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19화 (119/214)

제119화

이안이 떠나고 난 뒤였다.

로르는 루체의 성에 남아 루체 곁을 빙빙 맴돌았다.

어쩜 저리 온몸에서 빛이 나는지.

광택 나는 하얀 털을 보고만 있어도 날아갈 듯 기분이 붕붕 떴다.

한없이 굼실대는 엉덩이를 주체하지 못하자, 루체가 진정시키듯 먼저 말을 건넸다.

“로르, 연회는 재미있었나?”

“당연하지. 내 동생이 연 건데 말이라고.”

“그렇다면 뭐.”

루체가 즐거웠으면 그만이라는 듯 파이프 담배를 톡톡 두드렸다.

다소 무심한 손길이 참 도도했다.

언제 봐도 제 동생 같은 행동이었지만…… 이번은 뭐랄까.

연거푸 연회에 관해 묻는 것도 그렇고 뭔가 약간 달랐다.

어쩐지 아쉬움이 묻어난다고 해야 하나.

고개를 기울인 로르는 빙글거림을 멈추고 루체를 빤히 보았다.

“그나저나 루체, 시끄러운 거 딱 질색하면서 웬일이야? 연회를 다 열고.”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아……. 혹 이제 곧 이안이 떠나는 것 때문에 그래?”

“뭐 겸사겸사.”

“오호. 아쉬운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거구만?”

“…….”

“하긴 나도 아쉽다. 얼마 안 있으면 이안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이안이 2학년으로 올라가면 1년은 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셈하면 시간이 아직 많이 남은 거지만…….

이번 학기가 끝나면 돌아간다는 게 이안의 결정이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게 못내 아쉬워서 로르의 꼬리 돌림이 거북이처럼 느려졌다.

매가리 없는 모양새.

이에 로르를 곁눈질하던 루체의 눈빛이 깊어졌다.

“너는?”

“나?”

“애송이가 떠날 때 따라갈 건가?”

“나야 좋지. 이안을 따라갈 수 있으면.”

“그래서…… 결론은?”

“히히.”

로르는 웃었지만 웃는 입매에는 이전과 달리 미약한 씁쓸함이 내려앉았다.

꼭 나무에 매인 코끼리 같은 몰골이었다.

덩치에 안 어울리는 풀 죽음 뒤에 로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알잖아, 루체. 탑의 관리자가 지닌 숙명이 뭔지.”

“숙명…….”

“응. 그라나토스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거.”

“결속하면 될 터인데. 그럼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지 않나.”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게 또 완전한 속박의 풀림은 아니니까.”

“하긴. 결속한 상태에서도 결속자보다 탑을 우선해야 하지.”

“응. 결국, 소멸할 때까지 관리자의 의무가 먼저인 게 우리이니.”

예컨대.

자신의 결속자가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 놓였다 치자.

이때조차 탑이 부르면 관리자는 즉각 그라나토스로 와야 한다.

죽어가는 결속자를 못 본 척 내팽개치고 말이다.

그게 탑의 관리자가 지닌 숙명이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씁쓸한 상념 끝에 로르가 꼬리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세찬 움직임에 루체의 하얀 털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히히. 그래서 안 갈라고.”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갈 줄 알았더니만.”

“루체 너도 알다시피 내가 한 심약하잖아. 난 그냥 한 가지만 할래. 탑 지키는 거.”

“흐음.”

로르는 두려운 것이다.

혹여 그런 상황이 닥쳐 결속자를 잃을 수도 있게 될까 봐 말이다.

그 속내를 아는 루체의 시선이 한정 없이 길어졌다.

말없이 보기만 하자 로르가 멋쩍은 듯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안은 관리자의 길을 따라 잘 빠져나갔으려나?”

“그랬겠지. 문제는…….”

루체는 부러 로르의 화제 전환을 모른 척하며 넘어가 주었다.

결속에 관한 선택은 온전히 로르의 몫이기 때문이다.

콧잔등을 실룩한 루체는 더 말을 보태지 않고 민들레 홀씨 모양의 천리안만을 응시했다.

길이야 안전하니까 잘 빠져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길이 아니라 그 녀석 자체였다.

