였다.

다른 관리자들과 달리 꾸준하게 황가와 교류가 있었으니 말이다.

“빙빙 돌리지 않겠네. 이안 뷔트시겐에 대해 말해보게.”

“내 대답도 그대의 측근, 레와티움들이 조사한 바와 다르지 않을 걸세.”

“다르지 않다?”

빠른 성장 속도와 천재적 기질, 뷔트시겐 가주를 닮은 성정.

누구나 아는 빤한 얘기를 듣겠다고 황제가 불렀을까.

오쿨루스는 무심하게 수호자가 내려놓은 홍차를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 비친 황제의 얼굴이 자못 수척해 보였다.

잠깐 사이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늙음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오쿨루스는 슬쩍 정보를 더 흘렸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에루리안에선 그리 불리더군. ‘영악한 애송이, 오늘만 사는 또라이’라고.”

“…….”

“원하는 것은 기어이 손에 쥐고 만다고 했던가.”

“원하는 것을 기어이…….”

“그렇다네. 소문이 파다하지. 집요하고 독한 구석이 있다고.”

“그러한가.”

“대충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라네.”

“흐음. 별다르게 눈에 띄는 점은 없고?”

“눈에 띈다, 라…….”

나이 70이면 한창 궁금할 게 많을 때였다.

질문 폭탄을 던지는 황제의 물음에 오쿨루스는 발굽을 굴렸다.

정보를 어디까지 풀어야 하나 가늠해보기 위함이었다.

“아, 그 아이 특이 체질이라 하더군.”

“특이 체질?”

“테시우스 그대도 알 걸세. 뷔트시겐 가주의 체질 말이야.”

“상성이 맞는 환경에서는 마력을 무한으로 빨아들이는 그 체질 말인가.”

“신기하지 않나? 보통은 대를 이어 발현되지 않는 체질인데.”

“……희한하긴 하군.”

“더 재미있는 게 무엇인지 아나, 테시우스?”

“속이 말이 아닌 걸 알면서 뜸 들이지 말게.”

“후훗. 그 아이의 체질과 맞는 환경이 글쎄 그라나토스라지 뭔가.”

“……?!”

수호자가 태어나는 곳이며 황자가 황태자로서 자격을 갖추는 곳.

여신의 모든 축복이 응축되어 자애롭게 흐르는 땅.

그라나토스는 황가의 상징이며 심장 같은 곳이었다.

하여 오로지 황가의 핏줄에게만 허락된 장소인데…….

“그 아이에게 그라나토스가…….”

말의 끝머리를 흐린 황제는 제 옆에 있는 수호자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복잡미묘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담겨있달까.

그 눈길을 따라 오쿨루스도 자연스럽게 수호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무나 조용했다.

애초에 여기에 있었나 싶게 망부석처럼 뻣뻣하게 서 있기만 했다.

세대교체의 징조가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능글능글하던 자가 저리 말이 없어진 것을 보면.’

그의 사정은 그럴지라도 오히려 우수에 젖어 있는 수호자는 참으로 잘생겨 보였다.

저 꼴로 쳐다보면 없는 땅문서라도 주고 싶어진달까.

잘생김이 죄인 수호자의 몸뚱어리를 오쿨루스는 대놓고 훑어보았다.

지금 보아하니 말짱했다.

몸이 투명해지는 현상은 그때 한 번뿐이었다고 했던가.

본디 징조가 나타나면 계속 그 증상이 지속되는데…….

오쿨루스는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염려된다는 듯 나긋한 투로 물었다.

“수호자 그대는.”

“…….”

“괜찮냐 묻는 걸세.”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뭔데.”

“가시를 세우긴. 여튼 따로 묻고 싶은 건 없고?”

“없어. 현실보다 꿈을 더 좋아하는 동쪽 관리자 너에게는.”

“흐응. 때로는 꿈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으니 잘 생각해보시게.”

“한데 신기하군. 모든 것에 무정한 오쿨루스가 내게 다 관심을 보이다니.”

“클클클.”

“내 꿈이 맛있어지기라도 했나?”

수호자가 눈을 가늘게 좁히자, 오쿨루스는 씨익 웃어 보였다.

탐색하는 수호자의 눈빛이 매서웠다.

이미 제 속에 든 것들을 낱낱이 들여다본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미남의 수작질이라도 떠보는 것에 어찌 당해줄까.

