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27화 (127/214)

제127화

닷새 후 본관 앞마당.

[오늘이구나. 불의 가시를 얻는 날이.]

녹스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운을 떼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어찌나 부산스럽게 촐싹거리는지.

녹스의 쉼 없는 날갯짓에 애꿎은 피해자인 이안만 연신 안면을 강타당했다.

-얻긴. 아직 파라칸시스 시합은 시작도 안 했는데.

[우승을 못 하면 훔쳐서라도 처먹을 놈이.]

-기어이 제자를 도둑으로 몰아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스승님.

[오냐. 시원하다, 이놈아.]

거칠 거 없는 녹스는 어느 때보다 더 들떠 있었다.

그 이유야 두어 가지가 있는데 우선은 제자인 이안 때문이었다.

불의 가시를 얻으면 불의 통로가 뚫리는데, 그러면 불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이는 이안이 지금까지와는 차별화된 성장을 이룬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궁극적으로는 녹스에게 걸린 제약이 얼마쯤은 풀린다는 것이다.

[네놈이 그 하찮은 수준에서 벗어나면 내 모습도…… 푸흘흘.]

-본래 형상을 취할 수 있댔지?

[인간형을 자의로 취할 수 있지. 저번처럼 강제 발현이 아닌.]

-아. 그럼 그 잘생김을 계속 만날 수 있단 얘기?

[……크흠.]

말을 잘하다 말고 녹스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쩐지 그 굴림에는 말 못 할 사연이 그득 들어차 있었다.

-무슨 문제 있으셔?

[문제가…… 없다.]

-근데 왜 그런 반응?

[커흐흠. 미리 살짝 귀띔해주자면 잘생김보단 귀여움의 한도 초과 쪽이랄까.]

-응?

[……8살 정도의 꼬맹이가 되거든.]

-8살?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성인의 모습이야 신상으로 자주 접했으니까 이질감이 들어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8살이라니.

이안이 생경하단 낯을 하자, 녹스가 앞발을 통통 튕겼다.

[너도 낯서니? 나도 그 모습은 오랜만이라 좀 싱숭생숭하다.]

-근데 빨리 보고 싶긴 하다.

[푸흘흘흘. 그래? 이제 곧 볼 수 있을 게다.]

녹스는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연신 꿀렁거렸다.

흡사 구애의 춤을 추는 미친 꿩 같다.

그게 재밌어서 한동안 지켜보다, 이안은 앞쪽에서 느껴지는 진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

클로에와 스톨레를 비롯한 여타의 교수들이 앞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곧장 길쭉한 단상에 올라 일렬로 섰다.

일사불란한 교수들의 앞.

그들을 등지고 오뚝하게 선 학장이 얼마 없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혹여 뽑힐세라 조심히 다루는 손짓만큼 목소리 또한 무척 진중했다.

“에-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드디어 에루리안의 1년을 정리하는 뜻깊은 날이 돌아왔습니다.”

학장은 첫머리를 떼고선 찬찬히 앞마당을 훑어보았다.

1학년들이 반별로 5열의 줄을 맞춰 서 있었다.

풍기는 기운만 놓고 보자면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처럼 보였다.

사뭇 들뜬 기대감과 흥분, 긴장감이 덧씌워진 다른 반을 향한 견제.

다양한 감정들이 틈 사이사이를 빼곡하게 메우며 대기를 조여왔다.

“오늘부로 파라칸시스 시합이 시작된다는 말이지요.”

웬일로 소심한 학장이 또박또박 말을 잘했다.

학장의 속에 다른 사람이라도 들어있나 싶을 정도였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그간 갈고닦은 기량을 시합에서 마음껏 뽐내기만 하면 됩니다.”

학장이 씨익 웃자 휑한 정수리가 덩달아 반들거렸다.

“이왕 재주를 과시할 거, 상위 10위 안에 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

“10인에 들면 중앙 아카데미로 가는 추천서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추천서, 에루리안에 다니는 모든 이들의 목표였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갖고 싶은.

그 열망을 잘 아는 학장이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니 후회를 남기지 말고 최선을 다하세요.”

“예.”

“하나, 최선은 다하되 과해선 안 됩니다. 비열하고 추잡한 수를 쓰는 대신 정정당당하게 겨루십시오.”

“예.”

1학년 전체가 우렁차게 답했다.

얼마나 큰지, 그 소리의 압력만으로 학장의 머리카락이 매가리 없이 휘날렸다.

미역 줄기의 비상이었다.

