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뒤를 쫓는 내내였다.
알리노헤르는 껍질을 벗길 기세로 이안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분명 에르그 1성인데…….
‘참 묘하단 말이야.’
이안에게선 이따금 시선을 잡아채는 어떤 파장이 일렁거렸다.
저 파장…….
이는 황가의 핏줄들, 그중 직계에 가까운 순혈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 외에는 절대 가질 수 없는 특질인데.
‘한데 왜 저놈에게서 그것이 느껴질까.’
이것이 아마도 제가 파봐야 할 무언가인 것 같았다.
의심이 든다면 그 속살을 까발려보면 될 일.
팔짱을 낀 알리노헤르는 손을 톡톡 두드렸다.
사실 그것의 실체를 알아내려고 저번에 이안을 자극해 본 적이 있다.
초열의 우두머리를 불러내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 기꺼운 수고도 마다치 않았다.
호랑줄무늬 물고기에 한시적으로 제 기술을 전이해 용암 바위의 공간을 밤으로 바꾼 것이다.
물론 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지만.
이안을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 뿐일까.
그라나토스에서 마력을 쓴 대가로 온몸이 짜부라지는 것 같은 기분 나쁜 경험만 했더랬다.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나자 알리노헤르는 미간을 한껏 구겼다.
줄기차게 들러붙는 참 뭣 같은 불쾌감.
이것을 해소할 방법은 이안이 숨긴 것을 알아내 덜미를 잡는 것뿐이다.
오직 그것뿐인데.
‘……대체 저놈은 뭐 하는 거지?’
알리노헤르는 질기게 이안을 관찰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노르관 깊숙이 들어간 놈은 별이끼 나무 군락지를 배회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 같았다.
나무 사이사이를 꼼꼼하게 살펴보며 같은 행동을 무한 반복하는 걸 보면.
연신 그러다 원하는 걸 찾은 듯 이안이 우뚝 멈춰 섰다.
“……여깄네.”
이안은 별이끼 나무의 옹이구멍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방울 형태로 난 구멍.
그 안에선 산화초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계란프라이처럼 생긴 산화초를 보며 이안은 반가운 듯 중얼거렸다.
“이 모양새를 보니 괜히 반갑…… 근데 몇 송이 안 피어있네.”
한 그루에 고작 다섯 송이 정도?
이안은 개수를 확인한 뒤 곧장 옹이구멍 안으로 손을 뻗었다.
나무에 뿌리를 내린 탓인지 산화초의 뿌리는 전부 드러나 있었다.
뿌리 부분을 살살 긁자 그의 행동이 궁금한지 누군가가 발등을 꾹꾹 눌렀다.
[크륵?]
귀여운 물음에 이안은 움직임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냥개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며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왜, 내가 뭐 하는 건지 궁금해?”
이안은 되물은 뒤 물렁물렁한 나무의 속살을 파며 대꾸했다.
“산화초가 좀 필요해서. 파라칸시스 시합 때 필요하거든.”
[크르륵?]
“아, 어디에 쓸 건지는 나중에 알려줄게.”
즉답한 이안은 마저 나무를 파내 산화초의 뿌리가 지지 기반을 잃게 했다.
꽃이 나무에서 분리된 즉시였다.
사냥개가 코를 양껏 찡긋거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뿌리에서 3일 묵혀둔 걸레 냄새가 났기 때문.
코가 썩을 것 같다는 표정을 한 채 녀석이 앞발로 코를 연신 털어내자, 이안은 폭소를 터트렸다.
“본래 잘 숙성된 꽃에서만 이런 냄새가 나.”
[크륵.]
“못 맡겠다고? 먹을 것도 아닌데 냄새가 중요한가.”
[캬앙!]
“응? 갑자기? 왜 이걸 한 송이 달라는 건데? 냄새도 싫다면서.”
이안은 의문 어린 얼굴을 하고선 사냥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으니, 사냥개가 장난기 어린 은색 동공을 굴리며 먼 산을 쳐다보았다.
더 묻지 말라는 거였다.
녀석이 딴청을 피우니까 도리어 명확해졌다.
아무래도 냄새나는 이 꽃의 주인은 정해진 것 같다.
바로 녹스 말이다.
이 꽃을 받아다 녹스의 침대 맡에 몰래 넣어두려는 거겠지.
이 장난, 적극 찬성이었다.
눈썹을 실룩거린 이안은 한 송이가 아닌 두 송이를 사냥개에게 은밀히 건넸다.
