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22화 (122/214)

제122화

‘아까 알리노헤르가 마력을 사용했던 곳이…….’

방향을 정한 이안은 절뚝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공간이 찌그러졌던 곳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찌그러짐은 마력을 운용하면 생기는 현상이라 그곳에 알리노헤르가 있을 테니까.

츠증. 츠즈증.

이안은 미리 봐둔 곳으로 마력을 가차 없이 날려 보냈다.

왼쪽 8시 방향, 정중앙 6시 방향, 오른쪽 2시 방향, 오른쪽 4시 방향.

알리노헤르가 있을 만한 곳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총력을 기울였지만.

“……실팬가?”

별이끼 나무가 늘어진 공간이 마력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본디 시전자가 있으면 마력을 튕겨내는데 말이다.

벌써 네 곳.

아무리 시전자라도 이렇게 공간을 무한정 옮겨 다니지는 못하는데…….

너구리처럼 파놓은 굴이 많다면 일일이 찾아다닐 순 없었다.

‘저쪽의 특기가 숨바꼭질이라면.’

그 역시 오쿨루스의 결을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만일을 대비해 신중히 쓰려 했는데…… 마냥 시기를 재고 있을 순 없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이안이 단호히 왼쪽 눈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고집이 세네.”

“……!!”

“감춘 것을 기어이 꺼내지 않는 걸 보니까.”

불쑥, 알리노헤르가 이안의 뒤에서 나타나 낮게 뇌까렸다.

기척도 없는 소리에 덧대어 그녀의 고개가 삐뚜름하게 꺾였다.

음습하기 그지없는 삐딱한 선.

그것을 따라 불의 밧줄이 이안의 목을 억세게 휘감았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손봐줄 수밖에.”

“커흑.”

목을 쥐어짜는 격통에 이안은 새된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미처 다 굴러 나오지 못하고 도리어 목구멍을 가시처럼 찔러댔다.

……빌어먹을.

누군가가 모가지를 통째로 뜯어내는 듯했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 참담한 고통보다 저를 더 긁어대는 건 분기였다.

무력함에서 오는 분기.

아무리 등급 차이가 나도 그렇지, 제 신세가 꼭 끈끈이에 붙은 파리 같았다.

이안은 피와 그을음을 뒤집어쓴 얼굴로 알리노헤르를 노려보았다.

재밌어 죽겠다는 저 얼굴.

저 면상 한번 구겨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맥없이 당할 순 없잖은가.

촤아아아악.

이안은 있는 힘껏 바람을 끌어모아 날카롭게 내리그었다.

악에 받친 만큼이었다.

바람 채찍이 거침없이 날아가 웃는 볼에 깊숙이 꽂혔다.

그 덕에 알리노헤르의 볼이 볼썽사납게 패며 살이 움푹 덜어졌다.

“……잇!”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아선지 알리노헤르의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그의 반격은 그녀의 통제 범위를 한참 벗어난 행동이었으니까.

이는 알리노헤르가 정말로 질색하는 것이었다.

용납하지 못하는 짓이었고.

알리노헤르는 여태까지의 유들거림을 버리고 손을 꽉 우그러트렸다.

콰드득.

사나운 손짓을 따라 밧줄이 이안의 목을 으스러트릴 듯 조여왔다.

“커흑.”

“이런, 가엾어서 어쩌나.”

“지랄도…… 다양하게…… 쿨럭.”

“이대로 가다간 나도 장담을 못 하겠다.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알리노헤르의 입꼬리가 올라갈수록 이안의 발이 지면과 멀어져갔다.

더 위로.

밧줄의 끌어당김에 더 위로.

몸이 들리는 것과는 반대급부였다.

숨통이 졸린 이안의 의식은 차츰 아래로 떨어져 갔다.

“끄으으윽.”

이대로 정신을 놓을 수는 없었다.

혓바닥까지 짓씹으며 안간힘을 썼지만, 점차 한계에 도달했다.

기어이 이안의 고개가 픽 꺾이려던 그때.

“같잖은 생물이 감히 내 목숨줄을 가지고 놀려 하다니.”

한기 어린 분노가 눅눅한 공간을 뒤틀며 쨍하게 파고들었다.

