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이안이 기숙사로 돌아간 직후였다.
호위대는 얌전한 척 굴던 탈을 벗어 던지고 방정맞게 호들갑을 떨어댔다.
“대장, 사람이 저렇게 멋져도 되는 겁니까?”
“저는 수호자가 강림하는 줄 알았습니다.”
“네가 가는 그 길에 시끌시끌한 꽃길을 깔아줄게, 라니. 크으으으.”
“하는 말마다 어쩜 저리 후광이 비치는지.”
자신들이 한 말인 양 호위대는 콧대를 거하게 세웠다.
그들에게서 쉽사리 읽히는 기쁨과 뿌듯함.
마구 흘러넘치는 감정들을 점잖게 보던 알란도 결국 꿈틀대는 입을 막지 못했다.
호위대장으로서 체통을 유지해야 마땅하지만…….
이안의 말은 제방을 무너트리는 탄알처럼 그를 들쑤시고 말았다.
“유난들은. 도련님의 저런 모습이 한두 번도 아니고.”
“이번은 예외입니다, 대장.”
“맞습니다. 이 꽃길이 다른 꽃길과 같습니까.”
“일종의 훈장이지요. 도련님의 다시 오지 않을 아카데미 시절을 함께 했다는.”
“이건 가주님께서도 못 누린 특권 아닙니까. 우리는 진짜 복 받은 놈들입니다.”
“전 앞으로도 도련님 곁에 찰싹 붙어 있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
요란을 떨던 호위대가 눈을 반짝하고 빛냈다.
그러고는 다 같이 짠 것처럼 이안이 머무는 기숙사 쪽을 물끄러미 직시했다.
눈빛들이 달밤을 태울 정도로 열렬했다.
‘하여튼 그저 도련님이라면.’
그런 호위대를 보며 알란은 ‘충심’이라는 것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기실 충심이라는 건 무엇도 따지지 않아야 하는 거다.
설령 모시는 자가 천하에 다시 없을 악인일지라도 말이다.
그저 주군이 쓰기 편한 손발이 되어 묵묵히 따르기만 하면 될 뿐.
그렇기에 이왕 쓰이는 거, 자신의 주군이 가치가 있는 자라면 더 좋지 않겠는가.
주군의 영광이 곧 그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안이야 말로 좋은 주군이었다.
절로 충심을 불러일으키는.
그가 걷는 걸음을 따라가고 싶게 만드는 이.
알란 역시 호위대가 보는 곳을 함께 보며 상념에 젖어 들었다.
에루리안에서 가장 늦게 불이 꺼지고 가장 빨리 불이 켜지는 곳.
이안의 방은 하루가 일주일이라도 된 듯 분주하게 흘러갔다.
보고 있자면 개미도 저보단 부지런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랄까.
그만큼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쓰는 이안의 모습.
시간이 정해진 시한부처럼 구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돌이켜보면 영광으로 남을 이 시간을 제 눈에 새기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군.’
곧 학기 말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안이 뷔트시겐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닌 말로 알란은 조금…… 아니, 그보다는 더 많이 섭섭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 이안 곁을 지금처럼 지킬 수 없을 테니까.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도련님의 뒤를 지척에서 붙따르고 싶었는데…….’
바람은 이뤄지지 못할 것 같다.
돌아가면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부턴 그저 먼 곳에서 따라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 * *
[제자라고 하나 있는 게 틈만 나면 중환자용 침상에 드러눕다니.]
녹스는 돼지코를 벌름대며 치료실을 둘러보았다.
내부에서 진동하는 톡 쏘는 박하 향이 유독 청량했다.
침상 사이의 간격은 또 무진장 넓어서 동선이 꼬일 일이 없는 구조였고.
게다가 침상에는 재생을 돕는 반구의 막이 감싸져 있어 치유하기에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물론 이 침상은 중환자를 위한 거였다.
한 마디로 숨이 꼴딱 넘어가서 눈앞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른거릴 때나 쓰는 건데…….
뾰족한 눈초리를 한 녹스는 침대맡의 반구를 콕콕 찔러보았다.
[아주 단골 나셨네.]
“단골은 아무나 되나. 이것도 나쁜 놈들한테 인기가 많아야 가능하지.”
[염병. 그 인기 두 번만 더 있었다간 아주.]
“스승님이 입술 부르트도록 부르짖는 휴식, 그거 할 수 있어서 좋지요.”
[어휴, 좋단다.]
“하하하. 드러누워 있는 얘기는 그만하고. 그나저나 스승님.”
