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28화 (128/214)

제128화

공을 선택하고 난 잠시 후.

이안은 삐딱하게 서서 A반 진영인 돌산을 올려다보았다.

돌산은 높다랗고 가팔라서 기어 올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한 군데 발 디딜 틈바구니 없이 매끄러웠다.

“흠.”

“역시 A반은 돌산을 골랐네.”

삐딱한 이안 곁에서 정찰조인 레브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선택지가 돌산, 언덕, 평지 중 하나였으니까.”

“하긴. 내가 뻔한 말 했다.”

“그나저나 저 불길…….”

이안의 시선이 붙박여 움직이지 않는 곳.

돌산을 에워싸고 불길이 세차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산자락에서부터 시작해 산의 중반 높이까지 치솟은 불의 테두리.

시퍼런 색깔만큼 그 기세가 사납고 매서웠다.

조금만 가까이 가도 살덩이가 녹을 것 같은 게 접근 자체를 불허하는 것 같았다.

“살리카 저것들 독하게도 불 질러 놨네.”

“아주 작정했지 뭐. 근데 밤에 오줌이나 안 싸려나 몰라.”

“오줌통이라도 특수 제작해줘야겠다.”

“하하핫.”

가벼운 말들로 이어지는 대화.

그러는 와중에도 이안은 돌산을 자세히 살피며 상황을 분석했다.

말이 돌산이지 나무가 울창해서 마치 밀림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산을 덮고 있는 암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식물이 자라기 힘든 환경인데, 어떻게 저렇게 우람하게 자란 것인지.

어디서 몰래 영양제라도 주입받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희한한 건 나무의 현재 상태였다.

활활 제 몸을 태우고 있는데도 전혀 숯덩이가 되지 않았다.

그 이유야.

“레브, 보이지? 나무에 전부 불 정령의 기운을 옮겨 심어 놓은 거.”

“나무를 하급 불 정령화 시킨 거네. 저거면 불길이 진짜 오래가는데.”

“종일 타지. 심지에 마르지 않은 기름을 발라놓은 격이라.”

목 속성을 기반으로 하는 화 속성은 마력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오래도록 타오른다.

그래서 살리카들이 주로 목 속성의 정령과 결속을 맺는 것이다.

상성이 잘 맞아 기술이 극대화되니까.

“그나저나 참 고생을 곱절로 했다.”

“그래도 정성이 대단하긴 하네.”

어떤 속성을 일시적이나마 다른 속성으로 변환시키기.

이는 까다롭고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사실 효과는 그만이었다.

나무 자체가 훌륭한 1차 방어선이 되어 살뜰히 침입자를 막아줄 테니까.

한데 이만을 위해 그 번거로운 작업을 했으랴.

이안은 뭔가를 알아보려는 듯 나뭇잎 하나를 주워 레브 앞에 내밀었다.

말하지 않아도 척이었다.

츠스스스.

잎의 끝부분을 누른 레브가 나뭇잎에 얼음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내 두꺼운 얼음이 낀 나뭇잎.

거기에다 이안은 또 몇 겹의 바람을 에둘렀다.

단단히 중무장을 시킨 후 그는 곧바로 나뭇잎을 돌산으로 날려 보냈다.

어떤 기교 없이 직선으로 뻗어가는 궤적.

힘있게 날아간 나뭇잎은 시퍼런 불길을 무사히 통과했다.

치이익.

하지만 돌산의 표면, 암벽에 닿자마자 일순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잿가루조차 남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표면이 뜨겁다는 거였다.

“저 나무들이 암벽을 쩔쩔 끓여 놨네.”

나무의 하급 불 정령화, 이것의 2차 목적은 두 번째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

이번엔 폰투스가 머리를 잘 굴리긴 했다.

이안은 눈썹머리를 꿈틀하며 다시금 레브에게 말을 걸었다.

“무턱대고 깃발을 뽑으러 갔다간 자칫 숯불구이 되겠다.”

“설령 공격한다 해도 우리는 올라가야 하고, 저것들은 위에서 방어하니까 이건 뭐.”

“절대적으로 A반이 유리하긴 하지.”

지형만 훌륭히 이용했을까.

저들이 지켜야 할 깃발의 배치도 교묘했다.

불길이 끝나는 중반 지점을 시작으로 해서 위로 갈수록 더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섣불리 덤볐다가는 A반의 사정권에 들기 딱 좋은 거리.

그 거리감을 알면서도 성급히 돌산을 오른다면 이쪽 전력만 손실될 터였다.

그렇다고 A반을 저대로 둘 수도 없잖은가.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야지.’

이안은 씨익 웃고선 등을 돌려 돌산과 거리를 뒀다.

아주 시원스러운 보폭으로.

“가자, 얘들아. 길 만들러.”

***

길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단계.

