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39화 (139/214)

제139화

[오호. 뭐 달라진 게 있누?]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하지. 주변의 색이…….”

간단하게 말하자면 생물이 가진 감정의 색이 선명하게 보였다.

가령 녹스.

녹스의 전신은 몽글몽글한 노란색으로 뒤덮여있었다.

노란색은 한정 없이 기분이 좋다는 의미였다.

거기다 저에게 호의를 품고 있으니 유난하게 그 색이 밝았다.

사냥개도 마찬가지.

둘 다 호감도가 높아서 드러난 색깔이 불순물 없이 선명했다.

반면.

“저것들은 투명하다.”

바깥의 정원에 핀 알록달록한 꽃들은 모조리 무색이었다.

감정이 없는 데서 비롯된 색이었다.

그리고 수려한 정원 옆을 지나는 남학생과 여학생.

두 사람 중 여학생을 보고 있는 남학생은 진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여학생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지닌 것.

이쯤 되니 알 것 같았다.

살리카 일족을 일컬어 왜 ‘감별사’라고 부르는지.

감정의 색깔을 읽을 수 있어 쉬이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에르그 2성 이상이 되어야 가능하지만.

이안은 새로 생긴 능력으로 주변을 훑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장 들뜨는 때가 기술이 막 생겼을 때지 않던가.

그야말로 탐구 삼매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 비실이는 파란색이고, 저 바가지 머리는 보라색이고.”

그사이에 홀로 방치된 녹스가 이안의 무릎을 흔들었다.

혼자 놀지 말라는 거였다.

[이안, 태동의 색을 읽는 건 그만하고. 어서 불이나 일으켜 봐라.]

“아, 색을 읽어내는 게 재밌어서 내가 또.”

녹스의 재촉에 이안은 씨익 웃으며 손바닥에 불을 일으켰다.

화르르.

밖에 내리는 함박눈보다 더 선명한 하양이 금세 타올랐다.

순도가 극치에 달한 색이었다.

살리카 중에서도 직계와 가주에게만 허용된 특권 같은 색깔.

[이 불길은 언제봐도 아름답군.]

“보기는 그렇지.”

[홀홀홀. 이 좋은 재료가 드디어 네 손안에서 노는구나.]

“손에 쥐었으니 지금부턴 제대로 운용해 봐야겠다. 그게 안 되면 평범한 불보다 못할 테니까.”

[네놈이면 잘 해낼 터.]

녹스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을 흘렸다.

그래도 스승이라고 마냥 태평할 수는 없어 말꼬리에 살을 덧붙였다.

[대신 한 가지만 명심해라. 우리가 그동안 통제력 수련을 왜 했는지.]

“이제 두 가지 원소를 다루게 됐으니까?”

[그렇지. 각각의 고리에 절대 같은 마력량을 채워선 안 되느니.]

“충돌 나서 내 몸이 망가질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 같은 거였다.

각기 다른 원소를 각각의 고리에 똑같은 양으로 채우면 내부충돌로 몸이 폭사한다.

당연히 그 일대도 폭발의 여파에 휩싸이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이안은 제 손을 뒤덮고 있는 불길을 선뜩하게 응시했다.

새하얀 불.

제게서 소중한 것들을 모두 앗아갔던 악귀의 불.

이 증오스러운 불을 제대로 다뤄야만 한다.

그래야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애초의 목표인 살리카 가주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이안은 기숙사를 나와 어슬렁어슬렁 어딘가로 향했다.

가는 내내 맞닥뜨린 에루리안의 분위기가 평소보다 더 붕 떠 있었다.

파라칸시스 시합의 종료는 곧 학기의 종료이기 때문.

3일 뒤면 방학이라 어느 한구석도 차분하지 않았다.

왁자지껄하고 정신없는 소음의 틈바구니.

“도련니이이임-.”

에루리안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사위를 흔들었다.

반가움이 격렬하게 묻어나왔다.

검은 마차에서 내리는 이를 향해 이안은 옅게 미소 지었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이가 몇이나 될까.

“칼브란.”

“우리 도련님, 보지 못한 사이 더 멋져지셨습니다.”

“왜, 나한테서 광채라도 나?”

“예. 눈이 부셔서 차마 쳐다보지 못하겠습니다.”

칼브란의 주접에 이안은 소리 나게 웃고 말았다.

하여튼 못 말린다.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칼브란의 주접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연신 실실거리고 있자, 칼브란이 눈꼬리를 한껏 아래로 내려트렸다.

그 처짐에는 속상함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리 변모하신 도련님을 보고 나니 어째 더 아쉬워집니다.”