모종의 음모 속에 싹트는 둘의 우정.
이안과 사냥개는 서로의 손끝을 맞대고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세상만사 다 그런 거다.
억울한 일 안 당하려면 오줌보가 터져도 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 거다.
쥐가 나도 한 자리서 꿋꿋이 버터야 하는 거고.
녹스를 뺀 훈훈한 분위기 속, 산화초가 목함에 유유히 담겼다.
유쾌한 손길이 몇 번 이어지다 마지막 산화초가 정돈되던 찰나였다.
이안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
호노르관이 기묘하게 적막했기 때문이다.
제 심장 박동 외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뭔가 싸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보건대 이런 예감이 들 때면 좋지 못한 일이 생겼다.
이안의 예감에 확신을 주듯.
[크르르륵!]
사냥개가 어딘가를 보며 경계심이 묻은 목울음을 냈다.
이에 이안은 눈가를 가느스름하게 좁히고선 전방을 주시했다.
그의 망막에 어렴풋하게 맺히는 무언가.
그것은 옅게 일렁이는 불길 두 개였다.
“……뭐지?”
조금 더 안력을 돋우니 은회색 안개 속에 묻혔던 불길이 선연히 드러났다.
정확히는 불길을 만들어 내는, 바닥에 꽂힌 단검 두 개가 보였다.
아니지. 저걸 단순히 검이라고 해야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형태가 좀 특이한 불 정령이었다.
단검의 손잡이가 얼굴, 검날이 몸통인 불 정령.
“……살리카.”
머리가 인지하자마자 이안은 즉각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의 경계심에 기름을 부으려는 양.
화르르르르!
검날을 흔든 정령들이 땅에 박힌 그대로 거센 불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검과 검 사이의 공간 속에서 사각형이 생성되었다.
선홍색 상자는 생겨난 즉시 삽시간에 그 크기를 키워갔다.
점점…… 점점…….
천장까지 몸집을 키운 그것은 그림자를 길게 늘여 단숨에 이안을 집어 삼켜버렸다.
* * *
“공간…… 복사.”
불길이 사라지고 난 후의 풍경은 여전히 호노르관이었다.
이안이 서 있던 장소 그대로 바뀐 것은 없었다.
제 발치에서 뭉개진 나뭇잎조차 그대로였다.
“잘 아는구나.”
일순, 냉랭한 목소리가 이안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알리노헤르.”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리는데 알리노헤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간 복사 때문.
가짜이되 진짜이기도 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공간 복사.
이 기술을 시전하면 시전자는 이 공간의 어느 지점에 스며들게 된다.
이로 인해 육안으로는 시전자를 찾아낼 수 없다.
“산책을 멀리도 나오셨습니다.”
“아,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 건데 죽이려는 건 아니야.”
“죽일 생각이 아니라는 것 치곤 벌인 짓이.”
“왜, 너무 거창한가?”
“예. 과한 관심에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아, 부담 갖지 마. 뷔트시겐의 적자를 죽이면 나만 골치 아파지는데 내가 뭣 때문에 그딴 짓을.”
“말과 행동이 달라서 영 믿음이.”
“아, 이거? 이 공간은 너한테서 뭘 좀 수월하게 알아내려고.”
“하.”
“예고 없이 초대한 게 미안하니까 내가 좀 친절해져 보자면.”
“…….”
“이안 뷔트시겐 네가 많이 궁금해서랄까?”
“단순히 궁금증 하나 때문에 남의 목숨줄을 옥죄시겠다, 라.”
“빙고.”
알리노헤르는 눈알을 번들거리며 이안을 직시했다.
이런 상황에도 이안의 낯짝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괜히 심보 꼬이게.
“금방 끝날 거야. 약간의 고통은 있겠지만.”
“참, 사서 고생을 하십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이런다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만들어야지.”
속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그 사람을 극한으로 모는 것이다.
사람이 한계까지 몰리다 보면 잠재된 뭔가가 발현되거나, 부러 숨겼던 것을 저도 모르게 내보이기 마련이니까.
“이안 네놈도 예외가 될 순 없을 터.”
휘익. 휘이익.
알리노헤르가 친절한 설명은 여기까지라는 듯 묵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다소 음산한 허밍.
그 음이 도화선이었을까.
허공의 한 귀퉁이가 찢기며 기백의 유성우들이 쏟아졌다.
슈우우욱. 슈욱.
유성우들은 불의 꼬리를 달고서 떨어지는 대로 곧장 이안에게로 돌진했다.
