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연회에는 거지가 꼬이고, 남의 불행에는 인성 파탄자가 꼬인다.
세상인심이 그렇다.
‘저 여자도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이안은 치료실을 나서다 눈앞에 있는 식인 꽃을 보곤 입매를 비틀었다.
제가 침상에 누워 있다는 소식에 득달같이 달려온 꼴이 참.
독 묻은 웃음이 건드러지게 매웠다.
그런데도 아닌 양 폰투스는 속내를 교묘히 감추고서 살갑게 말을 붙였다.
“이안 님, 다치셨다 들었어요.”
“덕분에 피 한 바가지 쏟아 내고 더 건강해졌지.”
“어머. 피를 그렇게까지…….”
“놀라긴. 몸 안의 노폐물을 다 빼냈더니 몸이 아주 개운해.”
“입담은 여전하시네요. 그나저나 아직 몸이 온전히 회복된 것 같진 않은데…… 이를 어째요.”
어쩌긴.
폰투스의 거짓 걱정을 곧게 펴보면 속뜻은 이랬다.
‘그 몸으로 파라칸시스 시합은 이제 물 건너갔구나. 꼴 좋다.’, 이거였다.
훤히 보이는 속내가 우스워 이안은 파안대소를 했다.
하여간 웃을 일 없는 퍽퍽한 일상에도 폰투스 때문에 웃는다.
어찌 보면 참 기특한 존재였다.
이안이 줄기차게 웃어젖히자 폰투스의 동공이 약하게 출렁거렸다.
사람이 맥락 없이 웃어도 이유는 있다고, 저 때문에 웃는다는 걸 아는 것이다.
다 알면서 그 낯짝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그 상황에 맞춰야겠지.”
“이안 님을 따라 요즘 C반의 기세가 한창 좋았었는데…….”
“앞으로도 물은 여전할 거야. 우리 애들이 워낙 잘나서.”
“우리 애들…….”
그 말을 곱씹어보던 폰투스가 대뜸 눈꼬리를 사르르 접었다.
뭔가 재밌다는 기색이 역력히 묻어나왔다.
“이안 님 그거 아세요? 이안 님이 우리 애들이란 말을 할 때마다 솔직히 좀 나이 들어 보여요.”
“아…….”
하여튼 예리한 여자는 뒷발질해도 정곡을 찌른다.
어디 무서워서 찬물이라도 마실 순 있나.
더는 폰투스와 대화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이안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날 실컷 구경했으면 이젠 그만 돌아가지.”
“예전엔 사탕발림이라도 하더니 지금은 정말 매정하시네요.”
“그런 게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있나. 시간 낭비인데.”
“…….”
이안의 차가운 응대에 폰투스의 눈꼬리가 진하게 떨려 왔다.
심기가 상한 듯한 잔물결.
하지만 폰투스는 금세 감정을 갈무리하며 도로 이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간 낭비라 생각지 마세요.”
“시간 낭비가 아니면?”
“이렇게 얼굴 보고 함께 대화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않나요?”
하여간 얼굴 두께로 겨루자면 강적이었다.
그만으로 최단 시간에 중앙 대륙도 제패할 수 있을 정도랄까.
이안이 빤히 쳐다보자, 폰투스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다 일순 멈칫했다.
매혹을 쓰려는 건 아니었지만 의식을 하는 것 같았다.
제게는 통하지 않으니까.
“후훗. 실은 병문안도 병문안이지만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왔어요.”
“지금부터가 본론이자 네 진심이겠군.”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것부터가 그랬다.
찌를 듯한 적의는 온데간데없고, 이전처럼 살랑이며 교묘히 들러붙고 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죠. 아시겠지만 이안 님과 저는 비슷한 부류예요. 목적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폰투스가 화사하게 웃었다.
본디 식물이든 동물이든 독이 묻은 것들이 아름답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 법칙 같은 건데, 이것을 인간이 가지면 거부할 수 없는 무기가 된다.
폰투스처럼.
하여 미인의 호소력은 언제나 심금을 울렸다.
“그러니 우리는 태생적으로 잘 맞을 수밖에 없죠.”
“…….”
“해서 제안을 하나 할까 해요.”
제안이라는 말에 이안은 눈썹을 꿈틀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할는지.
