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36화 (136/214)

제136화

푸드덕푸드덕.

미끼를 문 희생양, 아니 서쪽 관리자의 날갯짓이 거세졌다.

그에 따라 거대한 돌풍이 이안의 정수리를 압박해왔다.

머리 가죽이 뜯겨나갈 것 같았다.

욱신거리는데도 이안은 꿋꿋하게 버티면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관리자를 조금 더 안달이 나게 하려는 것.

의도가 제대로 먹혔는지.

“크흠.”

‘날 좀 보소.’라는 관리자의 헛기침이 이안의 귓구멍으로 파고들었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달아.

목청을 가다듬는 소리일 뿐인데 북소리마냥 둥둥 울렸다.

울림통만큼 거대한 몸집이 절로 상상이 갔다.

거기서 오는 무시무시한 기백과 압도감이 장난 아닌 용.

“……이 아니라 해츨링?”

“…….”

뻘쭘함이 공기처럼 흘렀다.

이 와중에도 해츨링의 눈은 이안 손에 들린 럼에 고정되었다.

당장이라도 앗아 갈 것 같은 흉포함이…… 아닌 귀여움을 달고서.

진짜 귀여웠다.

땡글땡글하고 커다란 눈.

이마에 난 앙증맞은 연두색 뿔.

온몸에 보라색 물감을 칠해놓은 것 같은 반지르르한 비늘.

한정 없이 위로 솟구쳐 있는 뭉툭한 꼬리.

천 살을 먹어도 유아기라더니, 들은 그대로 유아일 줄이야.

“자네, 그 럼으로 국 끓여 먹을 거야? 들고만 있지 말고 나한테 넘겨.”

“아, 럼…….”

자고로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는 잽싸게 낚아채야 하는 법.

이안은 얼른 감상을 갈무리하며 관리자에게 럼을 넘겼다.

순순히 건넸는데도 감질 나는 모양이다.

관리자가 럼을 빼앗다시피 갈취한 뒤 숨도 안 쉬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 넘김이 예사가 아니었다.

“크으. 소문 무성한 탑의 주인을 이제야 보네.”

목을 축인 관리자는 럼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빈 병이었다.

몇 초 만에 도수 높은 술을 배 속으로 전부 비운 것이다.

알고 봤더니 유아가 상남자였다.

“자네, 내가 누군지는 알지?”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서쪽 관리자님.”

이안은 뒷짐을 지고 있는 관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중한 고개 숙임에 반해 어딘가 모르게 불손한 그의 눈길.

그것은 도통 둥실한 관리자의 허리 부근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저걸 뒷짐이라고 해야 하나,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고 해야 하나.

짧고 오동통한 팔이 원인이 돼서 앞발이 허리 뒤로 가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관리자는 꿋꿋했다.

안 되는 자세를 어떻게든 되게 하려고 어찌나 버둥거리는지.

그 탓에 애꿎은 포도색 비늘만 힘겹게 떨려왔다.

‘딱 그거네. 위엄 있어 보이려는 거.’

관리자의 허세에 이안은 잇새로 새는 웃음을 감추려고 시선을 위쪽으로 끌어 올렸다.

한데 위쪽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쪽만 차고 있는 안대라니.’

보고 있자면 자꾸 웃음이 터졌지만 여기서 웃으면 망하는 거다.

이안은 오직 그 생각만 되뇌며 잇새로 말을 밀어냈다.

“럼은 입에 맞으셨습니까.”

“크흠. 뭐, 어린놈이 제법 입맛은 맞출 줄 아는군.”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독한 걸 선호하는 관리자님의 취향에 맞춰.”

“윗사람을 만나고자 한다면 그 정돈 당연한 것을.”

“예. 옳은 말씀입니다.”

“한데 다른 관리자한테는 이놈, 저놈 반말하더니 나한테는 안 그러네.”

반말,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직 유아기인 해츨링에게서 꼰대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도 몹시 강하게.

윗사람을 만나면, 어쩌고 하는 데서 그런 예감이 들었다.

뿐이랴.

경련이 일어 남몰래 팔을 슬쩍슬쩍 털어대면서도 뒷짐을 고집하는 것만 봐도 뭐.

“이것저것 따질 필요 있나. 그래, 자네가 나를 보러 온 연유가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시니 저도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주를 얻으러 왔습니다.”

“아항.”

묘한 추임새를 넣은 관리자가 매끈한 턱을 쓸어내렸다.

뭔가를 가늠해보는 몸짓이었다.

몇 번이나 턱을 쓸다가 관리자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이안에게 성큼 다가왔다.

일순 관리자의 기도가 완연하게 달라졌다.