그에 깜짝 놀란 학장이 손으로 정수리를 황급히 덮어 눌렀다.

무척 날랜 손짓.

그거 한 번에 한껏 조여지던 분위기가 파사삭 깨져버렸다.

웃음을 참으려는 교수들의 헛기침과 학생들의 키득거림까지.

한데 어울려 퍼지는 통에 진지함이 대번에 흐려져 버렸다.

삽시간에 분위기를 바꿔버린 학장은 벌게진 목을 벅벅 긁으며 헛기침했다.

“크흐흠.”

민망할 때 헤쳐나가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뻔뻔해지는 거.

학장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앞선 일을 삭제해버린 양 점잖게 입을 뗐다.

“집중하도록. 지금부터가 본론이니까.”

“…….”

“모두가 알다시피 파라칸시스는 서쪽 숲에서 3일간 진행됩니다. 물론 먹고 자는 행위 또한 모두 그곳에서 이루어지죠.”

본래 그라나토스는 마력 운용에 제약이 많은 곳이다.

어떤 술식 같은 것을 새기기도 어렵고.

그런데 희한하게 파라칸시스 기간만 되면 서쪽 숲만은 잠시 헐거워진다.

숲 안쪽의 깊숙한 곳을 제외하고는 교수들조차 수월히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

그 탓에 파라칸시스는 늘 서쪽 숲에서 진행되었다.

“3일 중 첫째 날은 깃발 뺏기를 할 겁니다. 이것은…….”

깃발 뺏기.

자기 진영의 것은 최대한 지키면서 다른 반의 것을 빼앗거나 없애는 것이 목표이다.

복잡할 거 없다.

깃발이 많이 남는 반이 첫날의 우승자가 되는 거니까.

그리고 둘째 날, 이때는 이름표 뜯기를 한다.

2차전 또한 진행 방식은 단순하다.

같은 출발 선상에서 시작해서 정해진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오롯이 이름표만 뜯으면 된다.

딱히 정해진 규칙 없이 구간만 돌파하면 되는 난전 형식.

이 구간에서 가능한 한 상대의 이름표를 많이 뜯어내야 한다.

이름표가 뜯긴 사람은 탈락 처리돼 남은 시합을 치를 수 없게 되니까.

즉, 적의 숫자를 줄일 기회라는 것.

하여 둘째 날은 파라칸시스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셋째 날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던 학장이 품에 넣어둔 종이를 꺼냈다.

언뜻 보이는 앞면에는 복잡한 술식이 적혀 있었다.

그걸 학장이 찢자마자.

화아악.

난데없이 웬 나무가 단상 위에 쏙쏙 생겨났다.

이파리가 넓적하고 잎맥이 수천 가닥의 실선으로 이루어진 활엽수.

발바시아 나무였다.

‘과연. 마력 대신 쇠의 기운을 품고 있다더니.’

나무의 표피가 쇳물이라도 흐르는 것처럼 우둘투둘하니 검붉었다.

그 검붉음이 이따금 무언가로 인해 흔들렸다.

이파리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선홍색 날개들 때문.

‘파라칸시스.’

발바시아 나무의 뿌리에 살면서 쇠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정령이다.

일명 땅굴 나비라 불리는 일족.

그들은 별칭처럼 거의 햇빛을 보지 않고 살다가 특정한 시기가 되면 지상으로 나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이안은 눈가를 좁혀 정령의 산들거리는 움직임을 쫓았다.

정령들은 분주히 이파리를 오가며 뭔가를 뽑아내고 있었다.

하늘하늘 감기는 검붉은 실.

‘저 실을 뽑아내려고 이 시기에만 올라오는 거지.’

한낱 실에 불과해 보이지만 저것이 뭉쳐지면 마름모꼴의 실타래가 되는데, 그 실타래가 바로 영약이다.

이안이 얻으려는 불의 가시인 것.

즉슨 정령들은 영약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파라칸시스 시합이 있기 일주일 전에 말이다.

이안과 마찬가지로 학장의 시선 또한 정령의 분주한 손길에 꽂혔다.

“간략히 말해 이들, 파라칸시스를 지키는 것이 셋째 날의 최종 목표입니다.”

“…….”

“그리고 파라칸시스를 수호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불의 가시를 제공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파라칸시스 시합인 거다.

모든 것들이 파라칸시스 일족과 연관이 되어 있으니까.

학장이 번들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재차 말했다.