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즉각 이안은 평평한 막을 만들어 유성우들을 튕겨냈다.
퉁. 투우옹.
둔탁한 음을 내며 튕긴 유성우들은 공격이 막히자, 약속이라도 된 듯 저들끼리 뭉쳐졌다.
처음이 모래알 크기였다면 지금은 자갈 크기 정도?
몸집을 한껏 부풀린 후.
유성우들은 그 크기와 정반대인 초속으로 다시금 쇄도했다.
바람마저 집어삼키는 위력에 방어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크읏. 역시 카르디아라는 건가.’
직접 부딪힌 것도 아닌데 파동만으로 전신이 욱신거려왔다.
이안은 등급의 격차를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카르디아와 에르그.
에르그가 언덕이라면 카르디아는 하늘과 맞닿은 태산에 비유되지 않던가.
그러니 힘에 부칠 수밖에.
그렇다고 포기할쏘냐.
이안은 어떻게든 반격할 틈을 찾으려고 쉼 없이 눈알을 굴렸다.
누군 사활을 걸고 있는데 그게 또 재밌나 보다.
방어하기 급급한 그를 두고 알리노헤르가 살살 비아냥거렸다.
“하는 꼴을 보니 아직은 상대할 만한가 봐?”
“보시는 바와 같이.”
“그렇다면 뭐. 좀 더 즐기게 해드려야지.”
부러 속을 긁어 흥분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흥분하게 되면 앞뒤 안 가리게 될 테고 뭔가를 쉬이 내보이게 될 테니까.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는 양, 알리노헤르가 ‘그럼 이건 받아칠 수 있으려나.’라고 잘게 읊조렸다.
그게 신호가 된 건지.
쏴아아아.
곧장 대기의 중력이 무거워졌다.
찍어누르는 압력에 이안의 몸뚱이가 필연적으로 수그러졌다.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자마자였다.
쩌억, 이안의 발치가 갈라지며 그곳에서 유성우들이 튀어나왔다.
다급히 바람을 밀어 허리를 비틀자 이번엔 왼쪽의 공간이 찢겼다.
‘후우. 굉장히 성가신 기술이군.’
공간 복사의 특성상 공간 자체를 이용할 수가 있어 공격이 너무 다변적이었다.
고로 예측이 쉽지 않았다.
거기다 카르디아의 2성의 완벽한 제어가 더해졌으니 어쨌겠는가.
바람을 펴 방패막이 삼고, 풍압으로 밀어내도 역부족이었다.
“젠장.”
“계속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건가. 감춘 것을 드러내면 끝난다니까.”
비틀거리는 이안의 모습에 알리노헤르의 웃음이 공간을 타고 메아리쳤다.
요란한 파동이 울리자 감응한 공간 자체가 통째로 진동을 했다.
그 때문인지 유성우들이 여러 가닥의 빛줄기로 갈라졌다.
번득거리는 빛줄기는 곧장 이안을 잡아채려 흉흉하게 달려들었다.
쉬지 않고 연속으로 이어지는 공격들.
전신 여기저기를 돌돌 감아 당기는 억센 압력.
그것들이 파고드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살덩이가 뭉그러지고 터지고 짓물러 갔다.
금세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크으읏.”
첨예한 고통에 이를 악다문 이안은 얼른 빛줄기를 떼어냈다.
그 자리서 뜯긴 살덩이를 비집고 피가 왈칵 쏟아졌다.
[크륵!]
그의 부상과 피 냄새에 격분한 모양이다.
사냥개가 이안에게 달려드는 빛줄기를 무차별적으로 물어뜯었다.
녀석이 토막 내면, 분열된 빛줄기들이 회전하며 사냥개를 두들기고.
또 물어뜯으면, 네 배로 증식한 빛줄기들이 불길을 날름거리고.
공방전은 한동안 치열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종내엔.
[케엥!]
직선으로 곧게 뻗은 빛줄기에 후려 맞은 사냥개가 데굴데굴 굴렀다.
“코르키!”
이안은 잽싸게 사냥개를 잡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코르키는 은색 털들이 죄 그을린 채로 혀를 길게 빼물고선 헐떡였다.
기력이 없는지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이대로는 반격해봐야 되레 곱절로 돌려받을 뿐이다.
‘……알리노헤르를 찾아야 해.’
불리한 상황을 뒤집으려면 공간 복사를 깨부숴야 한다.
그러려면 방법은 두 가지.
시전자를 약하게 만들거나, 외부에서 파훼하면 된다.
어차피 후자는 불가능하고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