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31화 (131/214)

제131화

‘방어 쪽에 총력을 기울였다더니 과연.’

이안은 널따란 인공 호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분명 언덕이었던 지형이 한나절 만에 호수로 바뀌어 있었다.

중앙에 있는 외딴 섬, 애초 B반이 선택했던 본진을 에워싼 채로 말이다.

이런 지형을 만들어냈으니 1차전 내내 코빼기도 안 비칠밖에.

“고생 꽤나 했겠는데?”

“아, 언덕 주변의 땅을 꺼트려 물을 채우느라 그게 조금?”

이안이 계속 호수를 보고 있자, 에이프릴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괜스레 쑥스러워졌다.

나름 머리를 굴려 인공 호수를 만든 건데, 매번 기지가 넘치는 이안 앞에 내보이려니 뭐랄까.

초짜가 숙련된 교수에게 연구 논문을 내미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이안은 명화 감상하듯 꽤 유심히 지형을 살펴보았다.

B반의 언덕과 C반의 평지.

결과적으로는 둘 다 방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단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인즉.

고로 언덕의 인공 호수화는 에이프릴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볼 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자세히 봐.”

“잘 만들었으니까.”

“흠흠. 까다로운 감독관한테 인정받은 것 같아서 왠지 기분이 좋다.”

에이프릴은 개구진 표정으로 홍조가 어린 볼을 긁적거렸다.

“일단은 본진에 들어가자. 거기 가서 얘기하게.”

“적진에 초대하는 건가?”

“기꺼운 마음으로.”

“미인이 가자고 한다면 어디든 못 갈 것도 없지.”

“훗. 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말에는 설렌다. 그럼 어디든 따라오신다니 호수 중앙까지 가는 길을 한번 만들어 볼까.”

농담에 더 가벼운 농담으로.

에이프릴이 장난기 넘치게 응수하며 발을 약하게 두어 번 굴렸다.

그녀의 발이 내는 경쾌한 진동을 따라 호수에 징검다리가 생겨났다.

촤락. 촤라락.

꽃잎 형태의 디딤돌이 비단을 풀어놓은 양 유속에 맞춰 너울거렸다.

그 형태로 인해 붙은 이름.

‘비단 걸음.’

물이 있는 곳에 한해서 시전자가 원하는 곳에 발판을 생성해내는 기술이다.

통상적으로 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방법은 탈것뿐이다.

아니면 통째로 얼려버리거나 바다 자체를 메워버리던가.

대체로 아는 방법은 그렇지만 그 외의 방법이 있다면 바로 비단 걸음이다.

‘예전엔 지겨울 정도로 참 많이 봤었지.’

슈튼하노버 가주를 통해서 말이다.

가주의 비단 걸음으로 전쟁 중에 빈번히 물자를 수송했었다.

우회해서 가야 하는 길도 가로지를 수 있다는 이점 때문.

이는 시간을 단축했을 뿐 아니라 아군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됐었다.

보급품이 제때 도착한다는 것, 이는 전력이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거니까.

그렇기에 비단 걸음의 시전자는 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슈튼하노버 가주도…….

이안은 물길을 천천히 밟으며 과거를 상기하다 돌연 걸음을 멈췄다.

“꽤나 유용해서 비단 걸음을 좋아했었는데.”

“응? 이걸 자주 봤어?”

“자주. 고지식한 누군가가 죽기 전까진.”

“…….”

이안은 고지식한 누군가와 겹쳐 보이는 에이프릴을 응시했다.

누가 부녀 아니랄까 봐 정말이지 많이 닮았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매부터 단정하고 우아한 얼굴선까지.

그 얼굴에 끌려가듯 과거가 자꾸 아른거렸다.

<내가 죽인 겁니다, 그 아이를. 가엾은 에이프릴 그 아이를 이 못난 아비가.>

<결혼하라고 떠밀지만 않았어도 그 아이가 에루리안으로 갈 일은 없었을 거고, 그러면 그런 일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가주의 회한은 대의 때문에 놓쳐버린 자신의 딸이라, 종종 그 얘기를 하곤 했더랬다.

얼큰하게 취했다 하면 늘 그랬다.

‘미안하구나.’라는 말을 되뇌면서 울곤 했었다.

이미 죽고 없는 자식에게 건네는 사과라 무의미했지만.

그리고 안타깝게도 회한을 남긴 과거는 현재에도 다시 되풀이되고 있었다.