그건 나무 정령의 핵을 모으는 일이었다.

“아, 진영을 수성해야 하니까 본진 근처의 것만 잡아. 멀리 가지 말고.”

“예, 대장.”

장난스러운 아이들의 경례, 그게 사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으드드득.

이안은 발골하듯 나무 정령의 핵을 통째로 도려냈다.

단호한 손속에 정령의 거칠거칠한 가슴팍에는 큰 구멍이 생겼다.

깔끔하게 도려진 자리.

그 구멍의 단면을 메마른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스산한 바람 소리가 났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는 것처럼.

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안은 핵을 손바닥 안에서 굴려보았다.

이리저리 뒤집힐 때마다 핵의 표면이 햇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핵이 원체 부드러우니까 흠집이 잘 난다.”

“작은 상처만 나도 못 쓴다고 했지?”

“어. 핵의 근원이 휘발돼서 가치가 없어져 버려.”

“최대한 조심히, 접수했어.”

아이들은 꼬박꼬박 답하며 나무 정령을 공격했다.

나무에 있는 대지의 기운을 극대화해 정령 내부에서 조각내거나, 싸라기눈을 스미게 한 뒤 핵을 얼려 물방울로 쳐내 분리하거나.

그렇게 줄기차게 나무 정령만 사냥한 네 시간 뒤.

“후우.”

아이들은 지금까지 모은 나무 정령의 핵을 세어 보았다.

양이 상당했다.

“이제 거의 다 모아간다.”

“오늘까지 해서 몇 날 며칠을 이 작업만 했었으니까.”

“요 며칠 나무 정령을 진짜 질리게 본 것 같다. 제일 흔한 마물이라 평소에도 많이 마주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볼 일은 드물지.”

“노가리 그만 까고 일단 가지고 온 거나 병에 넣자.”

“아, 그렇지. 뽑은 지 반나절이 지나면 효력이 떨어진댔으니까.”

고개를 주억거린 아이들에 의해 핵은 곧장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깊게 파놓은 구덩이 속, 거기에 넣어둔 유리병 안으로.

주둥이가 넓적한 병 안에는 샛노란 액체가 그득 담겨 있었다.

첨벙.

액체에 닿은 정령의 핵은 보글보글 기포를 내며 융합되어갔다.

이것이 길을 만드는 두 번째 단계였다.

“이대로 한 시간만 넣어두면 돼.”

이안은 액체를 머금어가는 핵의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몰랑몰랑하던 핵이 조금씩 딱딱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돌처럼 굳어지면 원하는 결과물이 될 것이다.

이안뿐 아니라 아이들 전부의 시선이 유리병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노란 산화초의 기름이 나무 정령의 핵을 이렇게 단단히 굳힐 줄은 몰랐는데.”

“레브 너뿐만이 아니야. 현재로선 아무도 몰라.”

“아무도?”

“어. 아직 절실하게 필요한 물건은 아니니까.”

“아……. 그런 걸 넌 어떻게 아는데, 라는 질문은 이제 식상하니까 넘어가련다.”

끊는 게 아주 칼 같았다.

남들이 모르는 사실들을 죄다 아는 저에게 이골이 난 듯싶다.

묻지 않는 레브를 대신하려는 걸까.

녹스가 ‘나는 네게 질문이 있다.’라는 듯 불쑥 끼어들었다.

[저것들이 융합했을 때의 용도를 알게 된 게 전쟁 때문이지?]

-어. 내가 알고 있는 지식 태반이 그렇지.

쓸데없어서 버리는 나무 정령의 핵과 그저 별이끼 나무에 기생할 뿐인 산화초.

이 둘의 조합이 어떤 쓸모를 만들어낸 건 전쟁이 터진 후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전쟁은 불 속성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제압할 것인가에 관한 고찰을 절실히 요구했다.

이를 위해 머리를 쥐어짜길 몇 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 우연히 발견한 게, 나무 정령의 핵과 산화초의 융합이었다.

제압이 아닌, 불을 이용해 맞불을 놓는 방법.

이 방법은 재료가 흔하고 만들기가 쉬워서 그 당시 생각보다 자주 애용되었었다.

[그러니까 이 쪼그마한 물건이 A반 그것들을 혼쭐나게 할 수 있다는 거지?]

-당연히. 그걸 위해 그동안 미친 듯이 준비했으니까.

이안은 산화초 기름이 담긴 유리병을 톡톡 두드렸다.

손이 짓무르도록 따서 짜낸 보람이 있을 것이다.

조금 후에 있을 광경이 꽤 볼 만할 테니까.

확신을 거듭하며 이안은 숙성이 필요한 나무 정령의 핵에서 눈을 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마주한 아이들의 얼굴.

녀석들은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였다.

