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흠.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돌인데…….”
“저것들이 제일 많이 공격하는 산자락 쪽에 박힌 것도 똑같았어.”
“특이점이 없단 말이지?”
“응. 멜러니 네가 몇 번이나 확인해 보래서 살펴봤는데 딱히.”
돌이나 던지려고 마력을 낭비한다고?
폰투스는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끔벅거렸다.
여러 가지 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상황에 왠지 뇌 회로가 꼬이는 것 같았다.
입술을 잘근 씹은 폰투스는 생각을 정리하려 친위대에게 현 상황을 되물었다.
“정찰조는?”
“마지막 정찰조가 아직 안 왔는데 곧…….”
친위대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
“아, X발.”
산자락 쪽으로 정찰 나갔던 살리카가 절뚝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이서 조를 이뤄갔는데…… 귀환한 건 두 명뿐이었다.
“기습당했다.”
“기습?”
“동쪽 끝에서 잠복하고 있더라고.”
“흐음……. 돌을 던지면 우리가 확인해 볼 것을 알고서.”
“기어 올라와 봐야 지들만 손해를 보니 끌어내리려는 수작이라니까.”
“유인이라.”
전력을 잃은 건 아쉽지만 이안의 목적은 확인한 셈이었다.
유인책으로 A반의 인원을 조금씩 줄이려는 것.
결론이 났음에도 폰투스는 묘하게 찜찜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뭔가 노림수가 더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뭘까.
고민해본들.
이 자리에서 해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 폰투스는 지금 해야 할 것에 비중을 두고 바로 명령을 내렸다.
사근사근 돌려 말하는 예전의 화법은 버린 지 오래였다.
“정찰은 됐어. 지금 하는 공격들도 멈추고.”
“그럼 이제 뭐 하려고, 멜러니?”
“일단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 저런 식으로 설치면 금방 마력 고갈이 일어날 거야.”
“아. 그때까지 기다리자는 거지?”
“우리는 느긋해도 손해 볼 게 없어. 여기에만 있으면.”
“그렇지. 저것들이 산꼭대기까지 기어오지 않는 이상은.”
“그러니까 때만 맞추면 돼. C반 진영으로 가서 깃발을 불태워버릴 수 있는 때.”
“오오. 걔들 속수무책이겠는데?”
“탁 트인 지형이라 처음 수만 잘 놓으면 그 뒤는 어려울 거 없어.”
“역시 버러지는 버러지답게 바닥에 처박아야 제맛이지.”
이거야말로 A반이 고대하는 최상의 결과였다.
활기를 띠는 A반을 두고 폰투스는 조약돌을 문질렀다.
뭔지 모르겠지만…… 자꾸 뒷골이 당기며 서늘해졌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 분명 그랬다.
.
.
.
폰투스의 찜찜함이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듯.
파직. 파지직.
암벽 표면에 박힌 조약돌에서 샛노란 불꽃이 일었다.
정말 유심히 봐야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채도.
그래서인지 불꽃은 폰투스 쪽이 깔아놓은 불길에 가려져 완벽히 은폐되었다.
* * *
타닷. 타다닷.
익막을 펼친 날다람쥐 한 마리가 암벽을 재빠르게 올랐다.
조그마한 몸집에 더해진 광속.
날다람쥐는 번개 정령이라도 된 양 쏜살같이 내달리다 뭔가를 내뱉었다.
푸슉.
허공을 가르며 암벽에 박히는 것은 회색 조약돌이었다.
돌을 암벽에 박아넣기.
이 작업은 날다람쥐의 동선을 따라 내리 이어졌다.
열일하는 날다람쥐 옆.
[오호, 고놈 참 날래기도 하다. 제 주인인 올리브를 똑 닮아선.]
녹스가 날다람쥐에게 보호막을 씌워주다 수선을 피워댔다.
날다람쥐가 하는 짓이 정말 야물었다. 제 마음에 쏙 들 만큼.
그 주인도 퍽 성에 차더니 이 녀석도 매한가지였다.
예뻐 보이면 물 먹는 모습만 봐도 좋다지 않던가.
극호라서, 녹스는 불길의 침입을 막는 보호막을 짱짱하게 씌워주었다.
[척척이야, 척척.]
[뀨.]
[그래도 불길에 오래 머물러선 안 된다. 작업하던 다른 정령들은 다 돌아갔으니, 핵 몇 개만 더 박고 돌아가자꾸나.]
[뀨뀨.]