“뭐가?”

“가주님께서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하셔서 열지 못한 연회 말입니다.”

“아…… 연회.”

“제가 그것 때문에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쳤습니다. 너무도 원통해서.”

그러고 보니 칼브란의 얼굴이 푸석했다.

눈에 핏발까지 선 것이 가문에 큰일이 생겼을 때의 모양새였다.

“도련님이 이번에 이룬 성취가 어디 보통의 것입니까. 영웅 전기를 만들어도 모자랄 정도인데.”

“…….”

연회도, 책도 필요 없다.

저번과 같은 축하연을 받을 바에야…… 가출하는 게 나았다.

칼브란의 열성이 가라앉을 때까지 말이다.

이안은 차마 칼브란이 삐질까 봐 ‘됐다.’라는 말은 못 했다.

그저 시큼한 표정만 지을 뿐.

한데 제 표정이 칼브란에게 잘못 전달된 모양이다.

“도련님의 표정도 저 못지않은 것을 보니, 무척 아쉽지요?”

“하하.”

“쯔읏. 도련님을 주목하고 있는 눈들만 아니었어도.”

칼브란은 못마땅하다는 듯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황제가 레와티움을 움직였다는 것.

그만으로도 조심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거기다 살리카 그것들은 뭔 냄새를 맡았는지 자꾸 기웃대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연회를 연다?

세작들에게 ‘어서 오십쇼, 내 비밀을 전부 까발려드리겠소이다.’ 하는 꼴과 다름없었다.

몸을 사려야 할 때란 것인즉.

그래도 아쉬움은 어쩔 수 없어 칼브란의 푸석한 기미가 더욱 진해졌다.

이에 이안은 다독이듯 칼브란의 팔을 살짝 짚었다.

하지만 연회에 관한 얘기는 굳이 장황할 필요가 없기에.

이안은 눈을 둥글게 휘며 교묘하게 주제를 돌렸다.

칼브란이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 그 건을 꺼내 들면서.

“칼브란, 아버지께서 허락하셨어? 그 건에 대해.”

“아…… 예. 도련님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

“가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밀고 가라 하셨습니다. 언제나 뒤에서 받쳐줄 테니.”

“……아버지께서.”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

이안은 아버지가 보내오는 한결같은 마음에 든든해졌다.

이게 어디 보통 뒷배던가.

아버지의 헛기침 한 번이면 제국이 흔들릴 정도의 뒷배가 아니던가.

이안의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직각으로 치솟은 어깨에 비례해 칼브란의 안색은 더욱 누글누글해졌다.

‘이김에.’

그의 손에 들린 것까지 덧대어진다면 도련님의 기쁨이 배가 될 터.

칼브란은 가져온 크리스털 상자를 재빨리 이안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거. 도련님께서 신경 써서 가져오라 하신 물건입니다.”

* * *

잠시 후.

이안은 다시 기숙사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응접실에선 한창 송별회가 진행 중이었다.

중앙 아카데미로 가는 아이들을 위한 것.

축하하기 위한 자리라 송별회라도 그리 분위기가 어둡지 않은…….

“야, 이 좋은 날에 왜 죽상이냐.”

……것만은 또 아닌 모양이다.

이안은 아이들의 가라앉은 말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누가 죽상이라고. 그냥…….”

“해리 쟤가 괜히 저러겠냐. 서운해서 그러지.”

“하긴. 솔직히 나도 좀 싱숭생숭하긴 하다. 이렇게 맨날 같이 붙어있다가 곧 찢어진다니까.”

“그치. 애들이 중앙 아카데미에 가는 건 좋은데…….”

“몇 명 빠진 수련을 생각만 해도 좀 그래.”

얘기가 길어질수록 분위기가 급속히 흐려졌다.

먹구름이 잔뜩 끼자, 듣고만 있던 올리브가 탁자를 쾅쾅 내리쳤다.

“야, 이것들아. 손에 손잡고 울라고 모였냐?”

“아, 누가 운대?”

“지금 헤어진다고 영영 안 볼 것도 아닌데 웬 청승들이야.”

“이런 말 하기 싫은데 웬일로 올리브 말이 맞네. 생각들 해봐. 넉 달 전만 해도 우리가 이런 걸로 얘기를 나눌 줄 누가 알았겠냐.”

“그니까. 다 같이 얼싸안고 2학년이 될 줄 알았지. 에잇. 괜히 처지지 말고 축하만 하자.”

“그래, 그러자. 서로 자주 연락하면 되지.”

“자자, 진정들 하시고. 다들 이안 오기 전에 얼른 표정 단속부터 해라.”

