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떠났네요.”
스톨레는 제 곁에 있는 클로에의 하얀 얼굴을 직시했다.
아이들이 떠난 지가 언젠데…….
클로에는 워프 게이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서성거림에 만감이 교차했다.
자랑스러움과 기특함,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염려가 뒤섞인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잘 해낼 것을 아는데도…….”
“어쩔 수 없이 걱정하게 되죠. 그게 스승이니까요.”
“그래도 이안과 함께 떠나서 큰 염려는 되지 않네요.”
“그렇죠. 이안이라면.”
스톨레는 긍정을 한 뒤 화려한 안대 끝을 문질렀다.
C반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에루리안을 조기 졸업했다.
실상 아카데미의 조기 졸업이 허락되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이다.
가문에서 어떤 이유로 학생을 데려가거나, 혹은 불세출의 천재라서 배울 게 없을 때.
물론 두 가지 모두 극히 드문 경우이다.
특히 가문에서 데려가는 전자는 아무리 직계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성과를 보여야 하기 때문.
한데 그 어려운 걸 C반이 해냈다.
“에루리안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 일어났네요.”
“그러네요. 한 반이 전원 동시 조기 졸업으로 아카데미를 떠나는 일은 지금껏 없었죠.”
“누가 알았을까요, 클로에 교수님.”
“무엇이 말인가요.”
“에루리안, 그것도 C반이 이런저런 일들에서 ‘최초’를 달게 될 줄 말입니다.”
파라칸시스 시합에서 C반이란 명패를 달고 최초 우승.
향후 몇백 년간은 깨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점수.
C반 최초로 중앙 아카데미 추천서를 받음.
다시 생각해 봐도 놀라운 일이었다.
아이들이 이뤄낸 성과를 클로에 역시 되짚어 보는 모양이다.
그녀의 밝지 않던 안색이 일순간에 걷힌 걸 보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이니 꼬시긴 하네요. C반을 무시하는 교수들에게 한 방 먹인 거니까요.”
“그래서 이런저런 말들이 돌지 않습니까. C반이 불법 물약을 복용했다, 걸리지 않는 편법을 썼다, 그런 말들이.”
“대부분이 시기와 질투뿐이죠. 다들 남 잘되는 꼴은 못 보잖아요.”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건조하게 내뱉은 스톨레의 음색에는 옅은 경멸이 묻어나왔다.
사람은 다 제각각이고, 모두가 제 생각처럼 앞뒤가 다른 면을 선보이는 건 아니다.
아는데도.
정령사 협회의 일원으로 살며 인간의 어두운 면을 더 자주 접한 탓일까.
어느새 직업병처럼 인간 혐오가 그의 밑바탕에 깔려버렸다.
그렇기에 사람을 그닥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스톨레는 클로에의 동그란 안경 선을 덧그리듯 응시했다.
눈이 깜빡거릴 때마다 풍성한 속눈썹이 함께 움직였다.
나비의 날갯짓 같다.
그 고운 선만큼 모나지 않은 성격의 클로에는 참 괜찮은 인간이었다.
“클로에 교수님.”
“왜 또 그렇게 은근히 부르세요? 괜히 겁나게.”
“하하. 불같은 교수님도 겁내는 게 있군요.”
“나도 사람인데 그럼 없겠어요.”
“이번은 겁을 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하나 묻고 싶을 뿐이니까요.”
“무엇인데요.”
“혹 클로에 교수님도 떠나시나요?”
“아,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스톨레 교수님께 말하려 했는데.”
“했는데? 이거 참 섭섭합니다. 10년의 인연이 겨우 이 정도일 줄은.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스톨레는 가슴팍을 쥐며 미간을 구겼다.
그의 엄살에 클로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능청으로 생사람 잡지 마시죠, 스톨레 교수님.”
“정말 마음이 아파서 그럽니다.”
“말하려 했다니까요. 당연히 교수님과는 인사를 나눠야죠.”
“하하. 알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클로에 교수님이 떠난다 하니…… 나도 이만 떠날까 싶네요.”
“교수님도요? 아……. 교수님도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긴 하겠네요.”
“예, 사라져버렸죠.”
스톨레가 에루리안을 떠나지 않은 건 순전히 기드온 때문이었다.
한데 그자는 죽어버렸고, 자연히 그 목적 또한 증발해버렸다.
“클로에 교수님.”
“예?”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를 위해, 교수님이 머무는 저택의 별채에 방 한 칸 마련해주시죠.”
“후후. 방 한 칸. 살리카로 영입해 달라는 건가요?”
“교수님이 허락하면요.”
