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이 새…….]
“예쁘지 않나?”
[혹, 정령인 겁니까?]
“아. 한…… 두 달쯤 됐나? 그쯤에 얻은 것 같군.”
이안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을 늘어놓았다.
목적한 바가 있어서다.
저들이 형상을 바꾼 텔로스를 알아보나 확인하기 위함이 첫째요.
알아보지 못한다면 녹스의 기척을 감지하나 살펴보기 위함이 둘째였다.
그리고 궁극적으론.
저들이 보고할 자의 귀에도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한데 정령의 기운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보아하니…… ‘허’ 속성인 것 같은데.]
“과연 바로 맞추는군.”
[참으로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어둠이나 빛보다 더 희귀한 속성과 결속하시다니.]
허 속성.
무 속성이자 가짜 속성이라고 불리는 속성이다.
일반적으로 허 속성을 가진 정령은 바람, 물, 불같은 본연의 특징이 없다.
대신 자신의 결속자가 가진 정령의 속성 중 하나를 그때그때 흉내 낸다.
오늘은 어둠, 내일은 번개 이런 식으로 하나씩 말이다.
베끼기의 달인, 허 속성 정령.
원체 희귀해서 세간에는 ‘있긴 하나.’라는 논란이 일 정도로 말이 많은 정령이다.
이런 실정에 눈으로만 훑어서 어디 조사가 성에 차랴.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까이서 정령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이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였다.
레와티움들이 득달같이 텔로스를 요리조리 살폈다.
흠집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아주 혈안이 되셨구만.
두 눈에 쌍불을 키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건 단순히 희귀해서만은 아니었다.
뭔가 미심쩍어서 그런 거지.
정령인데 정령이 아닌 것 같은 모호함?
그에 대해 알아내고자 하는 레와티움들의 열의가 넘쳐났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보상받는 건 아니지 않던가.
결과가 영 신통치 않은 건지, 레와티움들의 미간 사이가 극도로 좁아졌다.
그렇다고 남의 정령을 훔쳐 갈 순 없는 노릇이기에.
[……충분히 살펴본 것 같으니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레와티움이 텔로스가 앉아있는 손등을 내밀었다.
말은 그래놓고 시선은 텔로스에게서 줄곧 떨어지지 않았다.
헤어진 애인의 집착 같은 모양새랄까.
이에 진절머리가 나는지 텔로스가 잽싸게 이안의 어깨로 날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찌르르 우짖었다.
‘저것들 싫다.’라는 속뜻에 이안은 텔로스의 머리통을 문질렀다.
곧 헤어질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런. 대화 나누는 사이 날이 많이 어둑해졌군.”
[시간이 벌써…….]
“나는 그만 돌아가 봐야겠네.”
[아. 예기치 않은 만남이었지만, 도련님과의 대화는 퍽 즐거웠습니다.]
“하하. 언젠가 편안하게 앉아서 대화할 때가 오면 좋겠군. 그때는 내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도록 하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안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에루리안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부러 불러낸 바람 탓인지, 레와티움의 불타는 눈빛 때문인지.
가는 내내 등이 뜨끈했다.
달걀도 구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끝의 끝까지 뭐 하나라도 건져보려는 레와티움들의 집요함이 참.
‘저러니 황제를 지킬 수 있는 거겠지.’
이안은 실컷 보라는 것처럼 느릿느릿 이동했다.
그 탓에 등에 붙은 시선이 떨어진 건 한참 후의 일이 되었다.
에루리안에 다 왔을 무렵에야.
-레와티움은 역시 그라나토스의 밀도에 영향을 안 받네.
[그건 수호자 덕이다. 수호자가 레와티움에게 제 기운을 묻혀주지.]
-이 숲에 올 때만 그런다고 했던가.
[물론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다. 움직임이 자유로워야 황자를 보필하니까.]
그라나토스와 황가.
이것들을 놓고 무척 많은 것들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 있었다.
작은 톱니바퀴 하나하나가 어찌나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가만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리고 쫀쫀한 이 흐름에 이안 또한 어느 사이 발 한 짝이 걸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는 어디 쯤에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일까.
상념에 잠겼던 이안은 단호한 얼굴을 하고선 힘주어 말했다.
-녹스, 파라칸시스가 끝나고 바로 수도부터 가야겠다.
[……황제를 만나려는 것이냐?]
-어. 아무래도 담판을 지어야겠어. 감시와 의심 속에 계속 행동의 제약을 받을 순 없으니까.
[하긴 이 상황에서는 최대한 빨리 수습을 하는 게 낫긴 하지.]
황제는 양날의 검 같은 존재이다.
적이 되면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될 테고, 아군이 되면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될 터.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 될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단은 부딪혀 봐야지.
