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장장 30분째 침묵만 흘렀다.
시간이 얼마가 흐르든 입을 여는 아이들은 없었다.
다들 숨 쉬는 것마저 잊은 채 이안만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들은 말이 진짜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리벙벙한 분위기 속.
“같이 뷔트시겐으로…….”
적막을 깨트리는 중얼거림 하나가 응접실을 메웠다.
중얼거림의 주인은 올리브였다.
올리브는 고장 난 것처럼 이안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제가 뷔트시겐에 영입된다?
지나가는 개가 ‘꿈 깨’라며 왈왈 짖을 일이었다.
그 정도로 제가 들은 말은 현실성이 없는 얘기였다.
<까놓고 말해 난 못 보겠다. 너희들이 가문으로 돌아가 개죽음당하는 꼴은.>
<그건 아무 가치 없는 죽음일 뿐이니까.>
<나와 가자. 너희의 존재가 정당한 보상이 될 수 있는 뷔트시겐으로.>
정당한…… 보상.
이안의 마지막 말이 올리브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까놓고 말해 지금껏 보상이라는 것을 받은 적이 있던가.
없었다.
올리브 필로스, 필로스 가의 한미한 방계인 저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해도 보상을 요구할 수 없었다.
제 쓰임이 그러했으니까.
아니지, 제 쓰임이 그러하다고 윗사람들이 그리 정했으니까.
그들은 방계의 봉사와 헌신을 당연시 여겨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저 책상 옆에 놓인 의자와 비슷하려나.
지극한 당연함에 그것은 항상 천시되고 항상 함부로 대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불현듯 올리브의 뇌리로 구석에 밀어두었던 기억 하나가 튀어 올랐다.
제 나이 8살, 장마가 심하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이웃인 해럴드 가가 몰살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래된 인연으로 돈독하게 지낸 탓에 그 충격이 꽤 컸던 사건.
충격이 컸던 것은 비단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몰살당한 이유가 가관이라 더 그랬다.
착취를 견디지 못한 해럴드 가가 항변하니까 짜증 난다고 어느 직계가 죽인 거였으니까.
어이없는 이유인데, 방계라는 건 그렇게 다룰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존재지.’
세상이 정한 틀 안에서 버둥거리다 해럴드 가에 닥친 비극처럼 죽을지도 모를 존재였다.
“……후우.”
어지러운 상념들을 이어가던 올리브는 마른세수했다.
본디 그런 것을 되새김질해봐야 신물만 나올 뿐이다.
올리브는 그 여름을 묻어버리듯 생각을 봉합해버렸다.
그런 뒤 아이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이안을 뚫어지게 직시했다.
최악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이안은 여지없이 최상의 것을 내밀었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며.
노력한 만큼 뺏기지 않고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며.
‘그리 말해주는데…….’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늘 똑같아서, 그냥 이안 뷔트시겐이라서 따라가고 싶어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로 그런 마음이 샘솟았다.
염치없지만 그러고 싶었다.
“나는…… 따라 갈란다.”
지금은 약해서 도움이 안 되겠지만 노력하면 된다.
죽을 만큼 노력하면 언젠가 이안을 도울 날이 올지도 모르지.
올리브의 발언에 아이들 모두 침을 꼴깍 삼켰다.
가고 싶어도 차마 뱉지 못했는데, 용감하게 올리브가 먼저 선을 끊은 것이다.
“캬캬캬. 너희들도 그러고 싶잖아. 뭔 내숭을 떠냐.”
“그게…….”
“뭘 망설여?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해? 뻔뻔하게 굴며 손을 잡아.”
“…….”
올리브는 눈알만 굴리는 아이들을 두고 일어섰다.
머리를 쥐어 짜가며 심각하게 구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았다.
제가 원하는 건 단순했다.
봉사와 헌신이 방계의 쓰임이라면 충성하고 싶은 상대는 한 명뿐이었다.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면 지금처럼 한 명에게 받고 싶다.
바로 이안 뷔트시겐.
그저 발리올로 태어나서 발리올로 산 것뿐, 충성심은 별개였다.
제 주군은 현재 스스로의 의지로 정했다.
올리브는 성큼성큼 망설이지 않고 이안에게로 다가갔다.
“멋진 형님, 이 아우가 한 번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시커먼 놈은 사절인데.”
“와아, 그런 차별적인 발언은 별로다.”
“별로여도 거절.”
“캬캬캬.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얘들아 뭐하냐.”
올리브는 손을 내젓는 이안을 보며 짓궂게 외쳤다.