“일단 쉬자. 핵에 기름이 잘 스며야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

“으아. 꿀 같은 휴식 시간이다.”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주저앉으며 한숨을 돌렸다.

땀에 젖은 얼굴을 식히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의 질감에서 알 수 있듯 C반 진영은 그라나토스 서쪽의…… 평지였다.

말 그대로 허허벌판.

B반이 언덕을 가져가면서 남겨진 기피 대상 1호.

이안은 석양이 비치는 사선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엄폐물 하나 없이 그저 넓기만 한 허허벌판에 깃발들이 흩어져 있다.

밀알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공격을 한다면 그대로 몰이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

확실히 다른 반에 비해 불리한 조건이기는 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뭐가 됐든 써먹기 나름이지.’

물건이든 뭐든 안 좋은 쓰임은 없다.

그걸 사람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 * *

“아우. 저것들 대체 뭐 하는 거냐. 거슬려 죽겠네.”

살리카는 돌산 꼭대기에서 아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서 C반이 용을 써대며 알짱거리고 있었다.

정령을 산자락까지 보냈다가 금방 뺐다, 또 정령을 보냈다가 뺐다가.

그 짓거리만 벌써 두 시간째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차라리 가까이 오면 다 태워버릴 수 있는데 깔짝깔짝.”

“그냥 내려가서 확 조져버릴까.”

“아서라. 멜러니가 여기에 얌전히 붙어 있으랬잖아.”

“근데 진짜 뭐 하는 거래. 깃발이 있는 곳까진 올라오지도 않으면서.”

“하! 염병할 것들. 겁나 신경 쓰이네.”

짜증을 있는 대로 낼수록 되레 부아만 치밀뿐이었다.

이쯤 되자 A반은 안 되겠다는 듯 서로 모종의 눈짓을 주고받았다.

혼쭐 좀 내줄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의견 일치는 금방 이루어졌다.

본디 못된 짓에는 단합이 잘되는 법이다.

너나 할 것 없어 C반 것들의 뭉개질 면상을 상상하며 그들은 야멸차게 공격을 가했다.

한데…….

이쪽에서 화살 비를 날리면 파도의 보호막을 일으켜 막고.

불의 폭탄을 던지면 즉각 대지의 벽으로 튕겨내 다시 돌려보내고.

족족 막아내며 C반 것들이 약을 있는 대로 올려댔다.

우릴 잡을 거면 내려와 보시든가, 라는듯이.

저것들의 의도가 쉬이 읽히자 A반은 더 열이 뻗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뛰쳐나가지 못하고 씩씩대는 A반의 기류가 요동치는 가운데.

“계속 저런 식이란 말이지.”

무리의 중앙에 앉아 있던 폰투스가 눈꺼풀을 내려트렸다.

여유만만인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에 A반의 흥분 지수가 미세먼지만큼 가라앉았다.

“말해 뭐해. 저것들 계속 저 짓거리 하고 있어.”

“흐음.”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우리한테 와서 깔짝대다가 또 B반한테 가서 깔짝대고. 난리야, 아주.”

“마력만 낭비하고 있네.”

“그렇다니까. 게다가 올 때마다 뭘 자꾸 열심히 던져.”

살리카의 나불거림은 쉼 없이 이어졌다.

침을 다량으로 뿜는 푸념을 폰투스는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흘려들었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것도 친위대가 아닌 자는 무가치했다.

오래 상대할 까닭이 없었기에.

거리를 벌린 폰투스는 제게 가치 있는 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C반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이안에게로 말이다.

몸 상태가 안 좋아 조금쯤은 몸을 사릴 줄 알았는데 팔팔 날아다닌다.

대체 저러는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든 걸까.

평온한 얼굴이 이안의 심중을 파악해내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 때문에 폰투스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대니얼, C반이 줄곧 이 암산에 박는 거, 그거 가져와 봐.”

“그거?”

“응. 다시 살펴봐야겠어.”

폰투스의 명령에 멀끔한 친위대 하나가 냉큼 움직거렸다.

그러더니 얼마 가지 않아 몇 사람의 손을 거친 뭔가를 폰투스에게 내밀었다.

“……조약돌.”

표면이 반들반들하고 매끄러워 수집품으로도 손색없는 회색의 돌.

고운 미간을 구긴 폰투스는 조약돌을 힘주어 눌러보았다.

괜한 짓 했다 싶게…… 단단했다.

그냥 돌인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열도 가해보았다.

탐구해 본 사람 민망하게 뜨끈해지기만 할 뿐 어떤 반응도 일지 않았다.

그래도 기다려봤으나 잠잠하기만 했다.

별거 아니면 희소식이 아니던가.

한데도 폰투스는 그냥 평범한 돌이란 사실에 되레 당황스러워졌다.

계획광인 이안이 아무 생각 없이 뭔가를 한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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