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특별히 준비한 환영식은 잘 받으셨나?”
이안은 폰투스와 친위대를 훑으며 삐뚜름하게 고개를 꺾었다.
볼만한 몰골이었다.
폰투스의 이런 귀한 몰골을 또 언제 볼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맘껏 구경해 주었다.
한데 이 흐름의 뭐에 자극받은 걸까.
제 본연의 기색을 놓쳤던 폰투스가 얼굴의 구김을 쫙 펴더니 웃어 보였다.
것도 화사하게.
“이안 님, 멋진 밤이네요. 담소를 나누기 좋을 만큼.”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서두인지.
“환영식이 과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러라고 한 환영식이니. 너의 요란한 등장에 걸맞게 말이지.”
“아, 천막 태운 거요? 제가 이러지 않으면 이안 님이 봐주실 것 같지 않아서 그런 건데.”
차원이 다른 미친년이었다.
제 얼굴 봐 달라고 남의 주거지에 불 싸지르다니.
보면 볼수록 정나미가 떨어지는 여자였다.
이안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다시금 폰투스 일행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화사한 폰투스는 그렇다 치고.
외양 준수하던 친위대 중 일곱의 얼굴 양쪽에 긴 줄이 그어져 있었다.
낙인…….
오르기온을 시전한 시전자에게 새겨지는 것이었다.
저 꼴이 되고도 폰투스를 따르다니 참.
여러모로 저것들도 답이 없는 구제 불능이었다.
“관심은 충분히 끈 것 같으니 이젠 그만 꺼지시지.”
“어머, 애써 놀러 온 손님에게 너무 푸대접이시네요.”
“놀러 오셨다?”
“예. 아까 말했다시피 담소나 나눌까 해서요.”
“참 ‘놀러 온다’라는 개념이 신선하다 못해 짜릿하네.”
이안이 질척한 땅 위에 고고하게 서서 폰투스를 낮잡아보았다.
폰투스로선 그 시선이 어느 때보다 거슬렸다.
비단 된통 당한 것에서 오는 심상만은 아니었다.
……낮잡는 눈빛, 익숙한 눈빛이었다.
제 어머니인 폰투스 가주도 자신을 내쫓을 때 저런 낯짝을 내보였으니까.
꿈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은 그 얼굴.
갈아 마시고 싶은 사람이 겹쳐지자 폰투스는 남몰래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게 뭐든 하수처럼 티를 내랴.
그녀는 부러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드러났을 표정을 모조리 감췄다.
이제 알겠다.
차가운 늪지에 박혀 있다 보니 너무도 명확하게.
폰투스 가주처럼 음흉하기 그지없는 이안의 속내를 말이다.
‘일부러 불을 지르게 놔둔 거였어.’
폰투스는 제가 있는 곳의 늪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의 지형을 늪으로 바꾼 건 둘째치고, 늪 전체에 살얼음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마른 흙이 얇게 덮여 있었고.
늪지화 된 땅의 완벽한 위장.
이런 구조에 불을 질렀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얄팍한 얼음이 녹아 필연적으로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마당에 제가 이안이 계산한 대로 행동했으니 얼마나 우스워 보였으랴.
‘그러니 깔보는 눈빛으로 쳐다볼밖에.’
한쪽으로 기운 흐름은 그녀에게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었다.
눈썹을 까닥한 폰투스는 환기하려는 듯 이안을 나긋하게 불렀다.
“이안 님, 이안 님이 이렇게 나오시니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해야겠네요.”
“…….”
“3차전은 제 손을 잡으세요.”
“하!”
“제가 파라칸시스 시합 전에 드린 제안, 그건 아직 유효해요.”
“아아, 황천길로 직행하는 꽃길?”
“이번이 정말 마지막 권유에요. 저도 더는 봐 드릴 수가…….”
“나는 내 동맹을 배신할 생각 따위 없으니 그만 입 다물지.”
“진정, 제가 드리는 마지막 기회를 차버리겠다는 건가요?”
“사람 참 피곤하게 하는군.”
이안의 무시에도 폰투스는 여유롭게 평온함을 유지했다.
어차피 이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건 저였다.
그러니 뭐가 아쉬우랴.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었다.
“이안 님이 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설명을 덧붙이자면. 지금 그렇게 튕기고 계실 입장이 아니에요.”
“그럴 입장이 아니다?”
“예. 제가 이안 님의 비밀을 알고 있거든요.”
폰투스는 한껏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속살거렸다.
이안을 꾀어내는 듯한 달콤한 어조가 찐득하게 피어올랐다.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될 그 비밀을.”
* * *
폰투스가 진상을 떨어댄 몇 시간 뒤.
녹스가 서쪽 숲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며 허공에 주먹질했다.
묵직한 바람 소리가 났다.
폰투스의 협박에 심기가 제대로 상한 모양새.