뭘 해도 귀여워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냉막함을 드러낸 관리자는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꺾으며 이안을 관찰했다.

어떤 놈인지 견적 좀 내볼까, 라는 탐색.

파충류 특유의 가는 동공이 갈수록 좁혀졌다.

고대종이 가진 위압감이 살벌하고 섬뜩하게 이안을 찍어눌렀다.

이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안이 덤덤하게 받아치자, 그게 재밌는지 관리자가 머리통을 흔들었다.

“담대한 건가, 탑의 주인이라 태평한 건가.”

“아무래도 답을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회피하는 거야?”

“신중한 겁니다. 질문의 의도를 모를 땐 그게 최선 아니겠습니까.”

“파하하핫. 짜증 날 정도로 영악한 놈일세.”

칭찬이 칭찬 같지 않았다.

관리자가 꼬리로 바닥을 내려치는 게 무척 매서웠다.

그때마다 짓이겨지는 풀이 꼭 제가 그렇게 될 거라는 경고장 같았다.

그래도 이안은 무던함을 유지한 채 다시 한번 제 의사를 피력했다.

“제게 저주를 주시겠습니까.”

“주는 건 내 마음인데 딱히…….”

“아직 럼은 이 배를 채울 만큼 많습니다.”

“크흠. 그거 하나에 쉬이 변덕을 부려서야 쓰나.”

“필요한 변덕은 변덕이 아니지요.”

받아치는 이안의 말들에 빈틈이 없었다.

틈이 없다는 건 그만큼 많은 준비를 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버벅거리거나 굳어지는 거 없이 마냥 느슨할 수밖에.

그로 인해 관리자의 보라색 홍채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어렸다.

‘보통 놈이 아니군.’

열다섯의 외양으론 가릴 수 없는 백전노장의 노련함이 엿보였다.

협상을 수없이 해본 자 같달까.

남의 선택이 제 향방을 정하는 상황에 수없이 놓여 본 자 같달까.

아니지.

그런 상황에서도 원하는 바를 수없이 쥐어본 자에 더 가까웠다.

맹랑한 꼬맹인 줄 알았는데, 만만치가 않았다.

관리자는 꼬리로 재차 바닥을 치며 여유로운 이안을 직시했다.

“내가 말이야. 저주를 내어준 게 언제 적인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라는 뜻이겠지요.”

“자네 말이 맞아. 무려 천 년도 전이야, 천 년도 전.”

“…….”

“그게 무엇을 의미할까. 그 이후엔 아무도 내게서 저주를 얻어낼 수 없었단 거지.”

“그간 전례가 없었다고 지금도 그러라는 법은 없잖습니까.”

“전례라는 건 따르라고 있는 거야. 그 관습이 옳아서.”

아, 이 꼰대.

이안은 럼 하나를 더 꺼내 관리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먹고 알코올의 기운에 흐린 판단을 해보라는 의도였다.

“그래서 주실 겁니까, 말 겁니까.”

“자꾸 달라고 하는데, 달라고 하고 그것을 얻지 못했을 시 그 대가가 뭔지는 알아?”

“압니다.”

“아는데, 저주를 얻겠다고?”

“제게는 필요한 거니까요.”

“내가 거부하면?”

“그렇다면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시험이라…….”

일종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저주를 얻으려는 자가 시험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할 시, 관리자는 반드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

고개를 비튼 관리자는 새 럼을 들이켜며 병 사이로 말을 흘렸다.

“자네, 시험이 뭔지는 아나?”

“선문답이라고 들었습니다.”

“흐음……. 다 알고 온 거 같으니, 우선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생길 일을 말해 봐.”

“얻고자 하는 저주가 제 몸에 새겨진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시험을 치르겠단 거야?”

“그렇습니다.”

이안은 이미 결심하고 온 터라 망설이지 않고 즉답했다.

그 태도 때문일 것이다.

더는 말꼬리를 잡지 않고 관리자가 단계를 건너뛰듯 요약본을 건넸다.

“시험의 판별은 간단해. 이 배가 시험대야. 왼쪽으로 기울면 자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내가 이겨.”

“예.”

“그리고 명심할 거 하나. 저주는 결국 남을 해하는 것이니, 탑의 주인이라고 해서 봐주지는 않을 거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미 각오를 다진 자에게 시간을 끌어 뭐할까. 그럼 미적대지 않고 문제를 내도록 하지.”

관리자는 묘한 시선을 이안에게 던지면서 첫 번째 질문을 했다.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고 차갑게 식혀주며 산을 깎고 황제를 죽이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안은 말꼬리를 흐리며 잠시간 골몰했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답은 몇 가지로 추려졌다.

그중 관리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에 가까운 건 역시 그것일 터.