“허락이 필요한가요. 스톨레 교수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인데. 그런데 과연 교수님이 견딜 수 있을까요.”
“아, 교수님 옆에 붙은 혹을 미처 생각 못 했네요. 아무래도 살리카 가주와의 한 지붕은 재고해 봐야겠군요.”
“그것 보세요.”
스톨레는 짓궂은 낯의 클로에를 빤히 보았다.
그저 말갛기만 한 속내.
그 모습이 오늘따라 달리 느껴져 스톨레의 시선이 길어졌다.
왠지 집요하게 달라붙자 그 의미를 짐작한 클로에가 눈가를 말아 접었다.
“난 염려 마세요. 이미 각오를 단단히 다졌으니까.”
“모든 일이 각오만으로 해낼 순 없죠.”
“이번은 달라요. 내 아이들의 스승으로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까요.”
“…….”
“저 어린 것들도 성장해서 떠나는데, 스승이 되어 한 자리에 머물 순 없죠.”
단호한 클로에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스승이란 언제나 제자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에루리안을 떠나는 것이라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았다.
어떤 아쉬움도, 그 어떤 미련도.
* * *
대부분이 떠나고 적막해진 에루리안.
사각사각.
학장은 마법등이 하나만 켜진 학장실 책상에 앉아 서신을 작성했다.
《……인사와 구구절절을 생략하라고 명 하셔서 본론만 적어 보냅니다.
지금껏 이안을 관찰해 온바, 가문에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는 세간의 소문은 가짜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능숙하고 노회한 면모로 보아, 뷔트시겐 가주가 어릴 적부터 훈련을 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뷔트시겐 가주가 제 아들을 에루리안에 보낸 것은 뷔트시겐의 전력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로 보입니다. 하니, 뷔트시겐의 전력을 다시 파악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클로에 님 말입니다. 심경의 변화에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혹시 몰라 파보라고 명하셨던 알리노헤르와의 마찰 역시 어떤 내막도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쓴 학장은 끄적거림을 멈추고 내용을 점검해 보았다.
군더더기가 있는지, 쓸데없이 말만 길지 않은지.
서신을 읽을 그분이 싫어할 만한 것은 전부 빼려 노력했다.
몇 번이나 점검해 본 후.
학장은 다시 한 땀 한 땀 눌러 서신을 채워나갔다.
《마지막으로 이안은 곧장 뷔트시겐 가로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중급 시험을 치르기 위해 수도로 향했습니다.
이는 감시자를 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적어야 할 게 너무도 많았다.
이안이 떠난 현재 마지막 보고서였기 때문이다.
더는 정기적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인즉.
무사안일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고비인 셈이었다.
하여 학장은 어느 때보다 정성을 들여 살리카 가주에게 보낼 보고서를 적어 내려갔다.
* * *
킁킁.
“수도다. 사치스러운 이 도시의 냄새.”
코를 벌름대는 올리브의 목소리가 무척 깨발랄했다.
어쩐지 목줄 풀린 강아지 같았다.
그 모습에 끈을 약간만 조이려는 듯.
“저, 저 설레발. 벌써 오두방정이 하늘을 찌르네.”
곧장 레브의 타박이 뒤따랐다.
사실 레브의 말처럼 올리브가 설레발치는 건 맞았다.
이제 막 워프 게이트를 통과한 터라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아직 이동진 사무소 안이었으니까.
보이는 거라곤 사면을 둘러싼 지르콘 석벽뿐.
수도의 바깥 풍경이 어떤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좀 오두방정이 심해도 바깥이 떠들썩하긴 하다.”
이안은 공기 중에 실려 오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소란스러움이 고막으로 밀려 들어왔다.
음유시인의 노랫소리,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 각종 향신료가 버무려지는 맛있는 소리, 짐마차가 빠르게 굴러가는 소리.
사람이 섞여 살아가는 냄새가 들려왔다.
사치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활력은 넘친다고 해야 하나.
“저 바깥 구경하려면 일단 통행 심사부터 받자.”
“그러자. 빨리 나가고 싶다.”
이안의 고갯짓에 레브와 올리브가 즉각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가 됐든 통행 심사를 받아야 수도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다.
하여 세 사람은 곧장 워프 게이트를 벗어나 길쭉한 회랑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수도로 나가기 위한 첫 관문.
회랑의 천장에는 제국의 건국 과정이 세밀하게 부조되어 있었다.
부조는 하나하나가 신성하고 엄숙하게 광채를 발했다.
‘죄 금덩이라 더 그렇게 보이는군.’
누가 봐도 과시용이었지만 천박하지 않은 고상함이 넘쳐흘렀다.