[아, 깜찍해서 죽이고 싶은 그 잡것을 어떻게 하지? 고 머리털을 싹 다 뽑아 버릴까, 평생 고기 구경 못 하게 이를 몽땅 뽑아버릴까.]
“둘 다?”
[그래도 성에 안 찰 것 같다. 내 모습이 담긴 영상석을 가지고 협박하다니.]
“협박용으로는 그만한 게 없긴 하지.”
[염병할. 뭐? ‘그걸 없애려고 저를 위협해도 절대 찾을 수 없을 거예요.’라고?]
“아까 폰투스 말 못 들었어? 가치 있는 보물일수록 안전한 곳에 숨겨놓는 법이라잖아.”
[아주 음습한 년이다.]
“그걸 가지고 이쪽저쪽 저울질하고 있었단 것만 봐도 알만하지.”
[살리카 가주는 그렇다 쳐도, 황제라니…… 기가 막힌다.]
“폰투스가 폰투스했지, 이번 역시도.”
[역시 그 잡것은 빨리 골로 보내는 게 상책이다. 아니면 내가 먼저 화병으로 드러눕겠다.]
뭘 해도 분이 안 풀리는지 녹스가 연신 씩씩거렸다.
대찬 콧김에 이안은 진정하라는 듯 녹스의 노란 앞발을 잡았다.
“그 진상이 기고만장할 수 있는 것도 얼마 안 남았어.”
[허긴. 드디어 문이 열렸으니까. 고것을 처리할 수 있는 문이.]
“진짜 오래 기다렸다.”
[어쩔 수 없었잖느냐. 서쪽 관리자는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서쪽 관리자.
폰투스 처리와 관련한 물건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정령이다.
해서 일찍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동안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관리자의 영역 자체가 파라칸시스 기간 중 딱 하루만 열리니 뭐.”
[게다가 무작위지.]
첫째 날이 될지, 둘째 날이 될지 서쪽 관리자 외에는 알 수가 없다.
건물주 마음이니 별수 있나.
관리자를 만나려면 죽치고 잠복하는 수밖에 없다.
하여 호위대가 파라칸시스 내내 관리자의 영역을 감시했더랬다.
그렇게 3일 차가 된 오늘, 드디어 영역이 개방되었단 소식을 전해 들었고.
[언제 닫힐지도 모르니 좀 더 서두르자.]
“어. 열린 지 네다섯 시간 만에 닫히기도 한다니까.”
[하여간 그놈도 변덕이 여간 아니다.]
대중이 없어서 둘은 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일까.
고작 2시간 만에 서쪽 숲의 끄트머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즉시 마주한 남다른 풍경.
서쪽의 끄트머리는 광활한 바다였다.
지평선 너머까지 전부 신비로운 코발트 색으로 물들어 있는 바다.
“내륙 중앙에 바다가…….”
[이곳과 루하흐의 에드레이 나일이 연결되어 있지 않누.]
“숲에서 바다를 보니까 색다르긴 하다.”
이안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면 위로 시선을 놓았다.
아스라하게 보이는 저곳이 서쪽 관리자의 영역이었다.
[아이고, 색다르나 마나 또 저기까지 가야 하는구나.]
거리감만큼이나 바람에 실린 눅눅한 습기에서 소금기가 맡아졌다.
짭조름한 냄새가 어찌나 강한지.
목구멍에 소금기가 성에처럼 끼는 것 같단 실없는 생각이 들이쳤다.
“녹스, 그나저나 서쪽 관리자는 어때?”
[그놈? 잠 많고 게으른 어린 용이지.]
“아. 다들 그렇게 말하네.”
[사실이니까. 여하튼 용이라고 하나 진짜 용은 아니다. 형태를 빌었을 뿐.]
“4대 관리자들 전부 그렇지 않아?”
[까마득하구나.]
“뭐가?”
[그놈들이 어떤 형태를 취할까 고민했던 걸 본 게 말이다. 무려 천 년도 전의 일이었지.]
천년도 전.
추억팔이를 하기에는 쉰내가 너무 났다.
그렇다 하더라도 녹스는 아주 훌륭한 정보통이었다.
만나야 할 상대에 관해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았으니까.
이는 곧 이안이 얻을 수 있는 정보 역시 많다는 것이었다.
하여 이안은 서쪽 관리자에 관해 녹스가 떠드는 걸 귀 기울여 들었다.
[서쪽 관리자가 용의 형상을 택한 건 순전히 그 때문이지.]
“그 때문?”
[남들한테 무시무시해 보여야 한다나 뭐라나.]
“하하. 보이는 건 중요하지.”
[중요하다 해도 그렇지. 그놈은 제 외양에 지독하게 집착한다니까. 아휴, 말도 못 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보고 싶긴 하다. 어떻게 생겼을지.”