가주가 회귀하지 않은 이상 변한 건 없을 테니까.

아마 이대로라면 가주의 마음을 에이프릴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어렵네, 어려워.’

부모 자식 간이건 뭐건 사람의 관계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자칫 잘못 꼬이기라도 하면 풀길이 없어지니까.

그에 대해 생각하며 과거를 따라 한참 떠내려가길 얼마쯤.

“……이안.”

이안은 저를 부르는 에이프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다가 끊긴 대화에 관해 의문을 품고 있는 목소리.

그게 보였지만 저만이 알고 있는 일인데 무어라 대꾸를 하랴.

너의 아버지가 실은 이런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하랴.

무엇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게다가 회상 좀 하다 보니 어느샌가 섬에 도착해 있었다.

말을 돌릴 수 있는 적기지 않던가.

이안은 아른거리는 과거를 잘라내며 수풀 무성한 섬에 한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짓궂은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초대하고 끝? 미인의 안내는 더 없는 건가.”

“아…… 이쪽으로. 다 같이 저녁 먹고 지금 중앙에 모여있어.”

에이프릴은 능청 떠는 이안을 한번 쳐다보곤 앞서 걸었다.

말을 돌리려는 기색이라 굳이 캐묻지 않았다.

필요한 얘기였다면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조용히 걷는 에이프릴의 곁.

이안은 나란히 보폭을 맞추면서 나아가다 느린 걸음을 멈춰 세웠다.

모닥불 주위에 모여있는 B반이 시야에 잡혔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들의 기류가…….

‘미묘하군.’

의가 상한 형제처럼 오른편과 왼편이 극명하게 갈린 채 대치하고 있었다.

그중 꼬름한 오른편.

그들은 저를 보자마자 흘겨보며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반면.

따뜻하고 목 좋은 왼편을 차지한 이들은 그를 반기며 눈인사를 건넸다.

그 안에는 신뢰가 듬뿍 담겨 있었다.

두 무리의 반응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잠깐만 봐도 모를 수 없는 터라 에이프릴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보면 알 거야.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갈린 건가?”

“본진을 호수로 만들 때까지는 합심했는데, 이후 어떻게 할지 대책을 논의하면서 의견이 좀 갈렸어.”

“저쪽은 폰투스에 붙자는 쪽이겠군.”

“응.”

에이프릴의 이맛살을 잔뜩 구기게 만든 상황이 이안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폰투스의 골수파였던 자들이 폰투스를 두둔했겠지.

참 어리석었다.

이제는 저들도 자신이 뜯어 먹힌다는 걸 알 텐데 아직도 폰투스에게 붙어있으려 하다니.

대체 무슨 미련이 남아선.

기어이 골수까지 쪽쪽 빨려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보다.

이안이 B반의 분위기를 살피는 동안 에이프릴이 먼저 운을 뗐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진지하고 강단 있는 말투였다.

“대충 짐작했을 거야.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네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내가 하려는 말이 뭔지 말이야.”

“음.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네.”

“맞아. 우리 동맹 맺자. 배신하지 않고 신의를 다할게.”

* * *

“망할 자식.”

거친 말투를 내뱉은 그림자는 동굴 안을 서성거렸다.

괜히 그러다가 또 누군가를 찾듯 고개를 빼꼼 동굴 밖으로 내밀었다.

그림자가 찾는 사람은 터럭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대신 컴컴한 사위를 뚫고 하늘로 치솟는 폭죽이 보였다.

C반의 승리를 축하하는 그것.

“또 뭔 일을 시키려고 이 시간에 불러선.”

불퉁한 그림자는 폭죽을 올려다보며 연신 투덜거렸다.

계속 꿍얼거리자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등장했다는 것처럼 곧장 뒷말이 따라붙었다.

“어후야, 밤에 보니 밀회 장소가 참.”

능글거림을 기본으로 깐 나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호리호리한 체형에도 존재감만은 묵직한 누군가.

‘저 새끼는 갈수록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

“무슨 공동묘지처럼 으스스하다. 안 그러냐, 트란 카스티야.”

“……이안 네놈이 골라놓고 왜 나한테 따지고 그러냐.”

“눈치 없는 새끼.”

“뭐?”

“내가 그렇다고 하면 맞장구칠 줄도 알아야지 꼭 사실을 말하고 그래. 넌 사회생활 하기 글렀다.”

어디서 악담을.