그래도 일단 들어나 보자 싶어 말해보란 눈짓을 했다.
그 즉시 냉큼 폰투스가 입을 열었다.
“무조건 절 밀어내지만 말고 우리 동맹이 되는 건 어때요?”
“동맹?”
“전 여러모로 이안 님에게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가깝게는 파라칸시스 시합에서부터 멀리는 이안 님이 가주가 될 때까지.”
나불거리던 폰투스는 기어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그때까지 제가 이안 님의 앞날에 꽃길을 깔아드릴게요.”
꽃길은 개뿔.
저 여자가 깔아주는 길은 지옥행 편도였다.
홀려서 따라갔다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쩌는 배려심에 눈물이 다 나네.”
이안의 비소에도 폰투스는 나긋함을 버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차분히 고려해 보세요. 아직 학기가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
“아, 저 좋자고 아픈 이안 님을 계속 세워두었네요. 몸조리 잘하시고요. 그럼 전 이만.”
저 혼자 실컷 떠들더니만 폰투스는 왔던 그대로 나붓하게 멀어져갔다.
유한 앞태와 달리 독기가 묻은 뒤태는 노상 봐오던 모습인데…….
‘역시…… 뭔가 수상쩍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이안의 정수리를 콕콕 찔러왔다.
손을 잡았던 알리노헤르마저 사라진 상황.
조력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클 진데.
그다지 좋지 않은 형국임에도 폰투스는 지나치게 느긋하고 자신만만했다.
위장도, 허세도 아니었다.
대체 저 머리통으로 또 뭔 일을 꾸미는 건지.
* * *
“마지막 기회랍니다, 이안 님.”
제 방으로 돌아온 폰투스는 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기회.
이것이 그녀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임을 이안은 아직 모를 것이다.
아니지, 몰라야 했다.
만약 눈치를 챈다면 또다시 제가 쥔 패를 빼앗으려 들 테니까.
“되도록 제가 건넨 진심을 빨리 알아채시길…….”
폰투스는 서늘한 표정을 하고선 상자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우윳빛이 선명한 동그란 구슬.
마치 커다란 사탕 같은 그것을 폰투스는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러자.
<같잖은 생물이 감히 내 목숨줄을 가지고 놀려 하다니.>
은발의 남자가 허공을 손으로 내려긋는 모습이 재생되었다.
남자의 손짓 한 번에 공간이 쩌적하고 갈라졌다.
그러더니 기백의 유리 조각이 되어 허공에 비산하며 흩날렸다.
마치 잿가루인 양.
폰투스는 영상석 속 남자를 유심히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이안 님이 감춘 비밀이었네요.”
바꿔말하자면 이안의 약점을 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상석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할 만한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을 터.
일단 뷔트시겐 가주가 그렇다.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이 영상석을 달라고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이게 다른 이들의 손에 들어가는 걸 막아야 하니까.
“이안 님의 목숨줄이 이것에 달렸으니.”
남의 생사를 저울질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짜릿한 일이었다.
그다음은 살리카 가주.
그녀가 제일 염두에 두고 있는 후보군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뿌리는 살리카라서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영상석을 건네면 가주는 제게 무엇이든 쥐여줄 테니까.
저를 쫓아낸 폰투스 가를 필두로 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가장 구미가 당기는 건 황제지.”
폰투스는 영상석 속 은발의 남자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수호자가 둘인 것을 가장 반기지 않을 인물은 명확했다.
황제, 그리고 황가의 사람들.
자신들만이 가지는 특권을 다른 이가 가진 걸 알면 눈이 뒤집힐 것이다.
뿐일까.
이안을 당장에라도 찢어발기려 들 것이다.
그리되면 안타까울 것이나.
“이안 님이 내 제안을 거절할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황제여야만 해.”
결국 이안과 완전한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치자.
그렇다면 저쪽에서 반격할 힘을 빼앗아야만 한다.
상대의 전력이 온전할 시 역습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뷔트시겐을 완벽히 밟아버릴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끝마무리까지 염두에 둔다면 역시 황제가 제일 나았다.
“그자라면 내가 가진 열망을 채워줄 수 있겠지.”
이 제국을 손아귀에 쥐는 것.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꿈이 황제를 만나면 단박에 이뤄질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만 더 이안 님에게 기회를 주고 싶네요. 그러니 잘 생각해 보세요.”