올리브의 선동에 아이들은 우르르 일어나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양새가 푸드덕대는 장닭 같았다.
오지 말라는 이안을 둘러싸고 아이들은 마구 포개졌다.
실로 난장판이 아닐 수 없었다.
선선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던 이안과 그 바람을 산산조각 내는 아이들.
캬캬캬, 까마귀 같은 웃음이 오랫동안 응접실을 장악했다.
‘도련님은 제 사람을 얻으셨구나.’
칼브란은 그들의 모습을 멀찍이 문가에서 지켜보며 훔훔한 미소를 띠었다.
사람의 마음을 사고 충성을 끌어내는 것.
이는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안은 어떤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이뤄냈다.
어찌 대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여 칼브란은 괜스레 시큰해져 오는 콧대를 꾹 찍어눌렀다.
사실 이때는 아무도 몰랐다.
칼브란도, 이안도, 이안을 따라가겠다고 했던 아이들조차도.
지금의 결정이 이안의 친위대, 그 시작이었음을 말이다.
버림받은 방계나 간다는 에루리안 출신.
십몇 년간 페이라조를 벗어나지 못한 실력.
머리 색만큼이나 완벽하게 다른 뿌리.
이안의 친위대, 그 여정의 첫발은 이토록 초라했었다.
그리고 뿌리가 다른 친위대의 구성.
이는 히에로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있는 일이었다.
이후로 그 강력함을 알고 누군가가 시도해 봤으나 전부 실패했다.
뿌리가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몇 세대에 걸친 실패 후 결국, 이안의 친위대는 전설을 넘어 범접 못 할 위업으로 회자 되었다.
* * *
이곳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헤어짐에는 정리가 필요하니까.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 에이프릴을 만나러 온 공용 정원.
장미 정원이라는 별칭을 가진 에루리안답게 이곳에도 장미가 만발했다.
클라키에스 로즈,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장미의 청량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에이프릴의 다감한 말투를 실은 채로.
“우승, 축하해.”
이안은 에이프릴의 축하에 화답하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솔직하게 축하보다는 에이프릴의 말간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의 안색이 밝아선지, 에이프릴 또한 눈가를 곱다랗게 휘었다.
언제나 좋은 것은 쉬이 전염되기 마련이다.
“이제 완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 1장로님과 약속한 유예 기간은 끝났으니까.”
“기다렸다는 듯 원로원에서 성화지?”
“살짝. 그래도 아버지께서 쪼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신 뒤론 좀 나아졌어.”
“아, 그렇다니 다행이네.”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레 원로원으로 흘러갔다.
그에 대해 할 말이 있었던 이안은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천천히 입을 뗐다.
“에이프릴 너는 어때?”
“응? 나?”
“2장로와는 얘기해 봤어?”
“아, 내 지지 세력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거?”
“진척이 있나 궁금해서.”
“잘 해결됐어.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더니 도와주시겠대.”
“잘됐다.”
“실은 나도 2장로님이 아주 흔쾌히 허락해서 솔직히 조금 놀랐어.”
“흔쾌히…….”
이안은 에이프릴이 한 말을 곱씹으며 2장로의 심중을 짐작해 보았다.
에이프릴이 가주의 대의를 위해 강제로 결혼하는 것.
에이프릴의 결혼 상대가 제 혈육을 죽인 자라는 것.
2장로 역시 이 두 가지가 껄끄럽고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에이프릴을 다섯 살까지 키운 건 그녀였으니까.
어느 어미가 딸자식을 벼랑 끝으로 몰랴.
아마 2장로의 결정은 어미의 마음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마음이라면 쉬이 변덕을 부리지는 않을 터.
에이프릴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내뱉는 말투가 무척 확고했다.
“2장로님께 확답받고 내 뜻을 아버지께 전달했어. 후계자 싸움에 끼어들겠다고.”
“아.”
“아버지께서 쓸데없는 짓 말라고 하셨지만…….”
“가주가 그리 말한다면 지금 ‘이게’ 너에게 가장 필요할 거야.”
에이프릴의 말꼬리가 흐려지자, 이안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돌돌 말아진 양피지 10개.
받으란 이안의 눈짓에 에이프릴은 얼결에 받았다.
그녀는 양 손바닥에 넘치게 받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들부들한 가죽의 겉면에 찍힌 발바시아 나무의 인장.
굉장히 낯익은 것이었다.
“이거……?”
“중앙 아카데미로 갈 수 있는 추천서.”
“이걸 왜…….”