인상을 구긴 카스티야가 반론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 이안이 선수를 쳤다.

“아, 변명은 됐고. 폭죽 봤냐?”

“봤으면.”

“부러워 미치겠지. 내 천재성을 화려하게 뿌려주는 저 불꽃을 보니까.”

“미친.”

“좀 전까지 넋 놓고 구경하는 거 다 봤는데, 아닌 척하긴. 자, 당사자가 왔으니까 어서 해봐. 그 찬양 친히 들어주지.”

저 새끼를 그냥.

카스티야는 치솟는 혈압에 뒷골이 당기는 것 같았다.

어디 한두 번이랴.

만날 때마다 저놈이 가진 지옥의 혓바닥은 사람 심사를 다양하게 뒤집는다.

이제는 일일이 대거리하기도 피곤했다.

그저 카스티야는 주름이 팬 미간에 손을 가져다 댈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제가 가만있다고 가만있을 놈이던가.

이마를 짚은 제 팔에 눈길을 둔 채로 이안이 재차 입을 놀렸다.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건지.

“그나저나 카스티야 넌…….”

“왜, 또. 그딴 한심하단 눈빛으로 쳐다보는 건데.”

“아니. 돌산이 무너진다는 걸 알려줬는데도 팔이 부러지고 그러냐.”

“네가 그깟 것 좀 가르쳐줬다고 이 정도도 안 다치면.”

카스티야는 이제 막 치료가 끝나 통증이 남은 오른팔을 내밀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넝마가 된 옷이 팔락거렸다.

“돌산이 무너지는 걸 미리 알고 있었어요, 동네방네 떠드는 꼴밖에 더 되냐?”

“사서 고생이다. 그러라고 한 적은 없는데.”

“참나.”

“하여간 미련해요. 안 들키려고 위장을 몸으로 때우다니. 굳이 안 다쳐도 되는걸.”

“…….”

어쩐지 약간 걱정하는 말투처럼 들렸다.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닭살이 돋은 카스티야는 인상을 확 구겼다.

걱정이라니.

이안 저놈이 그럴 리 없었다.

아무래도 폭발음을 하도 들었더니 귀가 잘못된 모양이다.

카스티야는 그렇게 단정 지으며 더는 생각을 잇지 않았다.

아니지.

남의 눈을 피해 만나게 된 용건이나 털어버리자는 생각을 했다.

선 보고하고 후 지시받기.

이안 저놈이 입을 열 시간을 줄이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이거면 빨리 헤어질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계산을 끝낸 뒤 카스티야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용건 듣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하자면, 폰투스의 수작질이 좀 덜 먹힌다. 예전과 달리.”

“흐음.”

“걔가 고름이 묻은 팔도 닦아주고, 음식도 손수 나눠주는데 영 반응이 미적지근해.”

“…….”

“그것이 위선을 떠는 걸 알아차린 건지, 어쩐 건지.”

카스티야는 미주알고주알 A반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책 한 권은 뚝딱 집필할 정도의 상세함이었다.

간간이 욕도 섞어가며 맛깔나게 보고한 뒤.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네 차례라는 식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뭔가를 생각 중인지 이안은 눈썹머리를 내려트리고 있었다.

“아, 이제 그걸 까발려.”

“그거?”

“폰투스에게 매혹의 정령이 있다는 거. 정신지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아아. 고작 이거 시키려고 날 여기로 부른 거냐?”

“그럼 네가 예뻐서 불렀을까. 특히 친위대한테는 빠트리지 말고 말해.”

“폰투스 일이라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놈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러겠네. 물론 내가 존나게 패버리면 그만이지만.”

“존나게 맞는 건 아니고?”

“야, 나 트란 카스티야야. 내가 이러고 있어도…….”

“왕년에 잘 나갔다는 말은 넣어두시고. 잘난 척은 네놈 얼굴에 난 멍이나 빼고 말해.”

“……아씨, 진짜 짜증 나네.”

이안 저놈을 만나고부터 되는 일이 없다.

다들 저만 보면 설설 기었었는데, 어쩌다 이 꼴이 된 건지.

카스티야는 원흉인 이안을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속으로만.

그런데.

“욕이 나올 정도로 날 찬양하고 싶으면 앞담으로 해. 내가 그런 거에는 또 너그러운 인간이거든.”

눈치 빠른 이안이 금방 속내를 읽어내며 소름 돋는 말을 해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