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넌 부끄럽지도 않냐?”
“뭐가.”
“네 입으로 너에 관해 잘난 척하는 거.”
“입 뒀다 뭐하게. 죽을 때 고이 가져가시게?”
“…….”
“사회생활 글러 먹은 애송이 널 위해 한마디 하자면. 세상만사 모든 일은 왼손이 모르는 일도 오른손이 알게 해야 법이란다.”
“뭔 헛소리냐?”
“내가 하는 일을 세상이 알게 떠들어야 한다는 거지. 겸양, 겸손? 그딴 거 떨어봐야 금화 한 닢 안 떨어진단 얘기고.”
이안은 여러모로 직계답지 않았다.
그간 카스티야가 보아온 직계는 그랬다.
‘나 잘났음’을 얼굴에 깔고 있으면서도 재수 없는 겸손을 떨어댔다.
어차피 칭찬과 추앙은 옆에 있는 수족이 해줄 걸 아니까.
고상한 척 굴며 위선을 떨어대는 게 직계들인데, 그런 놈들과 비교하면 이안은 뭐랄까.
수족이 대신할 역할까지 혼자 다 해 먹는다고 해야 하나.
생각이 길어지며 빤히 보는 시간이 늘자 이안이 어깨를 들어 올렸다.
“열렬한 시선은 나중에 네놈 애인이 생기면 보내시고.”
“누가 열렬하다고…….”
“무튼 내일 이름표 뜯기도 적당히 해. 다치지 않는 선에서.”
“하! 다치지 않는 선에서 눈치껏 같은 편 것 좀 떼라? 빤한 얘기를 고상하게 돌려 말하시네.”
“내가 한 고상하지.”
저게 끝까지.
카스티야의 안광이 형형해지자 이안이 뭔가를 그에게 던졌다.
날아오니까 반사적으로 받았다.
받고 보니까…… 호랑줄무늬 물고기의 비늘로 만든 보호부였다.
3성 이상의 차이가 나는 공격도 단 한 번, 완벽하게 막아주는.
“그건 보상.”
“내가 개냐? 번번이 이딴 거 던져주면서 부려 먹게.”
“아이고, 믿음직하다. 제 팔까지 바쳐 임무를 수행하는 세작이 옆에 있어서.”
저 주둥이를 막을 방법은 역시 죽이는 것뿐이다.
슬쩍 그런 생각이 카스티야의 뇌리를 후려치자, 이안이 손을 건성건성 흔들었다.
“할 말 끝났으니 이제 찢어지자.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건 혼자 있을 때, 마저 하시고.”
내내 속을 읽어내더니 지체하지 않았다.
이안은 말꼬리가 채 끝나기도 전 ‘간다.’라는 말을 하곤 동굴을 나섰다.
언제나처럼 건조한 뒤태에는 여유가 묻어나왔다.
처음 봤을 땐 줄곧 저 등이 무척 절박해 보였었는데…….
‘아니, 지금도 그런가.’
분명코 여유는 생긴 것 같으나 하는 행동은 예전과 똑같았다.
오늘만 봐도 그랬다.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한데도 이안은 쉬지 않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
오로지 파라칸시스의 우승 하나를 위해.
정정해야겠다.
고작 비루먹은 변방 아카데미의 시합에서 우승하기 위해.
다 가진 직계가 무엇이 아쉬워 저렇게 구는 걸까.
무엇이 간절해서 생을 태우듯 자신을 채근하는 걸까.
궁금증이 치민 카스티야는 보호부를 꽉 쥐며 이안을 불러세웠다.
“야, 뷔트시겐.”
“……왜.”
돌아보는 이안의 얼굴이 서늘해서 카스티야는 벌어지던 말문을 도로 닫았다.
대체 뭐라 묻는단 말인가.
다 가진 놈이 왜 버림받은 우리랑 똑같이 구는 거냐고 물어야 할까.
“하아…….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나한테 이딴 건 왜 주는 거냐.”
“보상이 보상이지 뭐.”
“아씨. 너 나 싫어하잖아. 그냥 부려 먹으면 되지 자꾸 이딴 걸 왜 던져주냐고. 짜증 나게.”
“내 감정과는 별개지. 싫어하는 부하 놈이라도 일을 잘하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래야 오래 부려 먹을 수 있으니. 일종의 투자 같은 거려나.”
“……참 직계다운 이기적인 생각이다.”
이안에게서 느꼈던 위압감의 정체가 이것인가 보다.
저는 그렇게 여겼는데.
“하하핫. 직계다운……. 카스티야 넌 나보고 직계답다고 하네.”
이안의 언사에 카스티야는 별 싱거운 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얼굴을 했다.