섬뜩했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 바늘이 깊숙이 꽂히는 것 같은 느낌.

아니.

거인의 발밑에 짓눌린 하찮은 생명체가 된 것 같은 기분.

까마득한 격의 차이에, 저란 존재 자체가 모조리 지워져 버린 것 같았다.

대기를 뒤틀며 굴종시키는 압도적인 위압감.

이에 공간이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단지, 남자의 말 한마디가 전부였을 뿐인데.

쩌적. 쩌저적.

흠 하나 없던 공간에 파열음이 난자하며 공간이 단박에 깨져버렸다.

빙하가 부서지는 듯한 묵직한 진동.

이로 인해 밧줄이 심하게 떨려오자 이안은 딱 붙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얇실하고 흐릿한 시야 사이로 은발의 남자가 보였다.

깊고 아득한 기운을 오연하게 휘감고 있는 남자가.

보는 것만으로도 압살당할 것 같은데, 정작 남자는 특유의 느른함만을 풍기고 있었다.

그 무엇도 저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듯이.

오연한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대지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오만방자한 것도 적당해야 봐줄 수 있지.”

서늘한 남자의 눈빛이 닿은 곳.

위압감을 견디지 못한 알리노헤르는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커흑.”

발발 떨리는 몸이 도저히 가누어지지 않았다.

사지가 따로 놀뿐 아니라 입가에서는 게거품이 보글보글 새어 나왔다.

바닥을 득득 긁던 손에서는 손톱이 빠져 덜렁거렸다.

극한의 고통에도 알리노헤르는 치떠진 동공을 남자에게서 떼지 못했다.

“수, 수호자…….”

경악하는 알리노헤르와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남자, 아니 녹스.

둘의 모습은 낙인이 찍히듯 이안의 동공에 박혀 들었다.

이렇게 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뭐라도 해야 하는데…….

한계까지 몰린 정신이 이안을 자꾸만 심연의 밑바닥으로 끌어당겼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봐도 더 이상은…….

이안은 흐릿한 잔상을 찬 바닥으로 흘리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 * *

“……안 돼!”

이안은 제 몸이 들리는 것 같은 부유감에 눈을 번쩍 떴다.

얼룩덜룩한 시야를 뚫고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도련님!”

호위대 중 하나가 저를 들쳐 엎으려 어정쩡하게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었다.

호위대는 그가 깬 것을 보곤 도로 손을 어색하게 거둬들였다.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도련님께서 정신을 잃은 지 5분이나 지나서…….”

“……5분?”

“예. 아직 치유사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제가 치료실로 도련님을 막 옮기려던 참에…….”

상황 파악을 위해 이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별이끼 나무 군락지였고, 저는 호위대의 제복을 돌돌 감고 누워 있었다.

“알리노헤르는 어디…….”

“그자는 지금 대장이 쫓고 있습니다. 어찌나 잽싸게 그라나토스로 도망을…….”

도망이란 말에 이안은 튕기듯이 일어났다.

지금 한가하게 치료나 받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알리노헤르가 녹스를 본 채로 도망갔다지 않던가.

이안은 앞뒤 재지도 않고 부리나케 그라나토스로 내달렸다.

만류할 새도 없는 달음박질.

이를 저지하지 못한 호위대의 외침이 다급하게 이안의 뒤를 붙따랐다.

“이안 도련님!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또…….”

염려하는 마음을 어찌 모르랴.

하지만 이안은 호위대에게 뭔가를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알리노헤르가 에루리안을 벗어나기 전에 붙잡아야만 했으니까.

이대로 살리카 가주에게 가버리면 지금껏 쌓은 것이 허사가 되어버린다.

더는 시간을 돌릴 수도 없는데…….

‘알리노헤르를 처리해야 해!’

그 여자가 알게 된 것들이 살리카 가주에게 닿기 전에.

그 전에 처리가 되어야만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해서 어찌할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왔다.

휘청휘청.

조급함과 부상으로 인해 이안의 몸이 꼬꾸라질 듯 흔들거렸다.

이 위태함을 한몫 거드는 건 눈 폭풍이었다.

유례없이 거센 돌풍까지 동반한 눈발이 이안을 연신 밀어댔다.