“그러자. 우리 표정을 보면 떠나는 대장 마음이 편할 리 없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거린 아이들은 환기하자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포도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또…… 포도 주스다.

혈기 왕성한 남자애들이 모여 일탈 따위를 꿈꾸지 않는다.

늘 건전하고 다소곳하게 수다만 마구 떨어댈 뿐.

‘그때랑 같네.’

2학기 초 저를 위해 아이들이 연회를 열었을 때, 그때와 완전히 판박이였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넉 달도 전의 일이었다.

좋은 시간은 눈 깜빡할 새 흘러간다더니 정말 그랬다.

그리고 그만큼 아쉬웠다.

미련이 남긴 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토대가 되지 않겠는가.

표정을 갈무리한 이안은 문을 열고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장에 시들시들하던 공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환한 기색.

아이들은 마냥 밝은 얼굴을 한 채로 오두방정을 떨었다.

“이안, 왜 이제 와? 볼일 보고 금방 오겠다더니.”

“나는 대장이 연회 다 끝나고 오는 줄 알았다.”

“이럴 때 꼭 어디 가선 감감무소식이더라.”

아이들의 타박 아닌 타박에 이안은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아쉬움에서 나온 소리임을 알기에 그랬다.

“원래 주인공은 늦는 법이야.”

이안은 무거워지지 않으려 유들유들하게 응수했다.

아마 제 눈썹이 약간만 찌그러져도 이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을 것이다.

하여 이안은 솜털 하나 구기지 않고 응접실 저 안쪽으로 들어갔다.

네모난 탁자의 중앙.

어느샌가 이 자리가 그의 지정석이 되었다.

그가 있든 없든 늘 비워진 자리.

그 자리에 멋들어지게 앉으며 이안은 유들유들함을 이어갔다.

“그리고 주인공이 늦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단다.”

“그렇담 그 이유, 들어나 봅시다.”

“나만큼이나 멋진 놈을 구하느라 늦었지. 이 연회를 빛내줄 쌈박한 걸 구하느라.”

이안은 싱긋 웃으며 탁자에 크리스털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는 그의 말을 증명하는 듯 눈부시게 번쩍거렸다.

“일단 다들 하나씩 먹어.”

“대장이 그렇게 자신하니 얼마나 쌈박한 놈일지 봐볼까.”

이안이 권하니까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상자를 열어젖혔다.

그러자마자 코를 찔러오는 겨울의 냄새.

상자에서, 아니 검은 환약에서부터 그런 향이 퍼져 나왔다.

“이거…….”

“바람의 가시 아냐? 불의 가시랑 똑같은.”

“근데 이걸 왜……?”

불을 제외하고 바람이든 뭐든 ‘가시’란 단어가 붙은 영약은 4대 가문에서만 구할 수 있다.

대지는 발리올에서만, 물은 루하흐에서만.

다른 획득 경로가 없기에 특히 가시는 그 가치를 좀 더 높게 평가받는다.

아이들이 의문을 품은 채 쳐다보자 이안은 바로 말을 덧댔다.

바람의 가시를 주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형평성에 어긋나지. 다 같이 노력해서 우승했는데 보상을 열 명만 받는 건.”

“이, 이게 진짜 우리 거라고?”

“노력한 만큼 보상은 제대로 받아야지 않겠어?”

하나씩 가져가란 이안의 말에 아이들은 쭈뼛쭈뼛 영약을 챙겼다.

지난번과 반응이 사뭇 달랐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주는 대로 덥석 받아먹었던 예전과는.

주니까 받긴 하는데 이게 얼마나 큰지 이제는 아는 눈치였다.

차마 먹지 못하는 아이들.

녀석들을 향해 이안은 단호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겨우 영약일 뿐이야. 내가 못 구하는 것을 무리해서 주는 것도 아니고.”

“…….”

“정당한 보상을 받는 거에 익숙해져야 할 거야, 이제부턴.”

정당한 보상.

이 말보다 듣기 좋은 울림을 주는 건 많지 않았다.

결국, 잠깐 망설이던 아이들은 전부 영약을 입안에 넣고 씹어 삼켰다.

꿀꺽.

영약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걸 확인한 뒤였다.

‘영약도 먹였으니 이제.’

이안은 무심하게 상자를 두드리며 가장 하고 싶었던 얘기를 툭 던졌다.

“다들, 나랑 같이 뷔트시겐으로 가자.”

“……케엑!”

이안의 폭탄 발언에 아이들은 너도나도 사레가 들려서 가슴팍을 퍽퍽 쳐댔다.

방금 먹은 영약이 거세게 역류했다.

그들의 당황한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