“모든 만물에 공평한, 시간입니다.”

“그렇지, 그것이 순리이다. 절대로 변해선 안 되는 법칙이고. 한데.”

“…….”

“그것을 역행한 자가 있다. 그는 어떻게 됐을까.”

저주를 얻기 위한 두 번째 질문이 날카롭게 이어졌다.

답이 있으나 답이 없는 물음에 이안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고심하는 그를 두고 배가 차츰 오른쪽으로 기울어갔다.

느릿한 달팽이 같지만 아주 착실하게.

* * *

올리브는 느리게 떠오르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8시면 3차전이 시작되는데, 이안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레브, 이안 곧 오겠지?”

“시합 전에는 오겠다고 그랬잖아. 느긋하게 기다려보자. 약속을 어길 놈이 아니니까.”

“후우. 그야 잘 알지. 아는데, 한 시간도 안 남아서 걱정된다. 시합 시작하고 오면 실격 처리 되잖냐.”

시합에 참여할 의사가 있으면 시합 전에 모습을 비춰야 한다.

그게 규칙이었다.

태연하게 굴고 있지만 사실 레브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늦지 않을 것을 아나, 어디 사람 일에 절대적이란 게 있던가.

언제나 변수는 있기 마련.

“줄곧 이 시합만을 준비해온 녀석인데…….”

그간 이안이 티를 낸 적 없지만, 곁에 있다 보니 절로 알게 되었다.

이 시합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궁금했다.

하지만 왜 그러는지 이안에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알려주고 싶었으면 녹스의 정체를 밝혔을 때처럼 말해주었을 테니까.

그저 이안을 도와 파라칸시스에서 우승하고 싶었다.

그게 친구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녀석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방법이었는데.’

그마저도 이안이 오지 않으면 소용없다.

그 사실에 못내 화가 난 레브는 거칠게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이게 다 야밤에 불 지르는 게 취미인 그 미친년 때문이었다.

씹어먹을 폰투스.

이안이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서쪽 끝까지 가게 만든 원흉.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왈딱왈딱 뒤집혔다.

다만 올리브의 불안감을 가중하고 싶지 않아 레브는 억지로 분통을 내리눌렀다.

한데.

“좋은 아침이에요, C반 여러분.”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레브의 귓전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 소리만으로도 짜증 지수가 솟구쳤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폰투스가 납셨으니까.

“새벽에 나눈 동맹에 관한 얘기를 끝맺으려고 왔어요.”

뻔뻔하게 등장한 폰투스가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자며 다짜고짜 손을 튕겼다.

그러자 뚝딱 원형의 티 테이블이 생겨났다.

폰투스는 거기 앉더니 우아하게 홍차를 타서 홀짝거렸다.

……세상에 다시 없을 저 또라이.

레브는 저걸 어째야 하나라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죽일 것 같은 살기에도 폰투스는 태연자약했다.

벌레가 꿈틀거리며 물어봐야 아프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아, 시간이 남으니 먼저 너와 얘기를 나눠보는 것도 괜찮겠다.”

“할 얘기 없으니까 꺼지시지.”

“왜 없어? 이안 님이 오시면 더 볼 것도 없이 동맹이 될 텐데.”

“지랄. 착각도 풍년이다.”

“착각은. 손을 잡으면 B반 먼저 쳐야 하니 어서 준비해.”

“하!”

“그러고 있을 시간에 움직이라고. 바깥에 있는 굼벵이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도 좀 내리고. 난 내 동맹이 게으른 건 못 참거든.”

폰투스는 레브와 올리브가 가리고 있는 발바시아 나무를 보며 말했다.

넓적한 나뭇잎 사이로 슬그머니 보이는 선홍색 날개들.

총 오십의 파라칸시스가 나무와 천막 주변을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들을 지키면 C반의 우승은 확실시된다.

반면.

A반 것은 열 마리뿐이었다.

현재로선 무슨 짓을 해도 A반의 꼴찌가 확정된 상황.

하지만 그녀에게 영상석이 있는 한 이 판은 언제든 뒤집을 수 있다.

먼저 C반을 이용해 B반을 치고, 이안에게 기권을 권하기.

그러면 C반이 소유하고 있는 발바시아 나무는 제 것이 될 것이다.

이는 곧 그녀가 우승을 거머쥔다는 것이었다.

“나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봉사한다고 생각…….”

폰투스가 헛소리를 늘어놓던 그때.

후우웅 강한 돌풍이 일며 폰투스가 앉아있는 티 테이블을 날려버렸다.

챙그랑 찻잔이 깨지는 소리와 테이블이 쿠당탕 구르는 소리.

요란한 소음을 뒤로 한 채 누군가의 감색 코트 자락이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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