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33화 (133/214)

제133화

이 와중.

이안은 상황을 냉정하게 살피며 다시금 A반을 훑어 내려갔다.

선두뿐 아니라 중반을 넘어서까지.

흙먼지가 일어 잘 보이지 않는 후미까지 살폈지만, 어렴풋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폰투스와 친위대 그 어떤 누구도.

그것들이 A반에서 가장 중요한 전력들인데 말이다.

바꿔말하면 이안이 중점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표적들이 사라진 것이다.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대체 어디로.’

본래 잔챙이 열 명보다 간부 하나를 죽이는 게 적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쉽다.

그러니 전장에서도 수장의 목부터 베지 않던가.

‘이를 폰투스가 모를 리 없을 터.’

하여 숨을 죽인 채 어딘가에서 몸을 사리고 있는 듯했다.

저와 친위대가 온전하다면 3일 차도 비벼볼 만할 테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결단코 쥐새끼처럼 숨어만 있진 않을 것이다.

분명 역전의 기회를 노리겠지.

이 판을 뒤집어서 승리를 낚아챌 기회를 말이다.

필시 어떤 꿍꿍이속이 있을 거라 안 보인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우선 폰투스의 동선부터 확인해봐야겠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터.

이안은 살리카의 정령을 송곳니로 찢어발기고 있는 사냥개를 불렀다.

-코르키.

[캬앙.]

-은신해서 살리카의 뒤편으로 가 봐. 식인 꽃 알지?

[크르륵.]

-어, 맞아.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서 못생긴 그 여자. 그 여자가 뭐 하는지 확인 좀 해줘.

[크륵!]

사냥개가 저만 믿으라는 양 대차게 울부짖었다.

그런 연후 스르륵 은신하더니 곧장 협곡의 가장자리에 달라붙었다.

신중한 자리 선점이었다.

대책 없이 달려나갔다가는 은신 감지에 걸릴 수 있음을 고려한 것.

만반의 준비를 마친 사냥개는 무리를 역행해 내달렸다.

흩날리는 은색 털이 실로 믿음직했다.

‘일단 사냥개가 돌아와야 상황이 파악될 테니까.’

폰투스에 관한 건 잠시 접어두어도 될 것 같았다.

이안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싶어 아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협곡의 선두는 결국 연합조가 차지했다.

길목을 막은 뒤 앞으로 나아가려는 살리카 무리를 순탄하게 제거하고 있고.

‘조금씩 숫자가 줄어들고 있군.’

이만으로도 현재까지는 계획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무엇이든 결론이 날 때까지는 장담할 수 없는 거니까.

이안은 녹스의 바람 깃털에 짜부라져 헐떡이는 살리카에게 다가갔다.

위협적으로 좁혀진 거리.

이에 ‘히이익’ 소리를 낸 살리카가 오지 말라는 듯 팔을 휘저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

히죽거린 이안은 발악하는 살리카를 살뜰히 매만지며 보란 듯이 이름표를 뜯어냈다.

무자비했다.

이안이 거칠 거 없이 살리카들을 뭉개며 협곡을 누비자.

“젠장! 막아. 무조건 이안만 잡아!”

“C반 저것들은 이안만 없으면 별거 아냐. 이안만 노려.”

“이안의 이름표만 뜯어. 그러면 끝나!”

살리카 무리가 이안을 에워싸며 질기게 들러붙었다.

승리고 나발이고 포기한 모양새였다.

오직 목표가 이안의 탈락이라는 듯 앞뒤를 재지 않았다.

후우우욱.

분노한 결속자의 뜻에 따라 슬라임 형태인 불의 정령이 입김을 크게 불었다.

허공에 생성된 불똥들.

그것을 식물 정령들이 점액질의 덩굴로 촘촘하게 감았다.

단단히 결합 된 불똥들은 기동성이 높아졌다.

파공음을 내며 횡으로 내려찍는 움직임이 어찌나 재빠른지.

이안이 불똥을 풍압으로 찢어냄과 동시에 측면에서 불똥이 연달아 파고들었다.

궤적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유연한 덩굴이 불똥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터라.

[이안, 식물 정령을 상대할 땐 땅의 울림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짓쳐 오는 불똥을 녹스가 수호 방패로 막아낸 즉시.

콰과과괏.

이안의 뒤에서 덩굴들이 지면을 뚫고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식물 정령은 이래서 까다롭다.

자신의 근원인 대지가 있는 한 어디든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서.

“여러 가지 속삭임이 겹쳐져 분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네.”

이럴 바에야 한 방에 쓸어버리는 것이 효율적일 터.