입매를 굳힌 오쿨루스는 선을 긋는 투로 단호히 말했다.

“아직 맛보지도 않은 수호자 그대의 꿈이 맛난지, 아닌지 내 어찌 알아.”

“맛보게 해주면 지금의 의뭉스러움을 거둬들일 텐가.”

“글쎄.”

“…….”

“난 멀찍이서 지켜보는 게 더 구미에 맞네. 그들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깊숙이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필요하다면 그들의 미몽을 거닐면 되니까.

“과연 그럴까. 관리자 너는 꿈만 마음에 든다면 그게 누구든 편을 들겠지.”

“…….”

“그리고 지금 네 마음에 드는 꿈은 여기에 없는 것 같고.”

정곡이었다.

정작 찔러보는 수호자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누가 수호자 아니랄까 봐 예리하긴.

뜨끔했지만 오쿨루스는 평이한 낯을 한 채 대화를 흘려넘겼다.

사실 입으로는 중립이라고 하면서도 이안의 편을 들고 있는 게 맞았다.

정작 인연이 깊은 건 황제인데도.

만약 이안의 꿈이 제 오감을 뒤틀 만큼 달콤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지금과는 결과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오쿨루스는 수호자의 뾰족한 눈초리를 받으며 또다시 발굽을 굴렸다.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그리 생각한다면 하나만 말하지. 여태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개입하지 말게.”

“흐응.”

“동쪽 관리자 네가 개입하는 건 큰 변수가 될 수 있거든.”

“그런 번드르르한 말로 추켜세워주긴.”

넉살을 떤 오쿨루스는 냉랭한 수호자의 모습에서 누군가를 겹쳐 보았다.

애송이 이안 뷔트시겐을.

전혀 연관성이 없는데도 둘 다 잘생겼기 때문일까.

마침맞게 꼭 한 묶음이 되었다.

그래서이리라.

수호자만큼이나 이안이란 인간은 오래오래 두고 보고 싶은 자였다.

이렇게 구미에 맞는 꿈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니까.

영글어가는 애송이의 꿈을 언젠가는 또 맛볼 날이 오겠지.

오쿨루스는 기대감에 클클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그 애송이가 이에 대해 알게 됐으려나.’

아직 그 애송이는 전혀 모르고 있다.

저의 존재가 황제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에 대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끈적한 위협이 지척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 * *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북쪽 관리자의 성 앞마당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이안은 길쭉한 의자에 앉아 제 앞에 펼쳐진 풍경을 생경하게 보았다.

원형 탁자에서 솟아나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

이곳에서 날 리 없는 소리가 축포처럼 터지고 있었다.

물론 가장 크게 터지고 있는 건.

“으하하하핫.”

단연코 녹스였다.

텔로스의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진 탓일까.

녀석은 감옥에서 막 탈옥한 탈옥범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자유를 최대한 만끽하려는 몸부림.

그 얼큰함을 따라 녹스의 손에 들린 와인 잔이 격하게 출렁거렸다.

“마시고 죽자!”

“히히히. 그래. 코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자!”

“쪼아, 가즈아.”

“끝까지 달려엇! 너 죽고 나 살자!”

주정뱅이 녹스와 대작하고 있는 건 친애하는 원수인 로르였다.

뭐든 통이 큰 녀석답게 로르는 병째 와인을 들이붓고 있었다.

병나발이 아주 능숙한 게 숙련된 전문가였다.

반면.

사냥개와 텔로스는 사과 주스를 홀짝이며 수줍게 잔을 부딪쳤다.

이쪽은 맞선 남녀였고, 저쪽은 그냥 아저씨들이었다.

“이 와중에도 각자 개성은 있네.”

이안은 포도 주스를 들이켜며 제각각인 무리를 총평했다.

하는 행동들에서 성격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런 면에서.

이 왁자지껄함에 몸을 맡기지 않은 정령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성의 주인인 루체.

녀석을 보려고 이안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무리와 한참 떨어진 오른쪽 구석.

뻑뻑. 뻑뻑뻑.

루체가 삐딱하게 파이프 담배를 물고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인이 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걸까.

걸인들에게 잔칫상을 점령당한 잔칫상의 주인 같은 꼬락서니라니.

그게 못내 걸렸다.

해서 말이나 붙여볼까 하고 일어섰는데, 루체가 다가오지 말라며 꼬리를 흔들었다.

