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모두의 놀라움을 안은 채 장소를 바꿔 치른 두 번째 시험, 이론.
이번 역시 넓은 공간에 이안과 감독관들뿐이었다.
설마 중급 시험을 치르는 게 이안 뿐이겠는가.
오늘만 해도 뷔트시겐 지부에 모인 응시자만 백여 명이다.
그런데도 이안이 줄곧 혼자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협회 나름의 이유가.
‘이안 뷔트시겐 저자를 면밀하게 분석할 기회는 흔치 않지.’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그를 살펴볼 겨를이 생기랴.
이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협회의 꿍꿍이속은 그랬지만.
“무슨 시험지가…….”
정작 이안은 시험지만 들춰보며 쪽수를 살피기 바빴다.
시험지 두께가 소설책 수준이었다.
아버지도 처음 시험지를 받고 오늘 안에 풀 수 있을까 싶었다던데.
왜 그런 심정이었는지 막상 닥쳐보니 알 수 있었다.
사람 당황하게 하는 쪽수에도 이안은 재밌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심으로 즐거웠다.
승급 시험이라는 건 그간의 노력을 객관화하는 거였으니까.
이안은 기껍게 시험지의 첫 번째 문제를 읽어내려갔다.
〔히에로스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의 위업은 바다를 이룰 만큼 많다. 그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꼽자면, 히에로스를 정령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황제가 인간 최초로 정령계로 넘어가 여신을 만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여신의 재위를 도운 대가로 이 축복을 받았다.
초대 황제가 축복의 증표로 받은 정령과 그들의 생태에 관해 자세히 서술하시오.〕
지문이 길고 장황했다.
좀 전에 살펴본 바론 대부분 문제가 이런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읽기 빡빡했지만 그래도 첫 번째 문제는 쉬웠다.
레브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정령을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이안은 답을 거침없이 적으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초반에는 건국이나 제국에 관한 문제 위주였다.
제가 일곱 살에 다 섭렵한 지식.
수월히 풀다 보니 1시간 만에 51번 문제였다.
어느덧 중반을 넘어가자 문제의 유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영혼의 맹약은 두 시전자의 근원을 한데 묶는 저주이다. 저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쪽이 받을 대가를 다른 쪽이 온전하게 감당할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한 술식을 상세히 나열하시오.〕
짧은 지문으로 이루어진 문제뿐 아니라.
〔번개 정령이 가장 좋아하는 건 별사탕입니다. 자신의 형태와 닮았다는 이유로 좋아한다고 하죠. 그럼 번개 정령이 별사탕을 먹었을 때 내뱉는 정령어를 그대로 적으세요.〕
출제자가 바뀌었나 싶게 발랄한 문제도 간혹 섞여 있었다.
이런 식의 유형 변화는 순전히 응시자를 위한 거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걸 막기 위함.
‘이유가 뭐든 재밌긴 하네.’
이안은 시험지를 톡톡 두드렸다.
기록을 남겨야 하는 시험만 아니라면 음미하며 풀고 싶었다.
그 정도로 아쉬웠으나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남들처럼 종일 걸려서는 가산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빨리 풀수록 점수가 높으니까.’
문제를 훑는 이안의 눈과 손이 점점 더 빨라졌다.
* * *
두 번째 시험을 신속하게 마친 후.
이안은 가장 중요한 실기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실기는 다섯 가지를 봅니다. 마력과 체력, 통제력과 지배력 그리고 전체적인 균형.”
“…….”
“이들 가운데 첫 번째로 측정하는 건 통제력입니다.”
시험장의 한가운데서 총감독관이 딱딱한 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시종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공중에 걸린 크리스털에서 유리구슬을 빼낸 뒤, 저 호리병에 옮기십시오.”
설명을 들으며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에 있는 호리병 네 개.
주둥이가 좁은 호리병은 질기고 단단한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각각에는 원소들이 둘러쳐져 있었다.
어떤 건 회오리가 일고, 어떤 건 불길이, 어떤 건 물의 소용돌이가, 어떤 건 호리병 주위로 낙석이 떨어졌다.
‘주둥이가 생각보다 더 좁네.’
이안의 시선이 이번엔 호리병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30m쯤 떨어진 거리?
네모반듯한 크리스털 상자 안에는 유리구슬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저 구슬은 개미가 힘을 줘도 부서져 버린다던데.’
저걸 호리병에 집어넣는다?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가뜩이나 힘든 조건인데, 총감독관이 한 술 더 보태듯 첨언했다.
