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25화 (125/214)

제125화

사각사각.

클로에는 교수실로 돌아온 뒤 곧바로 서신을 적어 내려갔다.

무섭도록 진지한 얼굴이었다.

만약 얼굴이 무기가 된다면 당장에 누구 하나 죽었을 기세였다.

그 기세가 하도 험악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일까.

“클로에, 이 서신 본가에 보내려고?”

얼굴 좀 펴라는 듯 누군가가 클로에의 볼을 매만졌다.

나뭇잎 닮은 손.

손의 주인은 클로에의 정령인 메이즈였다.

메이즈는 책상에 걸터앉아 클로에를 근심 어린 눈망울로 올려다보았다.

“응. 할 말이 있어서.”

“살리카 가주가 보고 놀라겠다.”

“글쎄. 웬만해선 놀라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

“그래도 알리노헤르가 죽은 것에는 좀 놀라지 않을까? 특히나 그 죽음에 클로에 네가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

“과연 그럴까.”

반문한 클로에는 안경을 추켜 올리며 비죽였다.

살리카 가주가 놀라는 일이 세상천지에 과연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누가 뒤통수를 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치는 인사니까.

“가주를 놀라게 하는 놈이 있다면 그건 진짜 난 놈일걸.”

클로에가 코웃음을 치자, 메이즈는 ‘하긴’이라고 말하고선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리카 가주의 성격을 알면서 괜한 말을 꺼냈다.

누가 옆에서 나체로 춤을 춰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인간인데.

메이즈는 그 인간에 대해선 더 생각하기 싫어 클로에의 팔을 살살 흔들었다.

영양가 없는 얘기는 그만하자는 의미였다.

“근데 말이야, 클로에.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어제 C반 기숙사로 향하다 갑자기 그라나토스에는 왜 갔어?”

“순간 알리노헤르의 마력이 폭주할 것처럼 요동쳐서.”

처음엔 그것이 뭔 사달을 냈구나 싶었다.

이안에 관해 꼬치꼬치 캐물었던 전적이 있지 않던가.

영 꺼림칙해서 앞뒤 잴 것도 없었다.

무작정 알리노헤르의 마력만을 쫓아 도착한 그라나토스.

그렇게…… 마주했다.

게거품 물며 바들바들 떠는 알리노헤르와 간덩이 부은 그년을 두렵게 만든 무엇.

은발의 남자를 말이다.

수도의 중앙 광장에 세워진 신상과 똑같아 모를 수 없었다.

은색 달빛을 녹여 만들었다는 머리카락과 현묘한 오색 눈동자.

정점에 선 자만이 풍기는 지고한 분위기.

수호자는 제 결속자를 해치려 한 알리노헤르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끄으으윽.”

노여움에 치받치듯 알리노헤르의 숨통이 매가리 없이 꺾여갔다.

저대로 놔두면 질긴 악연이 끝날 것을 알았다.

아는데도, 클로에는 그사이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알리노헤르와의 악연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반드시 저여야만 했으니까.

<수호자님, 그 끝은 제가 낼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수호자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그 삐딱함은 한낱 인간의 심층을 가늠해보려는 신의 몸짓이었다.

혈관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 어린 무심함 뒤.

수호자는 쓰레기 치우듯 알리노헤르를 클로에 쪽으로 집어 던졌다.

<허튼짓은 않겠지. 그랬다간 어찌 될지 아는 머리 정도는 있을 터이니.>

수호자가 알리노헤르의 처분을 제게 맡긴 이유를 어찌 모르랴.

오롯이 이안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야.

저를 전면에 내세워 살리카 가주의 의심을 피하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긴 상념의 끝에 안경을 들어 올렸다.

“아마 수호자가 아니었다면…… 이안 그 아이를 잃었을지도 몰라.”

“음. 알리노헤르 그것이 이안이 가진 비밀을 파헤치려 했던 거지?”

“응. 그렇지 않고서야 수호자가 그렇게 분노할 리 없지.”

“가만 보면 이안 걔는 참 폭풍의 눈 같아. 그렇잖아. 수호자랑 결속한 것만 봐도.”

“그래서 더 걱정이야. 그 힘은 주변의 힘을 끌어당길 테니까.”

“벌레들이 꼬이겠지?”

“언제든 원치 않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농후해지겠지.”

몰아치는 걱정을 어쩌지 못하고 클로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묵직한 그 숨을 잡아채듯 메이즈가 나뭇잎 닮은 손을 꼬물거렸다.

하여튼 아이들 일이라면 덮어놓고 걱정부터 한다.

주름살만 늘게.

“클로에,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

“……10년 전 그때처럼 될까 봐 그렇지.”

“…….”

“그땐 손도 못 써보고 그 아이를 잃었잖아.”

“클로에.”

“그런 후회는 한 번이면 족해.”

클로에는 씁쓸한 얼굴로 땅거미 지는 책상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후회를 곱씹는 건 지긋지긋하다.

‘만약 그랬다면…….’이란 가정은 결국 정해져 버린 결과를 놓고 하는 거니까.