[응?]
녹스가 침대맡에 기대앉자, 이안은 녹스의 배를 꾸욱 눌렀다.
하루 만에 퉁실퉁실함이 사라졌다.
몸에 든 바람을 제대로 빨린 것처럼 뱃살이 홀쭉해져 있었다.
퍼진 양배추에서 매끈한 애호박이 됐달까.
“외양이 많이 역변하셨습니다.”
[역변? 그건 지금 날 까는…….]
“아, 그 뜻이 아니고. 우리 스승님을 다시 봤다는 의미지요.”
[뭘 다시 봐.]
“어제의 잘생김?”
[…….]
“솔직히 아-주 놀랐습니다. 잘생김이 뚝뚝 떨어져서.”
[날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걸 가지고 새삼스러워하긴.]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으련다.
돼지코와 그 모습은 지독하게 달랐으니까.
실상 그동안은 줄기차게 신상만 봐서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녹스의 생김이 어땠는지.
그냥 인간형도 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더랬다.
‘환골탈태도 그런 환골탈태가 없었지.’
이안은 녹스를 빤히 보다가 슬쩍 돼지코를 들춰보았다.
말캉하니 잘 들렸다. 이 모습이 진짜라는 듯이.
“녹스, 혹시 요즘 본 모습으로 자주 돌아가?”
[자주? 전혀.]
“그럼 어제는?”
[처음은 금제가 깨져서고, 어제는 네놈이 위험에 처해서…….]
녹스가 제 상태에 대해 막 설명을 늘어놓으려던 때였다.
끼이익.
치료실의 문이 열리며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치료실을 독방처럼 사용하는 제자 때문에 내가 애가 닳는다, 닳아.”
“……클로에 교수님?”
클로에의 등장에 투명화를 시전한 녹스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선 건조한 눈길로 클로에를 응시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새로 들인 이방인의 상태를 확인하는 느낌?
믿을만한지, 아닌지.
혹은 그 속내가 여전히 유효한지 가늠해보려는 듯한 탐색의 눈길이었다.
녹스의 동선을 면밀하게 따라가던 이안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다소 굼뜬 움직임.
그것을 보더니 클로에가 만류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는 냉큼 누우라는 의사 표현을 한 뒤 침상 옆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몸은 괜찮은 거니?”
“괜찮습니다. 워낙 건강체인데 가만있으려니 그저 좀이 쑤실 뿐.”
“어제까지 시체 몰골이던 녀석이 넉살은.”
“하하. 제가 시체까진.”
이안의 웃음에 클로에가 창백한 그의 손등을 약하게 두드렸다.
아직은 좀 더 보중해야 한다, 라는 염려가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클로에의 마음이 읽혀 이안은 눈꼬리를 접으며 말했다.
“염려 놓으십시오, 교수님.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습니다.”
“맨날 괜찮다고만 하지.”
그럴 줄 알았다며 클로에는 동그란 안경을 추켜올렸다.
곧 죽어도 아프다고 말할 녀석이 아니었다.
그 성정을 알기에 그녀는 말을 보태지 않고 코트 주머니에서 레몬색 병을 꺼냈다.
“실은 이걸 주려고 왔단다.”
“이건…….”
“내상 치료제지.”
병을 건네받은 이안은 표면에 음각된 구름 모양을 살살 문질렀다.
조제사를 확실히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파나케이아의 물약이네요.”
“재생 속도를 높이는 데는 이만한 게 없지.”
“그 떠돌이 약제사들은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후훗. 널 위해 내가 고생 좀 했단다. 원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자들이라.”
파나케이아.
붉은 모자 정령과 연금술을 다루는 이종족으로만 구성된 약제사 무리를 말한다.
신의라고 불리는 자들.
그들이 만든 약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효과가 좋다.
그러니 자연스레 인기가 높아질 수밖에.
하지만 치솟는 인기에 반해 파나케이아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방랑자의 습성 탓인지 한 자리서 세 시간 이상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 그 일이 있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약을 구하려고 클로에 교수님이 얼마나 수고를 들였을까.
이안은 병을 꽉 쥐고는 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큼. 오늘부터 교수님은 풀떼기만 드시게 생겼습니다.”
“응?”
“박봉에 이 비싼 걸 지르셨으니.”
“후훗. 제자를 위해 몇 달쯤 풀떼기 먹는 거야 뭐.”
“교수님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배불리 먹어야겠습니다.”