이안은 녹스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휘도는 바람을 한데 모았다.

혼자보다는 역시 둘이었다.

잔잔한 미풍이 순식간에 강풍이 되어 쩌렁쩌렁한 포효를 내질렀다.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에 너나 할 것 없었다.

사위가 일순 정지 상태가 되었고, 휘청거리던 덩굴들은 자기들끼리 대차게 꼬였다.

풀 수 없게 엉켜선 마구 충돌하더니 이내 불똥이 사그라져갔다.

불씨만 남은 불똥들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사이.

“죽어, 이 새끼야!”

이를 악문 살리카가 산성액을 휘감은 팔을 이안에게로 내질렀다.

왜 매번 나쁜 놈들의 대사는 전형적일까.

어디 모여서 이런 식상한 말을 하자고 담합이라도 하나.

“내가 아직 새파랗게 어려서 죽어주긴 좀.”

이안은 바람을 구불구불하게 말아 살리카의 팔에 흡착한 뒤 힘을 주었다.

“끄아아악!”

팔이 으깨지는 고통에 내지르는 비명의 틈바구니.

타다닷.

살리카 여럿이 질주하며 일제히 불의 검을 휘둘렀다.

사선으로 내려긋는 검을 이안이 막아내자, 녹스가 노란 발로 살리카의 등을 후려쳤다.

매서운 일격에 등뼈가 아작 난 살리카가 픽 고꾸라졌다.

“크억!”

또 하나 가셨고.

즉각 이안은 오른편 살리카의 발등을 찍으며 11시 방향의 놈에게 흙을 뿌렸다.

굵은 흙이 눈에 들어가자 살리카가 비틀거렸다.

“큭. 비겁한 새끼!”

“비겁한 게 어딨어. 누차 말했을 텐데. 이기면 장땡이라고.”

살리카의 욕지거리에 이안은 조소를 날리며 마저 이름표를 뜯어냈다.

차근차근 하나둘 정리해나가고 있는데.

[크르르륵!]

어느샌가 옆에서 나타난 사냥개가 폴짝폴짝 뛰었다.

드물게 흥분한 모양새였다.

카랑카랑한 소리로 사냥개가 들려주는 폰투스의 소식.

“뭐? 폰투스가?”

그것을 빠짐없이 들은 이안은 화들짝 놀라서 목청을 높였다.

지체할 새가 없었다.

이안은 다짜고짜 바람의 손을 시전해 레브를 비롯한 루하흐들을 들어 올렸다.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설명할 시간 따위 없었다.

루하흐가 무사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을.

“다들 협곡 위로 올라가. 당장!”

다급한 이안의 외침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C반이었다.

이안이 동요를 보인다는 건 심각한 일이 터졌다는 거니까.

C반을 필두로 연합조는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서 위로 올라가려 했다.

허겁지겁 움직이고 있던 그때.

콰르르르릇.

불길한 굉음과 함께 불의 해일이 협곡을 채우며 밀려 들어왔다.

협곡의 높이와 맞먹는 크기와 맹렬함.

아군이고 적군이고 다 같이 죽어보라는 심보만큼 해일은 흉포했다.

* * *

이안에 의해 협곡의 위쪽, 말아진 부분으로 안착한 레브.

레브는 저 먼 곳에서 다가오는 해일을 직시했다.

“……저거.”

협곡을 지우듯 녹이는 불의 해일에 확신할 수 있었다.

왜 이안이 제 신변보다 루하흐들을 우선했는지.

저 해일, 보통이 아니었다.

보통의 보호막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예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아니지.

저거에 맨몸으로 닿으면 치유로도 살릴 수 없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일단 다들 마력부터 정비해.”

얼떨떨함을 떨쳐낸 레브는 해일을 보고 멍해진 루하흐들을 일깨웠다.

해일의 압도적인 크기에 기선을 제압당해 동작이 둔해진 상태.

그들이 지체하는 중에도 이안은 협곡 아래서 아이들을 올려보내고 있었다.

발리올들은 대지 기둥을 생성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속속 위쪽으로 모여드는 아이들.

하지만 올라온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대지 기둥은 해일에 닿자마자 금세 녹아버릴 테니까.

그렇다고 협곡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시합 장소에서 이탈하면 곧장 탈락처리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넋 빼고 있는 건 민폐였다.

“당장 ‘만조’를 시전해.”

“만조? 그거면 치유의 보호막 중 최상위 등급인데.”

“묻지 말고, 정신 빼놓지 말고 당장!”

“아, 알았어.”