그를 위해 예술가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을지.
절로 시선을 강탈하는 천장만 보느라 고개가 아프기 시작할 즈음.
세 사람의 눈앞에 사무소의 마지막 건물이 보였다.
저곳이 수도 라에라트에 발을 디디기 위해 필히 거쳐야 하는 종착지였다.
일명 입국 심사장.
심사장은 2층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1층은 인간이나 자국민들이, 2층은 수인이나 외국인이 주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열 명의 심사관들.
심사관 중 왼편에 앉아있는 근육질의 남자가 서류를 뒤적이며 누군가를 호명했다.
“아쳐 롬바트.”
부름에 이안의 옆에 있던 사람이 후다닥 그 앞으로 갔다.
분주한 동선을 자연스레 따라가자 눈에 딱 걸리는 게 있었다.
심사관들이 뭐랄까.
죄다 눈 밑이 시꺼멓고 안색이 누렇게 떠 있었다.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피로감이 누적되어 그런 듯했다.
하긴.
하루 기준 수도에 드나드는 사람만 어림잡아도 천여 명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진상 한 둘쯤 없을까.
사람 셋만 모여도 그중 하나는 또라이라는 말이 있는데.
다양한 사람을 상대하려니 시든 브로콜리가 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도 심사관들은 사람 좋은 낯을 하곤 이안 일행을 맞이했다.
결코,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사랑합니다, 여행자님.’이라고 써 붙여진 얼굴에서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진달까.
참으로 직업 정신이 투철했다.
“어서 오십시오, 중앙 대륙의 영원한 번영이며 황금 가지이자 여신의 총애를 받는 정령제국 히에로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심사관은 더럽게 긴 인사말을 밝게 늘어놓았다.
옷이 터질 것 같은 이두박근과 정반대로 무척 나긋한 목소리였다.
“우선 신분을 증명할 패를 보여주십시오.”
“여기.”
이안은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패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늑대 모양의 패.
담녹색 패의 꼬리 부분이 ‘나 누구야.’를 과시하듯이 영롱함을 뽐냈다.
……이거.
철벽의 부드러움을 자랑하던 심사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뷔트시겐 가 도련님이 왜 이곳으로?
4대 가문의 직계들이 사용하는 전용 심사장은 따로 있지 않던가.
거길 사용하지 않은 것에 의문이 든 찰나,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심사관?”
“크흠. 대 뷔트시겐 가의 적자이며 온당한 후계자인 이안 뷔트시겐 님, 신분 확인되셨습니다.”
“…….”
“그럼 수도에 온 목적을 말해주십시오.”
“관광.”
“예?”
“겸사겸사 에르그 승급 시험도 보고 뭐 이것저것.”
“아, 알겠습니다.”
4대 가문 중 누구도 수도에 관광을 목적으로 오지는 않는다.
경치 좋고, 물 좋은 본인들 땅 놔두고 올 필요도 없거니와.
심사 절차 중 하나에 거부감이 극심하기 때문이다.
하여 심사관은 관광이란 말에 또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얼른 표정을 수습한 채 패를 제 앞에 놓인 넓적한 그릇에 담을 뿐.
풍덩.
담녹색 패가 그릇에 담긴 맑은 액체를 흡수하며 연신 빛을 발했다.
어떤 술식들이 새겨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현상이었다.
‘감청, 위치추적, 마력 제약, 정령 구속.’
이안은 그것들이 마뜩찮아서 곧게 눈썹머리를 내려트렸다.
정말이지 비인간적인 술식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이 모든 건, 수도 방비가 목적이었으니까.
그나마 못마땅함을 달래주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이 술식들이 상시 발동되는 건 아니란 거지.’
수도에 들어온 누군가에게서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될 때, 그때에만 발동되어 추적을 용이하게 한다.
목적이 분명하고 명분도 있지만 참으로 껄끄러웠다.
‘이게 맘에 안 들면 수도에 들어오지 마.’라는 실로 제국에 걸맞은 패기랄까, 만용이랄까.
입술을 비튼 이안의 눈치를 보며 심사관이 그릇에서 뺀 패를 내밀었다.
“모든 절차를 끝마쳤습니다.”
“흐음.”
“이곳에서의 시간이 즐거우시길 바라겠습니다, 뷔트시겐 공자님.”
옅게 고개를 까닥인 이안은 사무소 바깥으로 한발을 내디뎠다.
드디어 수도였다.
꼬인 매듭을 풀어 결착을 낼 수 있는 곳.
이안은 쨍한 해를 가리며 저 멀리 북쪽을 응시했다.
……황궁이 있는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