“아, 구슬을 깨트리는 개수가 5개를 넘어갈 시 곧바로 실격 처리됩니다.”
“5개…….”
감독관의 주의에 이안은 잠시간 골몰했다.
그가 뭔가를 가늠해보는 동안 총감독관은 재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중급 시험은 제한 시간이 없다.
얼핏 좋은 조건 같으나, 이보다 잔인한 방식이 또 있을까.
시간을 끌수록 능력이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인데.
이 구간에서 천재와 범재, 그리고 둔재가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 버린다.
잠시간 말이 없던 이안이 뭘 떠올린 건지 총감독관에게 물었다.
“구슬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어떤 방법을 쓰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야 뭐.”
이안의 웃음이 짙게 쪼개지자 총감독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웃음이 어딘가 모르게 미묘하단 생각이 스친 찰나.
“코르키, 달빛 삼키기.”
이안이 사냥개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그가 입을 뗀 즉시 사냥개가 두 개의 머리통을 주억거렸다.
[크륵!]
그러더니 곧장 은색 털을 부풀렸다.
사냥개의 털이 일제히 일어나며 마력 덩어리들이 새어 나왔다.
반달 형태로 뭉쳐진 마력 덩어리들.
은색 반달을 사냥개는 호리병 쪽으로 쏘아 보냈다.
쇄액. 쇄애액.
예리한 반달은 호리병을 묶고 있는 줄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그 깊이를 확인한 후 이안은 바람을 벼려 반달의 날 부분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러자 반달의 단면이 뾰족해지며 절삭력이 높아졌다.
“……흠.”
명백하게 보이는 이안의 의도에도 총감독관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줄을 끊어 호리병에 걸린 원소 효과를 없애려는 거군.’
줄에는 원소 효과를 만들어내는 술식이 잔뜩 얽혀있었으니까.
하나 그 의도는 실패할 것이다.
왜냐?
호리병을 지탱하는 줄의 소재가 보기에는 일반 천 같아도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풍압이나 고열을 견뎌야 하는데 그냥 천일까.
바다 엘다 나무를 얇게 깎은 것이라 내구성이 무척이나 질기다.
거기다 절삭을 대비한 술식이 걸려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응시자들이 다 그런 방식을 택했겠지.’
총감독관은 어떻게 하냐 보자라는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줄을 끊으려는 응시자가 없었을까.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수차례의 실패 후 아무도 저런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총감독관이 실패를 단언하는 사이.
우지끈.
호리병에 매달린 줄 4개가 동시에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술식들이 흩어지며 호리병 4개가 일제히 낙하했다.
“이게…….”
이안의 성공에 총감독관은 움찔했다.
하지만 얼른 표정을 수습하곤 추이를 지켜보았다.
줄이 끊어져도 술식이 흩어지는 시간은 고작 15초.
그 안에 과연 이안이 구슬을 호리병 안에 넣을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한데 그 단정마저 비웃듯.
후우웅.
이안의 몸에서 뜯겨나간 마력이 공간의 바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급강하하던 호리병들의 낙하가 느려졌다.
스슷. 스스슷.
직후 크리스털 상자에 들어있던 유리구슬들이 하나둘 튀어 올랐다.
구슬들은 실바람을 타고 쏙쏙 호리병의 주둥이로 몰려들었다.
입구가 좁아 한꺼번에 넣는 건 불가했다.
그런 탓에 차례를 기다리며 미끄러지듯 하나하나 들어가는 구슬들.
“허어.”
눈을 홉뜬 총감독관은 벌어진 턱을 다물지 못했다.
스치기만 해도 깨지는 구슬을 아기 솜털 다루듯이 한다.
저러려면 바람을 얼마나 세밀히 통제해야 할까.
감독관이 숨죽여 지켜보는 내내 이안의 집중력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협회 생활 23년 만에 저런 놈은 진짜 처음이었다.
* * *
중급 시험을 끝내고 나니 어스름한 오후였다.
“끝났다.”
이안은 정령사 협회의 뷔트시겐 지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막상 시험을 치를 땐 몰랐는데 끝내고 나니 뭔가…….
마음이 술렁거렸다.
아마 마력핵을 얻으며 생기는 모든 일에 계속 이럴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몇 번이고 반복될 일.
그렇기에 이안은 돋아나는 심상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흘려넘겼다.
숨 한 번에 다 털어버린 후.
