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다들 좀 더 서둘러. 오르기온으로 만든 불에 닿으면 즉사야.”
“알았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만조를 씌워야 해. 최대한 빨리.”
시간이 없었다.
레브는 마력을 끌어올리다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아이들을 대피시킨 후에야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가만 보면 천생 가주감이었다.
다급한 상황에 전부를 살리기 위해 루하흐부터 챙긴 판단력.
우왕좌왕하는 아이들을 단박에 진정시키고 앞으로 이끄는 통솔력.
충분히 당황스러울 텐데도 절대 티를 내지 않는 철벽의 평정심.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브, 가주도 체질이어야 한단다. 위험한 순간에 앞장서는 특권을 즐기려면 말이다.>
불현듯 떠오른 아버지의 말에 딱 맞는 인간이었다.
이안 저 녀석은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 났다.
아마 태어나 터트린 첫울음이 ‘내가 바로 가주다.’였지 않나 싶은 싱거운 생각마저 들 정도로 꼭 들어맞는다.
“레브, 어때?”
“최선은 다하고 있는데 아직 3할가량은 못 씌워서…….”
이안의 물음에 레브는 미간을 구겼다.
만조가 없는 아이들과 하나라도 더 씌우려는 루하흐들.
루하흐들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보호막을 치면서 다수의 보호막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심력 소모가 컸다.
이대로 가다간 아직 만조가 능숙지 않은 녀석들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레브의 염려를 아는지 이안은 곧장 발리올에게 다음 지시를 내렸다.
“올리브, 오스틴. 만조에 ‘자연의 수호’를 덧대.”
“자연의 수호?”
“어. 보호막을 단단히 잡아주면 루하흐가 보호막을 유지하는데 심력이 덜 들어가니까.”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올리브는 발리올들에게 야무지게 말했다.
“얘들아, 제일 짱짱한 거다. 만약 우리가 지탱을 못 하면 다 죽으니까 잘하자.”
“걱정 마셔.”
발리올들은 한 몸인 양 대지를 쳐서 루하흐의 발밑으로 기운을 쏘았다.
촤르륵.
보이지 않았지만, 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모든 보호막이 대지에 뿌리박힌 양 단단히 고정되었다.
콰르릇.
미처 준비를 마치지 못했는데, 해일이 난폭하게 울부짖으며 밀어닥쳤다.
역한 악취가 났고.
뒤이어 땅이, 아니 하늘이 요동치더니 우레같은 소리가 났다.
신경을 후벼 파는 울음은 섬뜩했다.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던 정령의 원한 탓이리라.
마력 회로가 진탕 울뚝불뚝 튀었다.
음습한 열기를 뿜어내는 해일과 만조가 없는 아이들.
“젠장! 저대로 두었다간.”
안 되겠다 싶어 레브는 푸른 힘줄이 돋은 주먹을 말아쥐곤 한계까지 마력을 끌어올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압박감 속.
화아아악, 일대를 메우는 푸른 빛이 레브의 몸 안에서 뜯겨 나갔다.
눈에 핏발이 서고 전신에선 뜨거운 김이 폴폴 났다.
레브가 마력을 방출함과 동시에 이안 또한 다급히 마력을 응결시켰다.
-녹스, ‘바람의 촉발.’
바람의 촉발이면 1할이던 기술의 능력도 5할까지 급증한다.
대꾸할 시간도 아까운지 녹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바람의 촉발을 일으켰다.
허공에 짙은 삼각형으로 응축되는 마력.
그것은 레브를 비롯한 아이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 회전했다.
[이안, 최대한 집중해라. 정령을 일곱이나 잡아먹은 기술이라 꽤 세다. 촉발로 인해 그 위력을 고스란히 네가 감당해야 하니.]
힘차게 도는 삼각형에서 뿜어져 나온 실선은 탱탱한 막이 되어 아이들을 끌어안듯 둘러쳤다.
그 즉시.
쾅. 콰아앙.
시뻘건 해일이 검은 막을 매섭게 물어뜯으며 자비 없이 휘몰아쳤다.
* * *
“역대급이었다.”
올리브는 천막에 반쯤 몸을 걸친 채 널브러져 웅얼거렸다.
혼잣말을 매가리 없이 내뱉다가 옆으로 눈알을 굴렸는데…….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다들 저와 사정이 같았다.
병든 닭처럼 다들 지쳐서 바닥에 널어져 있었다.
보고 있자면 더 축축 처지게 되는 몰골들.
그래서 올리브는 눈알을 정면의 하늘로 쏘아 보냈다.