핵이 없던 반푼이 시절에도, 지금도, 이안은 뷔트시겐의 적자이며 직계였다.
당연한 명제인데.
꼭 다른 누군가에 의해 부정당해본 것처럼 군다.
그럴 인간이 누가 있다고.
해서 카스티야는 이안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저를 두고 메마른 웃음을 보인 이안은 도로 갈 길을 갔다.
네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꼴을 하고선.
카스티야는 그 걸음을 붙잡지 못한 채 정작 물어보고 싶던 것을 삼켰다.
저놈이 간절한 이유를 알아 뭐할까.
어차피 지금처럼 평생 가는 길이 다를 텐데 말이다.
멀어지는 이안을 응시하길 한참.
놈이 사라진 방향과는 정반대로 카스티야는 미적미적 걸음을 뗐다.
* * *
이안은 전방에 있는 장대하고 길쭉한 협곡을 살펴보았다.
파라칸시스의 2차전이 열리는 곳.
하여 파라칸시스 협곡이라 불리는 이곳은 지형이 꽤 험준했다.
‘경사면이 거의 직각이네.’
협곡 양옆으로 갈라진 경사면은 깎아지를 듯 가팔랐다.
뿐만 아니라 뾰족한 돌기들이 면 전체에 촘촘하게 나 있었다.
돌기 하나하나가 바늘처럼 어찌나 날카롭게 박혀있는지.
그만으로 절벽의 가파름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뿐이랴. 그걸로도 모자라.
절벽 위쪽 끝부분은 돌돌 말아진 채 기괴하게 휘어져 있었다.
전반에 걸쳐 위로 기어 올라가기는 힘든 구조.
지형을 둘러보던 이안은 시선을 A반에게로 돌렸다.
여전했다.
폰투스를 중앙으로 놓고 말없이 이쪽을 직시하고 있었다.
다만 여느 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친위대 옆에 서른 남짓한 B반 아이들이 고목 나무에 붙은 매미라도 된 양 찰싹 붙어있다는 거였다.
기어이 폰투스 추종자는 제 주인을 찾아갔다.
실컷 보라지.
이안이 비소를 날리고 있는데 마침 이 분위기에 기름을 부을 인물이 등장했다.
“이안.”
에이프릴이 B반을 이끌고 이안 쪽으로 다가온 것이다.
어제처럼 단호한 몸짓이었다.
에이프릴이 나타나자 대번에 폰투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네.”
“응. 함께 해봐야 배신만 할 테니까 그냥 내보냈어.”
“굳이 그런 것들까지 이고 갈 필요는 없지.”
적이 될 아군보다 믿음직한 소수가 나았다.
쪽수가 A반 쪽으로 확 기울며 증식한 것도 아니니 뭐.
이안은 개의치 않고 아이들을 향해 차분하게 운을 뗐다.
“조금 있으면 2차전이다.”
“그래서 작전은?”
레브는 이안의 의중을 확인하려고 질문을 던졌다.
결코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도, 그저 떠먹여달라는 채근도 아니었다.
질문을 한 건 이안이 연합조의 대장이었기 때문이다.
일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 대장의 의견은 꽤나 중요하다.
무리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에.
질문의 의도를 아는 이안은 레브를 힐끗 보곤 말문을 열었다.
“작전은 간단해.”
이안의 한 마디에 주변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C반은 물론 에이프릴을 비롯한 B반 전부 이안을 응시했다.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집요한 시선.
이에 이안은 차분히 입을 떼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어느 한 지점에 점을 찍는 동작이었다.
“여기가 우리의 시작 지점.”
이안은 손가락을 미끄러트리듯 옆으로 그었다.
“물론 A반의 시작 지점도 우리와 같지.”
A반을 가리켰던 손을 위로 그으며 올라가자, 모두의 시선이 따라 올라갔다.
동시에 움직이던 시선과 손은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여기가 도착 지점. 이 시합의 핵심은 결국 이곳, 결승점이야.”
“그렇긴 하지. 이름표 떼기라고 하지만 종착지에 도착하는 게 최종 목표니까.”
레브가 동의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기다 최대한 많이 생존해야 하고, 제한 시간이 있으니까 빨라야 하지.”
“그래야 승리할 수 있는데……. 종착지에 무조건 빨리 도착하는 게 이안 네 목표는 아닐 거 아냐.”
이안이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는 듯 레브가 머리통을 살살 흔들었다.
“이안 네가 A반의 숫자를 줄일 절호의 기회를 버린다고?”
“이 기회를 놓치는 건 등신이지. 오늘을 놓치면 내일 타격을 입을 텐데.”
“그렇지. 그때쯤에는 어제 부상을 입었던 놈들도 얼추 회복될 테니까. A반의 전력이 보충되겠지.”