“흐음.”
이안은 고개를 지부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돌렸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정령사 협회의 탑.
“근데 묘하다. 여길 내 발로 찾아올 줄은…….”
본래는 그랬다.
측정이란 걸 할 필요 없으니 정령사 협회 거리로 올 일도 없었다.
예나, 몇 달 전이나.
한데 과거 좀 떠들어보자면, 떠돌이 시절 재수 없게 저 탑으로 끌려간 적이 있다.
친하게 지내던 이를 포섭한 탓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예언자는 응당 협회에서 관리하고 분석해야 하거늘.>
<빛의 정령이 없어도 예언이 가능한 특이 체질, 이에 관한 연구가 마땅히 이뤄져야…….>
<사람은 그리 쉬이 죽지 않으니 살을 갈라 심장을 확인해봐야 할 터.>
음침한 협회장이 눈썹을 올리며 낮게 뇌까렸다.
당시엔 그 노친네가 혹 저를 죽일까 얼마나 두렵고 무섭던지.
협회가 아가리를 벌린 흉포한 마수로만 느껴졌었다.
아버지가 친위대를 끌고 와 저를 구해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다신 협회 쪽으로 고개도 안 돌리리라, 다짐하며 침을 뱉었었는데.
“이 역시 장담할 게 못 됐네.”
앞으로 몇 번은 더 협회에 들러야만 한다.
승급 시험을 봐야 했으니 말이다.
재차 콧대를 찡그린 이안은 탑에 물든 오렌지색 석양을 가만히 보았다.
수 분?
밀려오는 기억을 추스르기에는 적당한 시간이었다.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간 이안은 다시금 하늘을 확인했다.
“……시간이 어느새.”
가봐야 할 곳이 있는데 미적대다간 늦을지도 모르겠다.
상념을 끊어내며 어딘가로 향하는 이안의 걸음.
서두는 그림자 속에서 녹스가 아주 조용하게 입을 뗐다.
기척을 감추느라 강제로 묵언 수행 중이라 목청이 작디작았다.
[이제 거기 가는 것이냐? 아이들과 만나기로 한 11번 가?]
-아니, 그전에 들를 곳이 있어.
[아…… 어제 말한 거기?]
-어. 황제를 만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중급 시험을 끝냈으니 남은 목적은 하나다.
황제를 만나는 거.
뷔트시겐의 적자로서 황제에게 독대를 요청할 수는 있으나…….
‘그래선 얻을 수 있는 게 없지.’
황제를 찾아가 ‘실은 내가 알을 먹긴 했지만 우호적으로 지냅시다.’라는 말을 한다?
선뜻 황제가 그래 그러자며 수긍을 할까.
그럴 리 없다.
황제로선 이안이 거슬린다면 치워버리면 그뿐.
겨우 날파리 수준인데 동등한 대화가 될 리 만무했다.
‘그렇기 때문이지.’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선 우선 선행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만 성공하면…….
생각에 빠진 이안의 곁에서 녹스가 재차 입을 열자 옆에서 포로롱 소리가 났다.
녹스가 깃든 텔로스가 추임새를 넣는 것.
청아함은 녹스의 진지한 음색을 한결 가볍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 네놈이 지금 해결하려는 게 모험가 협회의 협회장의 죽음이지?]
-그가 죽고 나서 황권이 극도로 약해지니까.
현재로선 황권과 모험가 협회 사이에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바로 둑스 때문.
[협회장이 죽고 나서 둑스의 관리가 그 작자한테 넘어가서?]
-어. 둑스가 완전히 악용되었지.
수도를 제집 앞마당인 양 활보하는 둑스.
둑스는 안내자로서만 유용한 게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장소를 가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정보통으로서도 쓸만하다.
이러니 누가 둑스를 탐내지 않겠는가.
특히 그자라면 더더욱 그럴밖에.
[에휴. 살리카 가주 그 염병할 놈이.]
-둑스를 이용해 수도를 멋대로 누비고 다니면서 계승 서열이 높은 자들을 전부 죽여버렸지.
이를 위한 살리카 가주의 사전 작업.
그것이 바로 모험가 협회장을 죽이고 둑스를 취하는 거였다.
살리카가 황권을 쉬이 무너뜨릴 수 있었던 시발점.
‘협회장의 죽음만 막아도.’
이것만 해결해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살리카 가주의 음모를 막고, 황제와의 대화에서 썩 괜찮은 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