핵을 박는 날다람쥐와 보호막 담당인 녹스의 합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리고 이들과 결속을 맺은 결속자들 역시 마찬가지.
이안과 올리브는 멀찍이서 정령들을 움직이며 돌산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이 작업도 얼추 끝난 것 같다. 날다람쥐가 가지고 간 게 마지막이니까.”
“이제 산화초 기름에 담가놓은 핵은 다 썼어.”
“그럼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이안의 중얼거림에 ‘그래도 되겠다.’라고 답해주듯.
[이안, 우리 다녀왔다. 똘똘한 저놈 덕분에 작업이 수월했구나.]
녹스가 날다람쥐와 함께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왔다 갔다 암벽에 핵을 박는 단순 작업일 뿐인데 꽤 재밌었나 보다.
녹스의 꼬리가 활어처럼 끊임없이 팔딱거리고 있었다.
-열일하셨습니다, 스승님.
이안은 녹스에게 칭찬의 의미로 눈깔사탕을 던져주었다.
역시.
마음을 전할 땐 백 마디 말보다 반짝이는 물건 하나가 최고다.
제 칭찬은 땅바닥에 툭 떨어진 반면 사탕은 귀신같이 녹스의 입으로 들어갔으니까.
사탕 껍질보다 못한 존재감이라니.
이안은 녹스의 빵빵한 볼따구를 보며 입매를 끌어올렸다.
-한데 스승님, 아시지요.
[응? 무얼 말이냐.]
-맛있는 만큼 그에 따른 정보는 뱉으셔야지요.
[어허. 지금 막 빤 사탕의 단맛이 아직 목구멍을 강타하기도 전이거늘.]
-아, 예. 이 불초한 제자가 성급하였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그만.
[커흠.]
녹스가 보란 듯이 짭짭대며 사탕을 입안에서 굴렸다.
한동안 입을 안 열 것 같더니, 이내 녀석이 사탕값은 치르겠다는 식으로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암산에 박힌 핵의 상태가 궁금한 게지?]
-어. 색깔이 어떻게 됐나 싶어서.
[조금 전에 박은 거 빼곤 대개가 요 사탕만큼 투명해졌더구나.]
녹스는 목격한 것을 빼놓지 않고 이안에게 고대로 옮겼다.
[그리고 기운이 세찼다. 핵 안에 스민 산화초 기름이 정신없이 휘몰아치고 있어서.]
-아, 그 정도 단계까지 왔다면.
더 볼 것도 없었다.
여태껏 뿌려놨던 것을 거둘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다.
이안은 어둑해진 사위와 또랑또랑한 아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기세가…… 철근도 씹어먹을 정도였다.
시야가 좁아지는 저녁 무렵인데도 훤히 보이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였다.
하긴.
오로지 이때만을 위해 달려왔으니 그럴 만했다.
기운이 탱천한 아이들을 독려하듯 이안은 희소식을 전달했다.
“이제 마무리에 들어가도 되겠다.”
“와아, 드디어 끝장을 보는구나.”
“그러게. 결실이 코앞이다.”
아이들은 한껏 들떠 서로의 등을 툭툭 쳐댔다.
서로 격려도 하고, 정령의 상태도 확인하고.
공격에 들어가기 전에 각자 능숙하게 마지막 점검까지 끝마쳤다.
‘그럼 나도.’
이안 역시 점검해봐야 할 사안이 있었다.
“B반을 보러 간 정찰조에게서 연락 왔어, 오스틴?”
이안은 정탐 담당인 오스틴을 보며 차분히 물어보았다.
저에게 질문해줄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오스틴이 바로 즉답했다.
“응. 조금 전에. 그렇지 않아도 이안 너한테 말할 틈을 보고 있었어.”
“아, 뭐 하고 있대?”
“지금 자기 진영의 방어진 구축하느라 정신이 없대. 아예 이쪽으론 관심을 안 둔다던데.”
“그렇단 말이지.”
“아무래도 1차전은 그냥 눈치만 보고 가만히 있을 심산인 것 같아.”
“흠. 끼어들지 않으면 결국 중간은 가니까 그걸 노리고 있는 거네.”
“그런 것 같더라고.”
“다음을 위해 전력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1차전을 포기하고 2차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남은 시합만 잘 치른다면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을 테니까.
B반의 의중을 확인한 이안은 더 지체하지 않았다.
이쪽 역시 핵의 상태를 고려한다면 미적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얘들아, 마무리 짓자.”
“좋지. 한바탕 신나게 놀아봅시다.”