그 자체로 제국의 근간인 황제를 적으로 둘 순 없으니까.
* * *
“……언제 봐도 저 숲은 기괴하군.”
알리노헤르는 텔로미어관의 복도를 걷다가 그라나토스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가까이 가기 꺼려지는 저곳.
무저갱 같은 숲을 보고 있노라면 뇌수가 휘저어지는 것 같았다.
혈관들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듯도 싶었고.
그래도 초입은 그나마 견딜 만하더니만.
그라나토스의 안쪽으로 들어가 기술 하나를 썼을 땐 정말…….
“온몸이 짜부라지는 것 같았지.”
상상도 못 할 압력에 눌려 죽을 뻔했다.
왜 이곳의 비천한 교수들이 그라나토스라면 학을 떼는지 알게 되었달까.
그런 경험은 다신 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간 저 기분 나쁜 숲이나, 이 하찮은 에루리안이나.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쯔읏.”
혀를 찬 알리노헤르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선 다시 걸음을 옮겨 애초의 목적인 누군가의 교수실로 들어갔다.
달칵.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짙은 불의 냄새가 후각을 강렬하게 쑤셨다.
이 향.
이 냄새에서 알 수 있듯 혈통이라 불리는 ‘피’라는 건 그런 거였다.
순수한 불 그 자체였다.
가장 순수한 피를 이어받은 자, 순혈들만의 특질.
하여 그들에게서는 항상 지옥의 업화 같은 불 냄새가 났다.
이 방의 주인도 분명 그러할 진데.
‘자신의 피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멍청한 년이지.’
“네년이 왜 여길?”
알리노헤르를 보자 대번에 인상을 구긴 클로에가 달려들 기세로 노려보았다.
저만 싫나.
마찬가지라서 알리노헤르는 클로에를 닮은 소파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무식하게 들이박는 성미는 오늘도 여전하네, 클로에.”
“친한 척 이름 부르지 마.”
“유치하긴.”
“네년한테만 그래. 네년한테만.”
“그렇게 나한테 관심 많으면 돌아오지, 그래?”
“내가 미쳤니? 굶어 죽어도 본가로는 돌아가지 않아.”
“고집하곤.”
알리노헤르는 클로에를 후려치듯 주홍색 소파를 두들겼다.
직접 타격이 가진 않아도 속은 풀렸다.
제 기분은 나아졌는데, 클로에가 동그란 안경을 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눈치 빠른 것이 제가 소파를 친 이유를 아는 것 같았다.
구겨진 낯짝에 속이 확 뚫린 알리노헤르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뭐 하나만 묻자.”
“나한테? 뭐 하나 지기 싫어하는 네가 질문을?”
“왜, 나는 궁금한 게 있으면 안 돼?”
“그러게 사람 목을 풀처럼 베고 다닐 시간에 상식 좀 배우지 그랬니.”
“사람은 말이야. 저마다의 쓰임이 있어, 클로에.”
“…….”
“가주님은 가주로서, 난 주인이 휘두를 검으로서의 쓰임이 있지. 그러니 도구에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알리노헤르는 자신의 머리통을 톡톡 두드렸다.
머리가 아니라는 의미.
가벼운 손짓 후, 그녀는 사설이 길어 뭐하겠냐며 다시 본론을 끌고 왔다.
“어쨌든 클로에 너만 답해줄 수 있는 거라서.”
“대체 뭔데 서두가 이렇게 길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이안 뷔트시겐 말이야.”
“……이안?”
“응.”
“그 애는 왜. 내 아이들한테 허튼짓만 해봐. 네년을 잘근잘근 씹어먹어 버릴 테니까.”
“아아. 그런 영양가 없는 얘기는 됐고.”
손을 내저은 알리노헤르는 클로에의 뾰족함 따위는 무시해 버렸다.
노상 화내는 사람이 화내는 게 무서울 리가.
뉘 집 개가 짖냐는 심정으로 알리노헤르는 하려던 얘기를 마저 했다.
“이안이 가진 지옥 사냥개, 그게 첫 번째 정령인가?”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괜히 쓸데없는 거 쑤시고 다니지 말고 가만히 짜부라져 있어.”
클로에가 대체 뭔 수작질이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하여간 눈치 빠른 것과는 대화하기 힘들다.
멍청한 년이면 살살 꼬드겨서 정보를 캐내기 쉬운데 말이다.
다시금 소파를 후려친 알리노헤르는 덤덤한 투로 제 할 말 만했다.
“그래서 맞다는 거야, 아니란 거야.”
“맞아도 내 소관, 아니어도 내 소관이니까 꺼져.”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알리노헤르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극구 가르쳐주지 않아도 클로에의 태도를 보니 이미 답은 나왔다.