저녁 하늘을 밝히는 별이 무수하게 많았다.
이안이 자주 하는 말마따나 무정한 하늘은 더럽게 예뻤다.
뒤질 뻔한 자신들의 심사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와, 오르기온이라니.”
“솔직히 그 해일 보니까 눈앞이 캄캄해지더라. 다리까지 후달거리는데, 어후.”
“이안이랑 레브 아니었으면 우리 다 죽었다.”
“꼼짝없이. 막판에 레브가 펼친 만조 덕에 산 거지.”
“그 만조, 신기하지 않디? 어떻게 애들을 한 방에 감쌀 수 있지? 원래 하나씩 씌우는 건데.”
“죽음 직전의 회광 반조?”
“어쨌든 할 말 없게 만드는 실력이라니까.”
“야, 그걸로 따지면 이안은 어쩌고.”
“맞아, 맞아. 우리 대장.”
“레브의 만조가 막 흔들리니까 바람의 촉발로 그거 다 메웠잖냐.”
“난 그 순간에 여신을 보았다.”
“대체 우리 대장의 실력은 어디가 끝일까.”
“글쎄. 매번 새로워서. 이번에도 오르기온 덕에…….”
“아씨, 오르기온이란 말을 들으니 짜증이 또 확 올라오네. 폰투스 그 미친년 때문에 죽을 뻔한 게.”
아이들의 격한 수다 끄트머리.
“좋게 생각해.”
수다에 꼬리를 물 듯 정수리 위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볼 법한데, 올리브는 고개조차 까닥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는 게 귀찮았다.
삭신이 쑤셔서이기도 하고,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서이기도 했다.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발걸음.
미세한 땅 울림조차 없는 사람은 에루리안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뭘 좋게 생각하라는 거야, 이안?”
“이번 일은 파라칸시스 시합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거 아냐.”
“그러려나. 하긴. 드문 일이라 두고두고 떠들어대긴 하겠다.”
“그렇다는 건 우리가 전설로 남는다는 거 아니겠어?”
“와아아. 사고가 남달라. 역시 대장이야.”
“살아남았으면 뭐, 그걸로 된 거니까.”
“그치. 근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게 우리는 고사하고 어떻게 자기 반 애들까지 싹 다 뒤져도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냐.”
올리브는 열이 뻗쳐서 몸을 왈딱 뒤집었다.
그 반동으로 시야가 반전되며 핏기 하나 없는 이안이 눈에 들어왔다.
입술 색이 보랏빛이었다.
오늘 내내 무리했으니 그럴밖에.
없던 걱정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였다.
이에 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올리브는 그냥 밀어 넣어버렸다.
잔소리해서 바뀔 거였으면 레브 이마에 뿔이 돋지 않았겠지.
허구한 날 같은 일이 반복되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지 않아도 좀 전에 ‘이안 너 때문에 내가 늙는다 늙어.’라며 레브가 잔소리를 한바탕했었다.
고막에서 고름이 날 정도로.
이미 한 번 치른 전쟁, 더 말을 보태 뭐하랴.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올리브는 미친년이 한 짓을 다시금 상기했다.
“이안 너도 들었지. 교수들이 아까 오르기온 쓴 거를 질책하니까 폰투스가 대거리하는 거.”
“들었지. 금지 기술도 아닌데 무슨 문제 있냐, 라고 하는 거.”
“뿐이야? 친위대들이 자청한 거다, 나도 말려보다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다, 별 개소리를 다 지껄이더라.”
올리브가 질렸단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뭐. 감탄만 나온다. 사람이 그 정도로 뻔뻔하려면 대체 뭘 먹어야 하냐.”
“철면피?”
“캬캬캬. 철면피, 그거 찰떡이네.”
격양으로 빨라지던 올리브의 목소리가 돌연 모기처럼 줄어들었다.
남들이 들으면 안 될 소리라도 하려는 듯한 어투.
“그나저나 이안, 봤냐? 오르기온을 쓴 여파로 친위대 얼굴에 낙인이 찍힌 거.”
“봤지. 이마에서 턱까지 일자로 그어진 거.”
“걔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 아니다, 됐다. 걔들이 선택한 건데 내가 뭔 오지랖을.”
올리브는 거한 한숨으로 잡념들을 몰아내 버렸다.
사람 좋은 거에도 정도라는 게 있지.
절 죽일 뻔한 놈들을 걱정하는 것은 등신 같은 짓거리일 뿐이다.
올리브는 머리통을 한번 흔들곤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A반 본진인 돌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히 매서운 눈빛이었다.