“그럼 불놀이 한판 거하게 해보실까.”
아이들의 대답은 똑 부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퍼뜩 ‘다 컸구나.’라는 생각이 이안의 뇌리를 스쳐 갔다.
장성한 아들을 둔 아버지가 할 법한 생각 아니던가.
찰나의 단상이 웃겨서 이안은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절대 느슨해질 수 없는 상황임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가 실실거리자 영문도 모르면서 아이들 또한 히죽거렸다.
하여튼 저 따라쟁이들.
아주 잠깐, 한껏 풀어진 느슨함이 떠돌았지만 체류는 짧았다.
이안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A반 본진으로 향했다.
도착한 즉시였다.
꼭대기에서 이쪽을 쳐다보던 A반이 여지없이 조소를 보내왔다.
‘왜 또 쬐그마한 돌 던지시게? 어디 맘껏 해보셔.’
라는 낮잡음과 함께 던져진 방심의 표정.
그에 이안은 우리 노는 거 실컷 보라는 양 고개를 건들하게 짓쳐 들었다.
그럼과 동시에였다.
콰과괏.
발리올들이 일제히 땅을 내려치고는 돌산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쪼갰다.
분명 발밑을 쳤는데…….
흙덩이 포탄들이 생성된 건 돌산 근처였다.
쇄애애액.
기세가 등등한 포탄들은 일제히 암벽을 향해 쇄도했다.
그것은 산의 표면, 정확히는 나무 정령의 핵에 꽂혔다.
공격을 받자 즉각 반응이 일었다.
정령핵에 금이 가며 파지직 마찰 전기가 생겨난 것이다.
핵에 알 수 없는 변화가 인 그때였다.
“발리올들한테 맡기고 구경만 할 거야? 우리도 공격하자.”
레브가 호승심 어린 목소리로 루하흐들을 흔들었다.
아군이지만 발리올에게 지기 싫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녀석의 채근에 퍼뜩 정신을 차린 루하흐들은 눈짓을 교환했다.
약간은 짓궂은 시선들이 오간 뒤였다.
쏴아아아악.
루하흐의 정령들이 결속자들의 뜻에 따라 한데 모여들었다.
그러더니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며 해일을 일으켰다.
해일은 곧바로 돌산을 향해 거칠게 내달렸다.
흡사 질주하는 치타 같았다.
거침없이 나아간 해일은 전방에 가시를 쏘아 보냈다.
기백의 가시 역시 나무 정령의 핵에 푹푹 박히며 균열을 일으켰다.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콰아아앗.
이에 핵 안에 있는 산화초 기름이 격하게 소용돌이쳤다.
사방으로 분출되려는 꿀렁거림.
급기야 쩔걱쩔걱 소리를 내더니 마찰 전기를 연거푸 일으켰다.
그 현상이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열 번이 되어 중첩되자…… 그것을 견디지 못한 핵이 결국 폭발해버렸다.
퍼버벙.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가 터지자 연쇄적으로 공격을 받은 정령핵이 줄기차게 터져나갔다.
“시원하게도 터진다.”
이안은 연쇄 폭발을 지켜보다가 입술 끝을 비틀었다.
산화초 기름을 흡수한 나무 정령의 핵.
핵은 불에 닿으면 서서히 융합이 분리되면서 기름이 팽창하게 된다.
한계가 없이 부푼 그것에 충격을 가하면 어찌 되겠는가.
터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폭발은 예술이지.”
이안의 감탄에 이어진 꼬리라도 된 양 굉음이 뒤따랐다.
거대한 돌산이 연쇄 폭발로 인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쩌걱. 쩌거거걱.
산의 왼편부터 시작된 와해는 균형을 깨트렸고, 그 여파로 견디지 못한 다른 쪽도 금세 영향을 받았다.
“다들 폭발의 여파에 휘말리지 않게 거리를 벌려.”
종국엔 이안의 외침을 집어삼키며 돌산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빠르고 가파른 붕괴였다.
이를 A반이 예측하고 대비했으랴.
“우아아아악!”
어느 것 하나 예상치 못한 살리카들은 우박처럼 떨어지며 비명을 질러댔다.
듣기 좋은 곡소리였다.
아름다운 불협화음과 함께 깃발도 전부 불타버렸다.
볼만한 광경에 풍성함을 덧바르려는 걸까.
펑. 퍼어엉.
핵에서 쏘아진 샛노란 불꽃이 밤하늘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살리카의 패배에 종지부를 고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