“이런 것으로 배 채울 생각하지 말고 어서 낫기나 하렴. 그 허여멀건한 몰골은 못 봐주겠으니까.”
클로에의 타박 아닌 타박에 이안은 크게 웃어젖혔다.
그냥 마음이 편해서 웃음이 헤퍼졌다.
까놓고 말해 누군가를 대면하며 이 정도로 느슨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온전히 상대를 믿는 때에만 자연스레 나오는 거였으니까.
생선을 양껏 먹은 고양이 같은 모습.
낙낙한 이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클로에가 지그시 보았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이를 보는 듯한 시선.
한참을 말없이 보더니 클로에는 되었다는 듯 느릿하게 일어섰다.
“나는 전해줄 것도 전해줬고, 이젠 그만 가봐야겠구나.”
“아, 더 있다 가시지.”
“맘에 없는 소리는. 스승이 옆에 딱 붙어 있으면 어디 편히 쉴 수나 있겠니.”
“클로에 교수님은 예외지요.”
“빈말인 걸 아는데도 기분이 좋으니 원. 나도 팔불출이긴 팔불출인가 보다.”
클로에는 미소를 지어 보이곤 몸을 문 쪽으로 틀었다.
두세 걸음?
뗀 것 같지 않은 걸음 뒤에 그녀가 돌연 발길을 멈추고 창가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녹스가 있는 곳이었다.
“이안.”
“예, 교수님.”
클로에는 이안을 불러놓고도 선뜻 입을 떼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공간의 틈.
빽빽한 밀도가 켜켜이 쌓일 때쯤 그녀는 도로 입을 열었다.
“본래는 그냥 가려 했다만…… 지금이 아니면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클로에는 그녀 쪽을 직시하는 녹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누가 보면 녹스가 보이나 할 정도로 정확한 시선 처리였다.
“네 성정상 먼저 얘기를 꺼낼 것 같지도 않고.”
이안이 묵묵히 쳐다보자, 클로에는 다시금 잠깐의 틈을 두었다.
지금까지의 대화의 흐름으로 보아 그랬다.
이안은 어제 일을 흘러가는 대로 넘기려는 것 같았다.
제가 알리노헤르를 왜 죽였는지.
녹스를 보고도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지.
그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이안의 의중은 명확하게 읽혔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고 싶었지만…….
수호자를 본 마당에 최소한 그에 관한 것만이라도 거론하고 싶었다.
그 존재가 가지는 무게가 천근만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여 클로에는 제 심중에 있는 것을 직설적으로 끄집어내 보였다.
“사실 나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네가 가진 그 무게를.”
“…….”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네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네게 주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클로에는 제 마음을 전하듯 이안을 부드러이 보았다.
“분명 그렇긴 하다만, 때로는 그 무게가 해일처럼 너를 짓누르기도 할 테지.”
“…….”
“만약…… 그때가 오면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려 들지 않았으면 한다.”
“클로에 교수님…….”
“스승이라는 게 괜히 있겠니.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렴.”
이안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본심은 이거였다.
언제든 녀석의 편이 돼 줄 거라는 거.
“그게 누구든 고자질해도 되는 겁니까?”
“아무렴. 그게 설령 황제라도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줄 테니 언제든지.”
과격한 발언 뒤에 클로에는 개구진 소녀처럼 웃어 보였다.
콧잔등에 인 주름마저 익살스러웠다.
무거운 상황을 가볍게 털어버리는 그녀로 인해 이안도 한결 편해졌다.
딱딱했던 제 안면이 풀렸기 때문일까.
정말로 됐다는 표정을 지은 클로에가 녹스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뒀다.
“환자를 붙잡고 내가 너무 오래 있었구나. 그만 쉬렴.”
마지막 말을 덧붙인 그녀는 손을 살살 흔들고선 등을 돌렸다.
언제나 저 등은 든든하다.
전쟁터에서 살리카와 뷔트시겐으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다는 듯 클로에는 그를 지켜주었더랬다.
녹스의 존재를 알게 됐음에도 함구하는 것처럼.
언제든 제게 도움을 주겠다고 단언하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유영하던 이안은 나지막하게 클로에를 불렀다.
“교수님.”
“……응?”
돌아서 그를 직시하는 클로에의 눈동자가 무척 붉었다.
붉음은 역겨운 살리카의 색이지만 그녀만은 예외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이안이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만류하려고 클로에 교수가 다가왔다.
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어이 두 발로 꼿꼿하게 선 이안은 클로에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클로에의 붉은 뒤태가 멀어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