아마도 폰투스 때문에 생각이 많은 거겠지.
“어째 불안하다. 폰투스가 내일 또 지랄 떨까 봐.”
“글쎄. 그 진상의 뇌 구조를 알 도리가 있나.”
“진짜 걔는 벌 받았으면 좋겠다. 사람을 죽일 뻔 해놓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게 말이 되냐.”
올리브의 마지막 말은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었다.
죽은 척 엎어져 있던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맞장구를 쳐댔으니까.
“맞아, 맞아! 내 평생 소원이다. 걔가 확 꼬꾸라지는 거 보는 게.”
“나도. 그년, 천벌 받았으면 좋겠다.”
이안은 흥분해서 떠드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허공을 응시했다.
대가, 받을 거다.
사람 목숨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으면 응당 거기에 맞는 값을 치러야지.
그러기 위해…….
이안의 시선이 저만치 떨어져 있는 별이끼 나무 군락지에 머물렀다.
그 시선 끝에 걸린 건 호위대였다.
호위대는 뭔가를 전하려 손가락 두 개를 자신들의 눈 쪽에 두고 휙휙 돌렸다.
어떤 수신호라, 이안의 고개가 옅게 위아래로 움직거렸다.
* * *
짙은 자정이 막 찾아왔을 무렵.
“도련님, 방금 열렸습니다.”
알란이 이안 곁에 바투 붙어 뭔가를 보고했다.
은밀하고 진중한 몸짓이었다.
이안이 내내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라는 걸 아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고했어, 알란.”
“아닙니다.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그라나토스에서 몇 년을 노숙해도 기꺼울 겁니다.”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요 며칠 고생했으니까 이제 좀 가서 쉬어.”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알란은 고개를 숙여 보이곤 왔던 대로 기민하게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난 후.
이안 역시 지체하지 않고 외출 준비를 했다.
막 나가려던 차, 이번엔 레브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나가려고?”
“어. 조금 전에 보고받았는데 그곳의 문이 열렸대서.”
“아, 식인 꽃 처리로 구할 게 있다는 거기?”
“기회가 왔을 때 후딱 해치워야지.”
“아……. 근데 좀 미뤄야겠다.”
“왜, 무슨 일 있어?”
“오고 있다.”
“흐음. 한 번도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그럼 나가는 건 잠시 제쳐두고 손님 맞을 준비부터 해야겠다.”
입꼬리를 설핏 올린 이안은 레브와 함께 천막 밖으로 나왔다.
그런 뒤 입구에 서 있던 올리브에게 눈짓을 보냈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눈치가 있으니 그 뜻을 모르랴.
올리브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정령을 땅속으로 들여보냈다.
그에 맞춰.
짙은 어둠을 타고 누군가가 C반 본진으로 걸어들어왔다.
거만하고 사뿐한 그림자와 그를 뒤따르는 또 다른 그림자들.
이들은 거침없이 하얀 천막을 태우며 진영 중앙으로 향했다.
이안이 있는 곳으로.
그림자, 아니 폰투스가 중앙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투웅.
더는 접근하지 말라는 것처럼 무언가가 폰투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얇고 말랑한 막이었다.
낮이라면 능히 보였을 테지만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막.
그녀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모양새에 폰투스는 언짢아서 눈을 치떴다.
그렇다면 왜 천막에 불을 지르도록 놔뒀을까.
의문이 머릿속을 채우던 차.
콰르르릉.
그녀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폭압적인 지진이 일어났다.
굉음이 나더니 삽시간에 갈라진 땅이 푹푹 꺼져갔다.
균열은 눈 깜빡할 새 빠르게 번져갔다.
흡사 얇은 막 하나가 땅인 양 위장하고 있다가 본색을 드러낸 것 같달까.
그만큼 땅이 꺼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이에 재빨리 탈출을 시도하던 폰투스는 그만 당황했다.
“……늪?”
쑥 꺼진 땅이 질척거렸다.
발등을 기어오르는 축축한 흙덩이의 감촉이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폰투스는 재빨리 털어버리려 했으나 물컹한 진흙은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도리어 올가미가 되었고, 그녀의 몸뚱어리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쯔읏.”
불길로 땅을 태우며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처음에는 발등이 잠기더니 일순간 무릎이 되고 허리까지 잠겨버렸다.
늪지의 특성상 버둥거릴수록 잠식 속도만 빨라졌다.
기어코 폰투스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잔뜩 구겼다.
그녀뿐 아니라 함께 온 친위대도 마찬가지.
땅에 콕콕 박힌 모양새가 흡사 두더지가 고개만 내밀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