사냥개가 첫 번째 정령이 아니라는 것.
알려진 바론 이안 그놈에게는 정령이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글쎄.
폰투스의 매혹이 통하지 않는다면, 정신계 면역 기술을 가진 정령이 있지 않을까.
‘혹 그런 정령이 있다면 자랑할 만도 한데…….’
감춘다는 게 영 수상쩍은 점이었다.
남들은 정령 하나만 늘어도 떠벌리지 못해 안달이지 않던가.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필시 감춰야 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 똑똑한 년이 나와 같은 의심을 안 했을 리 없지.’
이안을 본 시간이 얼만데.
필시 클로에는 진즉 어떤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예쁘지도 않은 클로에를 보러 극구 걸음을 하지 않았던가.
저것의 표정을 읽으면 제 의심에 확신을 가질 수 있으니까.
“여러모로 감추고 있는 게 참 많네.”
알리노헤르의 중얼거림에 클로에가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더는 못 봐주겠으니까 꺼지라는 협박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움푹 팬 책상처럼 만들어 버릴 거라는.
하여간 거칠긴.
클로에의 흉흉함에 알리노헤르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들어 올렸다.
“이년아, 애 떨어지겠다.”
“듣는 너도 지겹겠지만 말하는 나도 지겹다. 그래도 또 말할게.”
“…….”
“알리노헤르, 그냥 얌전히 있어.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꼬인 심보를 정화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도 듣기 지겨운 말을 반복할게. 내게 명령하고 싶으면 그럴 위치에서 해.”
알리노헤르와 클로에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찔러 죽일 것 같은 눈빛.
피부가 아려오는 기세에도 알리노헤르는 비죽 입가를 비틀었다.
아무리 클로에가 경고를 보낸들.
어차피 제가 뭔가를 잡은 이상 클로에는 저를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오래전 그날처럼 말이다.
* * *
알리노헤르는 클로에 교수실을 나온 후 호노르관으로 향했다.
‘이번 주부터 자율 수업인가.’
일주일 후면 파라칸시스 시합이 열린다.
그 때문에 오늘부터는 모든 수업이 자율 수업 방식으로 진행된다.
교수들의 관여가 철저히 배제된 채 학생들 스스로 시합에 대비한 모의 전투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라나토스와 가장 환경이 유사한 호노르관에서 말이다.
‘잘 됐군.’
마침맞게 이안을 탐색해 볼 좋은 기회가 생긴 것이다.
훈련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놈이 무언가를 숨기려 한들.
마력을 운용할 때만큼은 근원의 힘이 드러날 수밖에 없겠지.
알리노헤르는 호노르관 한편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키에에엑.
호노르관을 휘도는 바람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나무 정령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뜯어내는 바람의 손.
손아귀에서 쥐어뜯긴 나무 조각들이 낙엽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낙하하면서 그마저도 뭉개져 버려 톱밥이 되어버렸지만.
나무 조각을 가루로 만든 풍압은 이안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뚝불뚝.
풍압의 끝자락에 닿자마자 알리노헤르의 팔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팔뿐 아니라 전신의 마력 회로가 제어되지 않고 날뛰었다.
마치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 화끈거림이란.
알리노헤르는 통증을 잠재우려고 제 팔을 힘주어 꽉 눌렀다.
손톱이 생살을 파고든 그사이.
“이안이 무조건 심장째로 뜯어내랬어. 핵이 손상되지 않게.”
“무조건 한방에.”
기민하게 움직인 C반이 얼음 사슬, 넝쿨 채찍, 물의 갈퀴 등을 시전했다.
저마다의 기술이 곧장 나무 정령의 핵을 손속 없이 파냈다.
“…….”
요란하게 C반의 기운이 섞여들자 마력 회로가 도로 잠잠해졌다.
조금 전의 반응은 애초에 없었던 것인 양.
역시나.
저를 후비던 기현상은 이안에 한정해서였다.
‘틀림없어……. 내 기감을 들끓게 하는 기운이 평범한 에르그일 리가.’
눈살을 찌푸린 알리노헤르는 이안을 빤히 보며 안력을 돋웠다.
놈은 제 심사와는 무관하게 레브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내내 밝던 분위기의 끝.
크게 웃어 보인 이안이 발길을 호노르관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그러더니 이내 은회색 안개에 휩싸여선 자취를 감춰 버렸다.
……무리와 떨어진 것이다.
이에 알리노헤르는 재빨리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저의 존재를 신경 쓰는 것들도 없고, 마침 안개도 자욱하게 끼어있고.
‘바로 지금이…….’
알리노헤르는 안광을 번뜩이며 이안의 뒤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