그런 후회를 또 하지 않으려면 제가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였다.

지금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래서 본가로 돌아가려는 거야? 본가라면 치를 떨면서?”

“응.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선 사자 굴이라도 들어가야지.”

“괜찮겠어?”

“힘을 쥐려면 감수해야겠지, 그 정도는.”

알리노헤르의 말이 모두 맞다.

저를 막으려면 그에 합당한 힘을 갖추라고 했던 그 말 말이다.

그 말처럼 알리노헤르를 막을 힘이 저에게 있었다면, 그년이 제 말을 무시하고 이 사달을 만들었을까.

결국, 이안이 다친 것은 제 탓이기도 했다.

‘……이젠 인정해야 해.’

이번 일을 통해 클로에는 외면하고 있던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간 제가 입버릇처럼 내뱉었던 말, ‘살리카 가주 같은 괴물이 되기 싫다.’란 그 말.

그 말은 그저 변명이며 회피의 수단이었음을 말이다.

클로에는 단단하게 주먹을 말아쥐며 서신을 힘주어 문질렀다.

“훗날 그 아이를 기꺼이 도와줄 수 있으려면.”

변방의 일개 교수로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후일 이안이 위험에 처해 도와달라고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런 순간에 이안을 도울 수 있는 건 보통의 클로에가 아니었다.

살리카의 직계이며 가주의 여동생인 클로에 살리카, 그 명패지.

“그러니까 메이즈 지켜봐 줘.”

“응?”

“내가, 내 힘에 집어 삼켜져 괴물이 되지 않게. 살리카 가주 그자처럼 되지 않게 말이야.”

* * *

‘클로에 님이 가주님께 서신을 보내다니.’

살리카의 수호검은 은쟁반 위의 양피지를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거의 10년 만이었다.

집을 뛰쳐나간 뒤로 몇 번 오가던 왕래가 끊긴 지가 그쯤 되었다.

설령 제 오빠인 가주가 죽었대도 이쪽으로는 고개 한 번 안 돌릴 성미인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서신을 보냈을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수호검은 이를 한편으로 밀어 넣었다.

일단은 가주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가주님.”

수호검은 테라스에 나와 있는 살리카 가주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적당한 보폭과 기척을 줄곧 유지하며 내민 은쟁반.

거기에 꽂힌 가주의 시선은 무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클로에 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반드시 가주님께 전달이 되어야 한다고.”

“클로에가?”

오랜만의 연락에도 가주는 별반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함이 먼지만큼 가신 얼굴을 했을 뿐.

가주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고 양피지를 읽어내려갔다.

원체 건조하니, 수호검으로선 서신의 내용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흐음.”

“…….”

“알리노헤르가 죽었다, 라.”

“예?”

되물음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 수호검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 알리노헤르가 죽었다니…….

그 여자가 누구던가.

살리카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 중 하나였다.

그런 알리노헤르를 대체 누가 죽일 수 있다고.

것도 에루리안에서 말이다.

“설마 알리노헤르를 죽인 게…….”

“흠. 클로에가 직접 처리했다는군.”

“클로에 님이…….”

“제 제자들을 건들지 말란 경고를 어겨서 그리 했다란 말이지.”

“아. 클로에 님이라면 원체 제자들을 아끼시는 분이지요.”

“버러지들을 싸고도는 어리석은 아이지.”

“…….”

제 동생인데도 평가가 냉했다.

칼 같이 잘라버리니 더는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입을 굳게 다문 수호검은 그저 가주의 턱 부분만 응시했다.

시선을 맞추며 똑바로 보는 것은 가주가 질색하는 행동이었으니까.

숨 막히는 정적을 오롯하게 감당하길 얼마간.

가주가 핏 입꼬리를 올리며 흥미가 동했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나쁘지 않아.”

“제가 아둔해서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클로에의 결정이 말이야. 나쁘지 않군.”

“……알리노헤르가 가주님의 명을 수행하고 있었는데도 말입니까.”

“수족이라는 건 그런 거지. 내 편할 대로만 쓰이고 나면 그뿐.”

“…….”

“클로에가 내린 명을 어겼다면 목숨을 거두는 거야.”

가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오늘 날씨가 어떠냐고 묻는 몹시 평이한 말투였다.

가장 지근거리에서 10년 넘게 두었던 사람이 죽었는데…….

가주의 지극한 평이함은 오히려 잔인함으로 치환되었다.

천진한 아이가 잠자리 날개를 하나하나 뜯어내는 모습과 비슷하달까.

“그나저나 클로에가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는 건…… 흠.”

“그게 다 클로에 님의 역린을 건드려 벌어진 사달 아니겠습니까. 하필 그분의 제자들을.”

“흐음.”

“특히 그 때문에 더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알리노헤르라면 클로에 님이 학을 떼시니.”

그럴 만했다.

둘의 케케묵은 악연은 세간에 알려진 게 다가 아니었다.

오로지 살리카 가주의 측근들만이 아는 사정이 따로 있다는 의미.