“그러니까 작전은 간단해. 직진.”
“직진?”
“어. 출발 지점에서 종착지까지 무조건 밀고 나갈 거야.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A반은 닥치는 대로 탈락시킬 거고.”
“그러려면 한데 뭉쳐서 가야 한다는 거네.”
“어.”
“그런 진형은 오히려 우리 쪽의 피해가 커질 수 있을 텐데. 한데 뭉쳐 있으니까.”
레브의 반문에 이안은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양 즉답했다.
“그래서 루하흐의 역할이 중요해. 우리 진형을 원으로 놓고 보자면 루하흐가 정중앙이야. 루하흐를 발리올들이 감싸 보호할 거고.”
이안은 쉬지 않고 설명했다.
“이름표가 안 보이게 루하흐가 있는 안쪽으로 등을 두고, 막지 못한 공격은 몸으로 받되 절대 진형을 이탈하지 마. 루하흐를 믿고 나가자는 거지.”
“아, 한 마디로 좀비가 되겠다는 거네. 무한 치유로.”
“어. 정리하자면 공격은 앞뒤 잴 것 없이 매섭게, 이동은 일사불란하게, 종착지까지 누구보다 빠르게.”
“그러고 나면?”
“결승선 근처에 도착한 뒤엔 A반을 기다려야지.”
“그것들이 통과 못 하게?”
“어. 제한 시간 직전까지 하나라도 더 잡다가, 종료 직전에 결승선을 밟으면 돼.”
“무식한 작전이다.”
“어차피 난전은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 봐야 소용없어.”
불규칙이 도리어 규칙인 게 난전이었다.
이것저것 제약을 걸어봐야 개싸움이 되는 순간 모두 휘발되어 버린다.
규칙도, 상대도, 심지어 자신이 뭐 하고 있는 지도.
이안의 단호함에 홀린 모양인지 아이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작전인지 다들 이해했지?”
“이해했어.”
“마지막으로 하나 더. 변수가 생겨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 내가 전방위로 살피면서 대처할 테니까.”
이게 촉매제가 된 모양이다.
여태 조용히 듣던 아이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떠들었다.
“우리 대장 바쁘겠다.”
“언제는 안 그랬냐. 우리 때문에 맨날 고생하지.”
“그러니까 잘해. 괜히 느그작거리다 A반한테 덜미 잡히지 말고.”
마구잡이로 떠드는 아이들의 대화를 이안은 잠시간 지켜보았다.
수다를 떨며 긴장을 덜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안은 아이들이 조금 느슨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계획을 머릿속으로 재차 점검했다.
변수는 없어야 한다.
아니. 있더라도 예측한 범위 내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아무도 다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안은 몇 번이나 계획을 확인한 후 전방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저 멀리, 2등신의 희끄무레한 물체, 감독관이 위아래로 통통 튀면서 소리를 크게 냈다.
삐이이.
곧 2차전이 시작될 테니 다들 모이라는 신호였다.
* * *
‘폰투스가 안 보인다.’
이안은 살리카의 멱살을 잡아채 이름표를 뜯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빨간 머리카락들이 지천에 깔렸다.
그렇긴 한데, 정작 중요한 폰투스와 친위대가 없었다.
그것들은 어디로 갔는지 사방을 둘러봐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A반 저것들 치고 나가지 못하게 해!”
“야, 막앗!”
“서로 떨어지지 말고 방어선을 촘촘히 좁혀!”
연합조와 A반은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부딪혔다.
그 틈에 레브의 정령이 불 정령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려 얼음 가루를 날렸다.
대기의 온도를 낮추려는 것이다.
온도가 낮아지면 불 정령의 활동성이 떨어지니까.
이에 불 정령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화력을 최대한 올렸다.
대기의 온도를 놓고 부딪힌 그 사이.
크그긍. 크긍.
불 정령들을 가두려 사각의 돌벽이 여기저기서 무차별로 생겨났다.
정령들만 부닥쳤을까.
정령을 움직이는 정령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루하흐의 치유에 등을 맡기고 오직 공격만 하는 연합조.
연합조의 진형을 무너트리려 눈을 희번덕거리는 A반.
두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서로 주먹을 날리고, 급소만을 노려 타격해댔다.
일대일의 정정당당함은 없었다.
하나에 두셋이 달라붙어 발로 차고 머리로 들이박았다.
누군가가 엎어지면 일어날세라 득달같이 등짝의 이름표를 뜯어내고.
때때로 유치하게 이로 물어뜯기까지 했다.
진중하게 작전을 짠 것에 반해 완전 코찔찔이들 싸움이었다.
다들 정령을 위해 마력을 아끼고 있는 터라 모양새가 좀 웃기고 처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