“까놓고 말해 2장로가 도와줘도 갈 길이 멀 거야.”
“내가 이 에루리안에 있으니까?”
“어. 다른 장로들에게 신뢰를 주기는 어렵겠지.”
후계자 경쟁을 하겠다는 후보가 에루리안에 남아있다?
이는 충분히 자질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과연 후보가 후계자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두가 인정할 만한 실력은 지니고 있는지.
누군가가 걸고넘어질 만한 일을 놔둘 필요는 없잖은가.
“꼬투리 잡힐 만한 일은 미리 제거해야지.”
“실은 나도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어. 잡음이 사라지게 하려면 중앙에 진출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에이프릴은 양피지의 겉면을 살며시 손가락으로 쓸었다.
1년 전 중앙 아카데미 입학원서를 찢고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다시 중앙으로 갈 방법을 모색하게 될 줄은.
그래도 후계자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선 필요한 관문이었다.
후계자가 되어야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으니까.
“그래서 수도 근처의 아카데미로 옮길 방법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아카데미가 수시로 갈아신는 신발도 아니고 아무 때나 옮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신 추천서가 있는 경우에는 이동이 허락된다.
이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는 이때, 공교롭게 이안이 추천서를 건넨 것이다.
양도 가능한 10개 전부를.
에이프릴은 이안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보았다.
다소 무심해 보이는 얼굴 뒤에 숨은 마음을.
“이 추천서를 함께 가고 싶은 아이들에게 주라는 거지?”
“어. 네가 믿을 수 있고, 너를 도울 수 있는 녀석들에게.”
“내 사람을 만들라는 거구나.”
“지금 중앙에 가면 너 혼자서는 힘들어. 이미 거긴 세력의 판도가 굳혀졌을 테니까.”
학기가 시작되고 벌써 1년이 지났다.
이는 곧 중앙의 아이들은 그 시간만큼 함께 부대꼈다는 것이다.
이미 파벌이 형성된 곳에 돌 하나가 굴러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온갖 텃세가 쏟아질 것이다.
그를 상대하려면 자신만의 조력자가 필요하다.
더더군다나 중앙 아카데미이니 말해 뭐하랴.
그곳의 파벌 싸움은 어른 싸움의 축소판이라 에루리안보다 더 치열하고 심히 비열하기까지 하다.
하여 더더욱 조력자가 없으면 안 된다.
“조금 힘들겠지만, 지금은 이 수가 최선이니까.”
“강제 결혼에 비하면 힘들 것도 없어.”
에이프릴은 굳은 의지를 내보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가 중앙으로 가면 아버지도 더는 뭐라 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
“정말 고맙긴 한데, 이걸 날 주면 C반 애들은 어떻게 돼?”
“우리 애들은 나와 갈 거야.”
“이안 너랑?”
“어. 뷔트시겐으로 옮기기로 했어. 다 같이.”
“다 같이……. 생각지도 못한 결과네. 잘됐다. 서로 헤어지기 아쉬웠을 텐데.”
에이프릴은 정말 다행이라는 것처럼 환하게 미소를 내보였다.
그간 봐온 바로 C반의 유대는 형제처럼 끈끈했다.
그저 친구에 머물렀던 1학기에 비하면 눈에 확 띄는 변화였다.
그렇기에 그녀 또한 C반이 갈라지는 것에 대해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약간 그런 거와 비슷했다.
잘 읽어 내려가고 있는 책이 순탄하길 바라는?
에이프릴에게 C반은 그런 쪽에 가까웠다.
“진짜 잘 됐어.”
같은 반도 아닌데 몰입은 최고조였다.
그래서 자꾸 만족의 웃음이 새어 나온 찰나.
에이프릴의 환한 미소를 가리려는 듯 거센 바람이 확 불어닥쳤다.
그로 인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에이프릴의 얼굴을 슬쩍 덮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그게 눈에 걸려 이안은 에이프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차가운 귀 끝에 감기는 따스함과 부드러움.
손끝이 절로 움찔거리는 감촉에 에이프릴은 느리게 손을 말아쥐었다.
“에이프릴.”
“……응?”
“언제든 힘든 일이 있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언제든.”
“그럴게. 욕하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잔뜩 적어서 서신을 보낼 거야. 기대해.”
“꼭 그렇게 해.”
에이프릴이 도움을 청하면 그게 무엇이든 도와줄 것이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에이프릴은 자꾸 신경이 쓰이는 존재였다.
자꾸 간섭하고 챙겨주고 싶어지는 존재.
그래서 이안은 번번이 에이프릴을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