‘그건 알리노헤르의 습성으로 인해 생긴 거였지.’

지독한 순혈주의자였던 테사 알리노헤르.

그녀는 제가 가진 사상으로 인해 직계라면 무조건 엎어지고 봤다.

어느 정도냐 하면.

직계나 방계혈족들이 어떤 방계를 맘에 들어한다? 그러면 그들의 침실로 방계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작정 밀어 넣기 일쑤였다.

명분은 그럴싸했다.

순혈들을 모시는 것이 방계의 의무이며 기쁨이라는 것.

그게 충심이라고 말하는 삐뚤어진 사상은 정말…….

솔직히 수호검 그녀도 알리노헤르의 엇나간 구석만큼은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들의 직책상 어쩔 수 없이 자주 봐야 했지만.

‘어쨌든 알리노헤르의 그 행동이 발단이 되어 애제자까지 잃었으니 뭐.’

칠색 팔색하며 혐오할 만했다.

결단코 시간이 약이 될 수 없는 악연인데 또 제자들을 건드렸다?

더 볼 것도 없이 결과야 빤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던가.

하물며 클로에였다.

가주에 비하면 유약해 보여도 살리카인 이상 그녀는 불이었다.

계기가 무엇이든 타오르게 된다면 뭐든 집어삼킬 업화.

수호검은 오래된 기억 속의 클로에를 떠올려 보았다.

웃는 게 태양 같던 소녀.

비정한 살리카의 핏줄답지 않게 인정 많던 그녀.

하지만 제 것을 건드는 순간 누구보다 흉포한 존재가 되었었다.

살리카의 피는 어디 가지 않는구나라는 게 여실히 느껴질 만큼.

“클로에 님을 빤히 알면서 알리노헤르가 들쑤셨다면…….”

“계기가 무엇이든 클로에가 목숨을 취했다는 것에 구미가 당기는군.”

“…….”

“거기다 내 수족을 죽인 시점에 돌아오겠다, 라.”

“돌아오……. 클로에 님이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자꾸 되묻는 수호검을 가주가 지그시 응시했다.

그 형상이 꼭 어둠 속에서 짐승이 안광을 번득이는 것 같았다.

수호검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났다.

……실수했다.

오랜만에 듣는 클로에의 소식에 흥분한 나머지 그만.

수호검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경직된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가주가 여상하게 말문을 뗐다.

“어쩌면 클로에도 변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군.”

“…….”

“가문의 비호 없이 맨몸으로 부딪힌 세상은 춥고 혹독했을 터이니.”

가주는 양피지를 수호검이 들고 있는 은쟁반에 떨궜다.

터엉.

부딪히는 음이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희한하게 그 소리는 수호검을 마구 흔들었다.

“좀 쓸만해졌으면 좋겠군. 뛰어난 자질을 가진 클로에는 훌륭한 도구가 될 테니 말이야.”

쓰임과 도구.

제 동생을 그렇게 규정한 가주는 일절 알리노헤르에 관해 묻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도 없었다.

쓸모가 많다며 알리노헤르를 제 곁에서 3일 이상 떨어트려 본 적 없으면서.

지금에 와선 아예 없는 사람인 양 굴었다.

어떤 사정이 있든 가주가 지시한 임무에 실패했으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실패하는 자를 가주는 경멸 했다.

‘하라는 것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못하는 건 구제불능 쓰레기이다.’

이게 평소 가주의 입버릇이니 알만하지 않은가.

실컷 클로에 얘기만 한 가주가 뒷짐을 지고서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나저나 애매해졌군.”

“…….”

“시기가 영. 뷔트시겐의 적자를 조사할 자를 다시 파견하기엔.”

가주는 뻣뻣하게 서 있는 수호검에게 물었다.

“뷔트시겐 가주는 여전한가?”

“예.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고 있습니다”

“흐음. 은밀하게 움직여 꼬리를 잡기도 힘들다지.”

“예. 얼마 전에는 로토투아에 있는 중앙 연구소에도 잠입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동선을 뒤늦게 파악한 터라…….”

“쯔읏. 그자 때문에 뭘 할 수가 없으니.”

마뜩잖다는 듯 가주가 혀를 차며 눈매를 좁혔다.

뷔트시겐의 감시로 가주의 계획은 전면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혹여 뷔트시겐이 어떤 증거를 잡으면 안 되기에.

폭풍이 가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가주는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할 성미가 아니잖은가.

뷔트시겐에 제약을 걸려 약점인 이안에 대해 조사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게 알리노헤르가 파견된 진짜 이유였다.

이번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해버릴 수는 없었다.

뷔트시겐이 훼방을 놓는 이상 계획은 진행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가주는 현 상황을 다시금 되짚어본 다음 냉랭하게 명했다.

“이안 그자의 다음 행보가 어딜 지 반드시 알아내라.”

“다음 행보라면……?”

“그간의 행적으로 보아, 학기가 끝났다고 바로 뷔트시겐으로 가진 않을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연약한 적자를 통해 어떻게든 뷔트시겐 그 작자를 옭아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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