레와티움이 숲을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그 녀석의 표정이 어째…….

얄궂었다고 해야 하나.

“그 애송이가 얌전히 기숙사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 * *

<애송이, 관리자들의 영역 근처에 감시석이 쫘악 깔렸다.>

<그뿐일까. 레와티움들 역시 그라나토스를 활보하고 있지.>

감시의 눈을 피하려고 사용하게 된 관리자의 길.

“아까 올 때도 생각했지만 재밌네.”

이안은 성의 뒤편에 있는 달팽이 모양의 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이 만드는 길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아서일까.

정령들은 바로 제 코앞에서 노닐면서도 그를 인지하지 못했다.

뿐이랴.

그의 몸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인 양 그를 통과해 지나쳤다.

츠즛.

이안이 진 안으로 걸어가자 절벽 꼭대기에서 아래로 이동되었다.

거기에도 똑같이 있는 달팽이 모양의 진.

딱딱한 등껍질을 따라 조금 걷자 청자색 길이 나타났다.

양어깨 너비?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빙글빙글 돌며 얼마쯤 나아갔을까.

어느 사이 이안은 그라나토스의 중앙에 당도해 있었다.

-와, 빠르긴 빠르다. 몇 시간 걸리는 거리를 단 10분 만에.

[꽤 유용하구나. 비밀 통로답게.]

통로를 빠져나오자마자 녹스가 정찰병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잔뜩 경계하는 눈길이 칼날처럼 서슬 파랬다.

혹여 레와티움이 주변에 있을까 우려하는 것이었다.

[조심해서 기숙사로 돌아가야겠다.]

-그래야지. 근데 나 아까 뒤통수가 좀 얼얼했다.

[아, 황제가 의심한다고 한 것 때문에? 나도 그 소리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기가 막힌 듯 녹스의 눈구멍이 크게 위로 치떠졌다.

흰자위만 보이는 기세가 제법 흉흉했다.

예상치 못한 위험이 손쓸 새도 없이 턱밑까지 왔으니 그럴밖에.

[하아. 그쪽으로는 아예 안심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랬어. 시간이 좀 남아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좀이 아니라 많았지 않누.]

-본래는 황제의 수호자에게 징조가 나타나려면, 이쪽에서 4대 원소를 모두 다룰 수 있어야 하지?

[당연하지. 그래서 내가 별 대비를 안 했던 거다.]

-하긴. 아직 바람밖에 못 다루는 날 두고 사서 걱정을 하는 건 좀.

[내 말이 그 말이다.]

녹스가 희번덕대며 말을 쉼표도 없이 쏟아냈다.

[근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밖에 없어. 내 금제가 풀렸던 그 날. 굳이 짚어보자면 그날 신호가 간 것 같은데.]

원인이 무엇이든 결과는 하나였다.

황제가 알아버렸다는 것.

이미 물꼬가 터져서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렇기에 이안과 녹스는 이르게 찾아온 사태에 대해 한참 얘기를 나누었다.

이왕 벌어진 일을 한탄만 하고 있어서 뭐하겠는가.

넋두리할 시간에 뭐라도 수습을 해보는 게 낫지.

대화의 말미에 이안은 코트에 손을 넣고 느른하게 어딘가로 걸었다.

결코, 서둘지 않으나 단호한 걸음.

망설이지 않는 뒤태를 뒤쫓으며 녹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딜 가는 것이냐? 기숙사는 반대 방향인데.]

-레와티움을 만나러.

[뭐? 그것들을 피해도 모자랄 판국에 대체 왜?]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저거, 저거 눈자위가 희번덕대는 게 또 회까닥 돌았네.]

-달리 방법 있어? 의심을 거두게 할 방법 말이야.

[끄응.]

-그나마 이 방법이 제일 나을걸? ‘난 아무것도 없다.’를 대놓고 보여주는 거.

[그런다고 의심이 걷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혼란은 주겠지.

생눈으로 직접 본 것과 의심 사이.

두 가지가 충돌하면 되레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찌할 수 없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을 터.

[대체 그것들을 헷갈리게 만들려는 의도가 뭐냐.]