이안에게도 선택지를 주고 싶었다.
자신과 동맹을 맺고 제 꿈을 함께 나눌 선택지를.
이유는 별거 없다.
후보군 중 가장 다루기 쉬운 게 이안이었으니까.
폰투스는 달콤한 꿈을 꾸는 얼굴로 바깥을 응시하며 눈꼬리를 접었다.
* * *
‘폰투스가…….’
이안은 눈썹머리를 내려트리며 골몰했다.
폰투스가 당당한 거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나쁜 짓도 뻔뻔할수록 더 잘하는 거라고, 가진 게 없어도 빳빳한 얼굴 들고 오만하게 굴 여자였다.
그 성정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더욱 어제의 행보가…….
“이안, 이안.”
“……응?”
이안은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얼굴로 저를 부른 상대를 보았다.
눈앞의 장대한 협곡에서 막 걸어 나온 레브.
녀석이 얼굴에 묻은 먼지를 털더니 대답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말해봐, 뭔데?”
“다짜고짜 뭘?”
“뭔 생각인지. 수련 중에 딴짓할 놈이 아닌데 집중을 못 하네.”
“아.”
그제야 이안은 제가 뭐 하고 있었는지 상기했다.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파라칸시스 시합을 대비해 아이들과 모의 훈련을 하고 있었다.
기숙사 5층의 비밀 공간에서 말이다.
계단참을 처음 밟는 사람의 속성 따라 바뀌는 환경.
이를 위해 올리브가 계단을 밟으면서 발리올의 풍경이 펼쳐졌더랬다.
은청색의 장대한 협곡이 구현된 것.
이 지형을 이용한 훈련을 가장 먼저 끝마친 건 이안이었다.
그 덕에 여유가 생겨 명치에 걸리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실은 어제 폰투스를 만났는데 그게 좀 걸려서.”
“왜, 뭔가 께름칙해?”
“어. 워낙 뒷공작이 특기인 여자라 내가 예민하게 반응한 걸 수도 있지만…….”
“흠. 뭔지 몰라도 이안 네 예감이 그렇다면 영 쎄한데.”
레브가 찝찝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꼭 절단 난 구더기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지금껏 폰투스가 꿍꿍이를 가져서 좋았던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고민 중이야. 어떻게 할까 하고.”
이안의 눈빛이 깊어지자, 레브가 턱짓으로 협곡을 가리켰다.
한 번 봐보라는 눈짓이라 이안은 협곡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이들이 절벽 설인이라 불리는 마수와 싸우며 협곡을 통과하고 있었다.
막바지에 와서 힘겨워하긴 해도 다들 제법 잘 싸웠다.
“이안, 애들도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어. 그러니까 혼자 해결할 생각 말고 뭐든 말만 해.”
“너희들을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냐.”
“알지. 이안 네 고질병인 거. 혼자 바리바리 끌어안고 끙끙대다 피 한 사발씩 쏟는 거 말이야.”
“어쭈? 멕이는 겨?”
“어. 멕이는 건데. 네가 좀 덜 다칠 때까지는 그러려고.”
“아이고야.”
이안은 과장되게 곡소리를 내며 고달플 앞날을 예감했다.
레브의 잔소리가 더 심해질 것을 예상한 탄식이었다.
어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잔소리쟁이들뿐인지.
말이 길어져 봐야 좋을 게 없어서 이안은 얼른 다른 얘기를 꺼내 들었다.
“나무 정령의 핵을 뜯어내는 건 어때? 잘 돼가?”
“잘 돼가. 이안 네 말마따나 수련하기엔 그만한 상대가 없어. 손상 없이 핵을 제거해야 하는 작업이라 할수록 마력을 사용하는 정밀도가 올라가니까.”
“잘됐네.”
“이안 너는?”
“나?”
“응. 산화초 모으는 건 어때?”
“나도 순탄하게 잘되고 있지.”
“혹 손이 부족하면 말해. 기름을 짤 만큼은 모아야 하니까.”
“어. 걱정하지 마셔.”
이안은 자신 있게 답하며 도로 시선을 협곡 쪽으로 돌렸다.
현재의 계절과 무관한 열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만큼 뜨겁게 파라칸시스가 대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랄까.
그리고 이 열풍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뜨거워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