돕겠다는 건지, 방해하겠다는 건지.

넝마가 된 셔츠 차림에 한기가 스미며 그의 몸이 서서히 굳어갔다.

“허어억.”

이안은 폐부가 시려 오는 거친 숨을 연거푸 몰아쉬었다.

몸이 갈가리 찢겨 조각나 버릴 것 같았다.

내장 어디라도 상한 건지 입안에서 울컥 검붉은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머릿속이 점점 멍멍해져 가는 가운데.

[주인을 괴롭히던 못된 인간이 남쪽으로 도망간다.]

[저대로 둬선 안 돼. 그라나토스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해.]

[맞아. 주인이 위험해지는 건 막아야 해.]

[그쪽으로 유인하랬어, 그쪽. 커다란 미밀나무가 있는 곳으로 말이야.]

[그런데 자꾸 포위망에 구멍이 생겨.]

[주인의 힘이 불완전해서 그래. 우리가 그라나토스를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해.]

정령들의 외침이 이안의 정신을 붙들어 맸다.

숲이 미로가 되어 알리노헤르의 걸음을 더디게 하고 있었다.

저들이 있어 그나마 시간을 번 셈이다.

‘이 틈에 따라잡아야 해.’

이안은 상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턱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았다.

그러고는 곧장 알리노헤르가 헤매고 있는 방향으로 발길을 틀었다.

걸음마다 눈 바닥 위에 깊숙이 찍히는 시뻘건 발자국.

핏물이 절반인 그것을 보며 호위대가 얼굴을 종이짝처럼 구겼다.

자신들이 의무를 다하지 못했단 증거였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없어 호위대는 밀도에 짓눌리면서도 이안을 악착같이 쫓아갔다.

‘도련님을 절대 놓치면 안 돼.’

호위대가 쫓아오든, 칼바람에 심각한 동상을 입든.

“허어억.”

이안은 오로지 추적에만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알리노헤르를 만났을 때 어찌할지를 고심했다.

직접 죽이는 건 안 된다.

살리카 가주의 의심을 곧바로 사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이목을 끌지 않고 확실히 처리할 방법이 필요한데…….

‘역시 동쪽으로 유인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어.’

동쪽 숲은 오쿨루스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미몽의 길이 있다.

예전에 제가 걸었던 것처럼 알리노헤르가 그 길을 걸으면 필시 어떤 결론이 날 터.

장담컨대 알리노헤르의 꿈은 오쿨루스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즉, 거기로만 데려가면 그 여자를 백치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이다.

죽은 자만 말이 없겠는가.

산 자도 그리되면 아무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이안이 생각의 결을 정리하며 결심을 굳히는 사이.

[또 넘어지려고 한다. 불안하게 자꾸 휘청거려.]

[주인이 곧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어떡해.]

[주인의 얼굴이 눈송이보다 더 하얘.]

[시뻘건 잉크를 뒤집어썼다. 피 칠갑이 됐어.]

정령들이 걱정 어린 투로 이안 주변을 맴돌며 속살거렸다.

기절할까 봐 정신 차리라고 말을 걸어주는 거였다.

사실, 그럴 만했다.

앞섬이 피로 다 젖어 쥐어짜면 웅덩이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즉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는 몰골.

그 꼴을 하고도 이안은 절뚝절뚝 줄기차게 이동했다.

알리노헤르가 있는 남쪽 호수 쪽으로.

피 묻은 발자국을 남기면서 쉼 없이 움직이길 얼마쯤 했을까.

“……피 냄새?”

이안은 앞쪽에서 풍겨오는 혈향에 걸음을 멈췄다.

제 몸에서 나는 거라고 착각할 수가 없었다.

비릿한 쇠 냄새에 덧대 거대한 불새 하나가 날개를 접고 있었으니까.

낯익은…… 누군가의 기술.

그 누군가를 떠올린 이안은 서둘던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렇게 발길을 채근해 불새의 잔상이 흩어지는 곳에 도착해 보니.

“……클로에 교수님?”

클로에가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차게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전 가야 내보이지 않던 냉혹함을 매단 채로.

그런 클로에의 발치.

붉디붉은 눈밭 위에는 숯덩이가 된 알리노헤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