-시간을 벌려고.

[……시간?]

이안의 말에 녹스가 옅은 의문을 드러냈다.

그러다 이내 생각나는 게 있는지 바로 탄성을 내질렀다.

[아아, 파라칸시스 시합 때까지?]

-어. 우선 불의 가시가 중요하니까 그때까지만 시간을 벌면 돼.

갈팡질팡하다 보면 결국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 사이 이안은 시합을 무사히 치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난 뒤엔…….

이안은 어슴푸레한 빛이 내려앉은 서쪽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루체의 천리안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잠시 후.

이안은 그라나토스를 쑤시고 다니는 불청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은발의 머리카락을.

바스락.

부러 소리를 낸 이안은 은발의 불청객들에게 접근했다.

어둠을 뚫고 불쑥 나타난 그림자.

”……!!“

이안의 등장에 레와티움 다섯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은밀한 움직임을 들켰으니 그럴 것이다.

거기다.

설령 들킬지라도 절대 들켜선 안 되는 상대와 맞닥뜨렸으니 뭐.

감정을 극도로 절제할 줄 아는 레와티움이라도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요는 찰나일 뿐이었다.

레와티움들은 지독한 무표정으로 돌아가 이안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 와중에 예의를 차린다.

누가 서방예의지국의 참된 인재상들 아니랄까 봐.

“레와티움.”

“…….”

이안이 상대를 특정하며 이름을 부른 즉시였다.

무리의 중간에 있는 남자가 제 목울대를 약하게 눌렀다.

그게 어떤 술식 같은 거였는지, 허공에 조금씩 글자들이 만들어졌다.

말을 못 하는 레와티움의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레와티움끼리는 수어를, 다른 이에게 할 말을 전달할 때는 이것을 사용했다.

[뷔트시겐 도련님.]

“이거 당황스럽군. 여기서 레와티움을 만날 줄은.”

[아…….]

“엉덩이 무겁기로 유명한 레와티움이 여긴 어인 일로.”

[폐하의 명으로 왔습니다.]

“황제께서? 이 변방의 아카데미에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아…… 도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그라나토스의 생태가 워낙 독특하지 않습니까.]

“한데.”

[하여 폐하께서 이곳의 생태를 면밀하게 조사해보라 명하셨습니다.]

아아, 변명을 그렇게 하시겠다?

알고 봤더니 레와티움들이 거짓말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뻔뻔한 레와티움들을 비스듬하게 쳐다보았다.

“그래, 조사해보니 건질만 한 게 나오던가?”

[아직……. 별다른 것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레와티움식의 언어를 해석하면 이랬다.

‘이안 뷔트시겐에게서 아직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증거를 모으지 못했기 때문일까.

끊임없이 탐색하는 레와티움의 시선이 이안의 안면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게 또 어찌나 집요하고 날카로운지.

이에 이안은 부러 마력을 끌어올리며 제 기운을 겉으로 드러냈다.

후웅.

그러자 미풍에 레와티움들의 머리카락이 산발했다.

조금 심술궂게 마력 파장을 내보인 이유야.

어차피 바람의 파장밖에 읽히지 않을 테니 실컷 봐라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거, 어디 골이 빠개지도록 분석해보라는 의도도 다분히 섞여 있었고.

“며칠 고생하다 보면 얻을 수 있겠지.”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폐하의 근심을 덜기 위해서라도.]

“이 망할 생태가 뭐라고 우리 황제 폐하께 근심을 안겨주는지 원.”

이안은 제 얘기가 아니라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능청을 떨었다.

찌르. 찌르르.

때맞춰 ‘망할’이란 말에 반응한 듯 텔로스가 해맑게 우짖었다.

청아한 목청이 금세 귓가를 잡아챘다.

그러더니 절 좀 보라는 것처럼 레와티움의 주변을 너울너울 휘돌았다.

“…….”

시선을 강탈하는 텔로스의 날갯짓.

쉼 없는 움직임에 레와티움들의 탁색 동공이 붙박였다.

탐색과 호기심, 그리고 뭔가를 꿰뚫어 보려는 예리함.

다양한 감정이 얽힌 시선은 텔로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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