“만조를 시전하는 거, 다들 능숙하지 않은 건 아는데 그래도 해내야 해.”

“응.”

루하흐들은 굳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정령에게로 손을 뻗었다.

맞닿은 손.

그곳에서 생성된 은은한 푸른 빛이 붉어진 사위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차츰차츰 변화가 일어났다.

만조.

모든 원소 효과에 일시적으로 면역시켜주는 기술이다.

시전자의 등급이 높을 시엔 속박기를 무효화 해주고, 독과 저주마저 완벽하게 막아준다.

그리고 만조에 담긴 마력을 치환하면 잘린 팔다리도 재생시킬 수 있다.

물론 만조의 가장 큰 장점은 시전자가 죽지 않는 이상 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기 기술.

‘본래는 에르그 3성 이상만 다룰 수 있는 건데.’

이안이 아이들에게 가르쳐보라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만조의 묘리를 아이들이 깨칠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들은 만조를 조금씩 이해했고…… 결국 이렇게 쓰인다.

하여튼 이안 저 녀석.

저 해일까지 예측 했겠냐만은 경이로운 녀석이다.

“정신력에 예민한 게 만조야. 최대한 평정심을 가지고 시전해.”

“알았어.”

차분해지기 위해 루하흐들은 부러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숨결이 내려앉은 손, 빛이 나는 손은 점차 짙은 바다색이 되었다.

그쯤 되자 맞닿은 손에서 빛들이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반딧불이 같은 빛은 위로 올라오는 아이들을 하나씩 차례로 감싸 보호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열이 되고 스물이 되고…….

레브는 만조를 시전하는 중에도 해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대지가 타는 매캐한 그을음이 콧속으로 들이쳐서 불쾌해졌다.

죽음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방치된 부패한 시체에서 나는 역한 냄새가.

참을 수 없어 레브가 눈을 찌푸린 찰나, 좁혀진 시야 사이로 웬 물덩이가 보였다.

녹스였다.

* * *

레브의 곁으로 온 녹스가 대뜸 그의 이마를 탁 쳤다.

인정사정없는 손길만큼 날카로운 뭔가가 뇌 깊숙한 곳을 찌르는 것 같았다.

두개골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레브는 격통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크읏.”

몇 초에 불과했지만 레브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주르륵 흐르는 땀이 지나간 자리, 살갗 위로 금빛 늑대의 문양이 도드라졌다.

[이제 나와 정신 공명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아…….”

[이안이 상황을 설명해주라고 해서 부득불 이리했구나.]

녹스는 레브와 말을 나누는 중에도 해일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어쩐지 그 눈빛에 옅은 노여움이 어려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나지?]

“예.”

[정령 그 자체를 태워 생긴 불이니 그럴 것이다.]

“정령 그 자체라면?”

[폰투스 그 잡것이 정령을 제물 삼는 ‘오르기온’을 시전 했다.]

“오르기온?”

뜻밖의 단어에 놀라서 레브는 눈을 크게 홉뜬 채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오르기온이 뭐던가.

정령의 근원을 동력으로 삼아 시전자의 속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불은 바다만큼이나 큰 해일이 되고.

바람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태풍이 되고.

얼핏 보기에는 그럴싸 해보지만, 정령의 근원이란 곧 생명을 말한다.

자신과 유대가 강한 정령을 죽여야만 시전할 수 있는 기술인 것.

“하. 진짜 폰투스가 폰투스 했다고밖에는.”

[이안도 그리 말하더군.]

“근데 오르기온을 시전하면 시전자는 저주에 걸리잖아요. 결속하며 했던 맹약을 어긴 대가로.”

[그러하지. 다신 어떤 정령과도 결속을 맺지 못하게 되지.]

게다가 죽을 때까지 마력 고갈병에 시달리게 된다.

한 마디로 마력도 없고, 정령도 없는 무쓸모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미치지 않고서야 오르기온을 쓰는 자는 거의 없다.

“흠. 폰투스가 자신의 정령을 희생했을 리는 없고…….”

[그 잡것이 그럴 리 없지. 친위대의 정령을 일곱이나 잡아먹었다고 코르키가 그러더구나.]

“와아, 진짜 뭐라고 해야 할지. 하, 참.”

레브는 기가 막혀서 실소만 터트렸다.

사람이 할 말이 없을 땐 웃음만 나온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었다.

같은 사람인데…… 폰투스의 뇌 구조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이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이건 뭐.

어처구니가 없고 정령사로서 화도 났으나 우선해야 할 건 아이들이었다.

어느새 해일이 더 가까워져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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