이안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말문을 열었다.
“근데 서쪽 관리자는 왜 그렇게 외양에 집착하는 거래?”
[제 능력 때문이지 뭐.]
“능력?”
[응. 자기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했던가 어쨌던가. 별 시답지도 않은.]
“아아, 저주를 거니까 위협적으로 보이고 싶었나 보네.”
[난 솔직히 아직까지 그 외양과 저주의 상관관계를 모르겠다.]
녹스 말마따나 이안도 동의했다.
둘의 상관관계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서쪽 관리자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
왜냐면 관리자는 ‘태초의 모든 저주를 창시해낸 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파생된 모든 저주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기원, 시초.
창시자라는 말을 아무나 갖는 것이던가.
그렇지 않기에 이건 특별함과 직결된다.
그 특별함으로 관리자가 건 저주는 그가 거두지 않는 이상 절대로 풀 수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이안이 관리자에게 저주를 구하려는 이유 말이다.
‘절대 풀 수 없는 완벽한 저주를 얻어야 해서지.’
* * *
언제 여기까지 왔나 싶게 금방 도착한 서쪽 관리자의 둥지.
이안은 바다 끄트머리에서 부유하는 섬, 아니 배를 보았다.
배는 앞과 뒤가 뾰족한 바이킹선의 형태였다.
“저기가…….”
저 배가 서쪽 관리자의 집이었다.
망설일 새 없이 이안은 배의 아랫부분에 있는 이동진으로 걸어갔다.
진 자체가 물 위에 그려져 있어선지 육안으로는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게 진인지, 그냥 바닥인지.
그렇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듯 진 안에 서자 웅웅 소리가 났다.
포도색 빛에 휩싸여 삽시간에 도착한 배의 갑판.
표현만 갑판이지 실상은 광활한 초원지대였다.
도저히 배라고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 초원의 어드메쯤, 폴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 하나.
녹스 말마따나 그림자만 봐도 위협적이었다.
실체를 마주한 것도 아닌데 솜털이 오소소 돋아나며 서늘해졌다.
분위기가 장난 아니랄까.
“서쪽 관리자.”
“…….”
잠을 자고 있는지 서쪽 관리자는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죽었나 싶을 정도였다.
숨 쉬느라 들썩거리는 보라색 비늘만 아니었다면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고 있는데도 여기까지 싸한 콧바람이…….”
움찔.
그가 한 말 때문인지, 다른 뭣 때문인지 조용하던 그림자의 돌기가 위로 튀었다.
……잠을 자는 게 아니었다.
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흐음.”
손님이 와도 저렇게 죽은 척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아는 척하지 말라는 강력한 의사 표현이었다.
이런 상황에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저쪽이 짜증 나서 입을 열 때까지 이쪽에서 줄창 말을 걸거나.
그냥 상대의 입이 열리기만을 몇 날 며칠이고 기다리거나.
둘 중, 이번 경우에는 후자를 택해야 할 것 같았다.
괜히 관리자에게 말을 걸며 귀찮게 했다가는 바로 쫓겨날 것 같았으니까.
촉을 따르기로 한 이안은 관리자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3차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가야 한들.
그건 이안의 사정이지 관리자의 사정이 아니었다.
징징거려봐야 소용없다는 의미.
“녹스, 밥 먹자. 새벽부터 돌아다녔더니 출출하다.”
이안은 바닥에 천을 깐 뒤 가져온 것을 하나씩 꺼냈다.
흰 빵 사이에 치즈와 햄을 넣고 바삭하게 구운 크로크무슈에 그라나토스산 과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럼.
이 럼이 관리자의 입을 열게 할 것이다.
이전에 루체를 바둑으로 낚았을 때처럼 말이다.
‘서쪽 관리자는 럼에 환장한다고 했으니까.’
애초부터 몇 날 며칠 기다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미끼를 던지면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안은 럼을 연 뒤 향이 관리자 쪽으로 가도록 일부러 바람을 일으켰다.
이에 다크 럼 특유의 강한 향미가 솔솔 진해져 갔다.
진정한 술꾼은 향기마저도 탐닉한다 했던가.
술이 전해주는 향긋함에 되레 녹스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럼 말고 내 와인은 없니?]
“당연히 스승님 것도 챙겨왔지요.”
[역시 내 제자야.]
이럴 때만 칭찬하는 녹스가 와인 병을 집어 들었다.
본격 먹방의 서막을 알리는 손짓이었다.
사냥개와 텔로스까지 가세해서 휴양지에 놀러 온 것처럼 북적이길 30여 분.
푸드덕.
내내 움찔움찔 대던 관리자가 슬쩍 날개를 펼쳐 들었다.
럼의 향을 못 참고 백기를 든 모양새.
그 날갯짓은 이안의 낚시질에 걸린 또 다른 희생양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