“하니 공평하면 좋겠지만……. 파라칸시스는 차등을 두어 각 반에 주어질 예정입니다. 앞선 두 날의 합산 성적에 따라.”

“…….”

“우승한 반에게는 오십의 정령이, 가장 성적이 미비한 반에게는 열의 정령이 주어집니다.”

학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파라칸시스의 진행 방식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새삼스러운 것이다.

실감이 큰 만큼 동요도 꽤 컸다.

그럴 수밖에.

애초 정령의 수가 차이가 난다는 건 이미 승패가 판가름 났음을 의미하는 거니까.

학생들이 동요하자 학장이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셋째 날의 우승 점수가 가장 크니까요. 역전을 노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다는 거지요.”

머리를 잘 굴려 기깔나는 작전을 세우면 가능하다는 뜻깊은 헛소리.

그 말꼬리 끝에 학장은 목이 아프다는 듯 침을 삼켰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끝마무리에 든 분위기.

“자, 그럼 슬슬 마무리하도록 하죠. 일단 레기나인 슈튼하노버 단상으로 나오거라.”

학장이 에이프릴을 호명했다.

* * *

모두의 시선이 몰리는 가운데 에이프릴이 사뿐사뿐 단상 위로 올라갔다.

조용하게 당당한 보폭이었지만 표정은 조금 딱딱했다.

긴장되는 모양이다.

분명코 학장 앞에 설 때까지는 경직된 모습이었는데.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에이프릴이 환한 미소를 내보였다.

염려하지 말란 웃음이었다.

연이어 에이프릴은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한껏 어깨를 폈다.

정확히는 그녀의 가슴팍에 달린 종탑 모양의 브로치를 보여주는 거였다.

레기나의 상징인 그것을.

어째 귀여웠다.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와 피식거리고 있는데…….

찌릿찌릿할 정도로 이안의 옆태에 뾰족함이 날아들었다.

힘들게 눈알을 굴리지 않아도 폰투스라는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이쪽을 보는 눈빛이 열렬하다 못해 살기 등등했으니까.

굳이 고개를 돌려 쳐다볼 필요는 없잖은가.

외면하고 있자니, 여전하게 학장이 본분을 다하겠다는 듯 열심히 입을 놀렸다.

“지금부터 레기나를 따라 선서를 하겠습니다.”

“…….”

“선서, 파라칸시스에 임함에 있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정정당당하게…….”

“선서, 최선을 다할 것이며 정정당당하게…….”

선서는 날밤을 새워도 모자라겠다 싶을 정도로 길었다.

해도 해도 끝이 나질 않았다.

거의 5분을 잡아먹고서야 학장은 달싹거림을 멈추고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또다시 몇 번이나 침을 삼킨 뒤.

이번엔 처음부터 단상 위에 있던 커다란 통으로 학장이 손을 뻗었다.

“자, 이젠 시합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토록 하겠습니다. 레기나, 각자의 이름표가 적힌 옷핀을 나눠주거라.”

“예.”

“이는 둘째 날에 있을 이름표 뺏기에 쓰이는 거니, 잘 지키도록.”

발바시아 나무의 넓적한 나뭇잎을 형상화한 옷핀.

이 옷핀을 뺏기면 즉시 탈락자가 된다.

셋째 날 시합에 출전하지 못한다는 의미라 잘 지켜야 한다.

옷핀이 1학년 전체에게 지급된 후였다.

학장이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부쩍 늙어 보이는 안색을 하곤 에이프릴에게 공 세 개를 건넸다.

각각의 공에는 어떤 글자가 쓰여있었다.

“이 공은 각 반의 진영을 정하기 위한 것으로…….”

진영은 학장이 임의로 정해주지 않는다.

1년 동안의 성적을 기반으로 가장 우수했던 반부터 우선권을 갖고 선택하는 것이지.

그간 학점에 목을 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공을 제일 먼저 고르기 위한 것.

결국, 1년간의 행적이 파라칸시스 시합과 무관하지 않게 얽혀 있었다.

‘방어나 공격에 유리한 장소를 선점할 수 있단 얘기지.’

그 탓인지 A반의 안색들이 꽤나 밝았다.

A반은 약간 우쭐대는 면상들을 하고선 C반을 흘끔거렸다.

2학기 때 성적이 우수했다 한들.

어차피 C반은 공을 고르는 순서가 맨 마지막이지 않던가.

그렇기에 어떤 표정인지 보려는 거였다.

하여간 곧 죽어도 남의 불행은 기를 쓰고 구경할 것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