꽤나 필사적이었다.

쑥스러워하긴.

오지 말란다고 ‘알았어’ 할 성격이 아니잖은가.

이안이 루체에게 가려고 엉거주춤 발을 뗀 순간.

“오오오. 이거 봐, 녹스.”

병나발을 멈춘 로르가 두툼한 앞발로 시커멓고 각진 물건을 요리조리 돌렸다.

“이게 선-그라스 라는 거지?”

“응. 태양을 피할 때 쓰는 안경이지.”

“근데 뭐가 이렇게 시커메?”

“요즘 멋쟁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색이라잖냐.”

“이런 거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뭐 이런 거?”

“그런 거지.”

로르의 한 마디에 녹스가 적극적으로 대답하고 나섰다.

평소에는 로르가 입만 떼면 반대부터 하고 보더니 지금은 죽이 잘 맞았다.

이게 다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녹스는 히죽이며 마음에 쏙 드는 까만 안경을 연신 조물거렸다.

“일단 로르 넌 나한테 고마워해.”

“응?”

“선-그라스라는 걸 나 아니면 볼 수라도 있었겠어? 이게 다 내가 아이들을 살려서 이안이 선물로 준 거라고.”

“무슨. 나 때문이거든?”

“뭔 헛소리를 그렇게 자신 있게 해?”

“벌써 잊은겨? 내가 염탐꾼 노릇을 잘해서 준 거라니까.”

“아니거든.”

“맞거든.”

적과의 동침은 얼마 가지 못했다.

결국, 남은 건 서로에 대한 개무시 뿐이었다.

톡톡 쏘는 녹스의 항의에도 로르는 해죽이며 선-그라스를 눈에 걸쳤다.

“히히. 아무것도 안 보인다.”

로르의 까만 피부로 인해 완전 물아일체 수준이었다.

어디가 피부고, 어디가 안경인지.

미친 소화력에 감탄하며 이안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란히, 그리고 줄줄이 선-그라스를 쓰고 있는 정령들.

녀석들은 길쭉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로르, 사냥개, 오목눈이, 하다못해 녹스까지.

뭔가 어울리는 듯 아닌 듯 오묘함을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나름 보는 맛이 있달까.

구경꾼이 된 이안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그림 감상하듯 그러다 애초 이곳에 온 목적을 향해 몸을 돌렸다.

대화를 나눠야 할 루체에게로였다.

제가 바싹 다가가자.

“……!!”

이쪽을 흘낏 본 루체가 황급히 선-그라스를 벗었다.

이래서 오지 말라고 했나 보다.

앞발에 끼인 안경을 털어봐야 이미 다 들켰다.

“푸흡. 루체.”

“크흠. 뭐 이리 빨리 오……. 아니, 연회는 충분히 즐긴 건가?”

“충분히. 힘써준 주인장이 서운치 않을 만큼.”

“잘 놀았다니 나도 만족스럽군.”

루체가 이안과 정령들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흡족한 듯, 약간 여운이 남는 듯.

고갯짓하던 루체가 이내 무언가를 털어내려는 것처럼 파이프 담배를 깊게 빼물었다.

“그럼 연회도 끝났겠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아. 근데 다른 관리자들도 불렀다고 하지 않았나?”

이안은 이 시간까지도 오지 않는 다른 관리자들 때문에 의문을 표했다.

여기 오기 전에 들은 바론 분명 다들 참석한다고 했는데.

“오쿨루스는 바쁘다고 하더군. 서쪽 관리자는 한창 자라는 어린 애라 잠이 많고.”

한창 자라는 그 애의 나이가 천 살이 넘는다.

그게 유아기라니.

백 살 밖에 못사는 인간으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들의 사정은 알겠고. 그래서 할 말이 뭔데?”

“…….”

이안의 물음에 루체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미적거리는 걸까.

입 열리는 거 기다리다 속 터지겠다.

이안이 어서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꿈틀하자, 그제야 루체가 주둥이를 느리게 벌렸다.

“이안, 놀라지 말고 들어라.”

“어, 말해.”

“황제가 널 의심하는 것 같다. 수호자와 결속을 맺었다고.”

“……황제가?”

이안의 동공이 사정없이 구겨짐과 동시에였다.

덜그렁.

희희낙락하던 정령들의 까만 안경이 일시에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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