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45화 (145/214)

제145화

“그나저나 애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올리브의 장탄식은 꽤 여운이 길었다.

그만큼 아쉬움이 크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이에 줄곧 먹기만 하던 이안이 비어드 호그를 내려놓았다.

식탐에도 때와 분위기를 가려야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소속을 옮기려면 정리해야 할 게 많으니.”

“하긴. 영영 헤어진 것도 아니고 일주일 뒤면 볼 수 있는데 내가 괜히.”

괜히가 아니었다.

녀석에게 말을 안 했다뿐이지 그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시간 내서 다음에 다 같이 오자.”

부러 이안은 상황을 무겁지 않게 흘리려고 덤덤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4개월 동안 같이 먹고, 자고, 마시고, 뒹굴었는데 아이들이 생각나지 않을 리가.

하물며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요리를 앞에 둔 상황에서.

이런 속을 드러내지 않으니, 제 말이 꽤 단호하게 들린 것 같다.

올리브의 흐렸던 안색이 괜찮아진 걸 보면.

“약속했다, 이안.”

언제 이안이 약속을 어긴 적이 있던가.

조만간 호그의 휘파람에서 아이들과 돼지 뒷다리를 뜯으며…….

행복 회로를 돌리던 올리브가 또다시 엉성한 비명을 내질렀다.

“으억! 애들을 만나는 건 좋은데 그걸 생각 못 했다.”

“뭘?”

“중급 시험 말이야. 결과가 4일 뒤에 나오잖냐. 만약 떨어졌으면 쪽팔려서…….”

“아아.”

“어이, 이안. 너 시험 잘 봤다고 그런 성의 없는 추임새 넣을래?”

“그러게 평소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잘하셨어야죠.”

“나도 열심히 했거든? 내가 아니라 중급 시험이 잘못한 거거든? 무슨 문제가. 에효효!”

“하하. 그래서 한 문제라도 푸셨수?”

“말도 마라. 지문 읽다가 내가 아주 황천길 가는 줄 알았다. 어후야.”

올리브는 시험이라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저럴 만했다.

녀석은 실기는 뛰어난 데에 비해 글 읽는 것은 극도로 싫어했으니까.

그래도 기억력은 뛰어나서 한번 읽어주면 그건 또 모조리 기억한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올리브가 이번 중급 시험을 치른 비결도 이거였다.

틈만 나면 이안이 출제 예상 문제를 목에 피나도록 줄줄 읊어 준 것.

다행히도 이번 시험이 짚어준 문제에서 나와 답을 적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사악하게 긴 지문이지.

녀석을 아는지라 이안은 물론 레브도 피식 웃고 말았다.

과연 지문을 읽다 자지는 않았을지.

그 장면이 절로 떠올라 웃음 꼬리가 길어졌다.

그 꼬리가 낙낙하게 허공을 떠다니던 차 의식의 흐름을 끊어내듯.

“애거쉬, 너 혹시 그 이유 알아?”

정중앙에 앉아있던 무리의 탁한 발성이 툭 치며 들려왔다.

“뜬금없이 무슨 이유.”

“수도의 지형을 갑자기 바꾸는 것 말이야.”

“아아, 그거. 실은…….”

애거쉬란 남자가 주변을 살피더니 개미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혹여 누가 들을세라 극도로 조심하는 어투였다.

“나도 우연찮게 들은 건데, 바다 엘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미리 대비하려는 거라던데.”

“중립을 지키는 바다 엘프가 제국 일에 관여한다고?”

“확실해. 오늘도 수뇌부들이 에드레이 나일의 바닷가에 모여서 회동을 한댔어.”

역시 3층은 쓸만한 장소였다.

귀가 솔깃할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으니까.

이안은 말소리가 새어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

* * *

11시 방향.

젊은 남녀 다섯과 고양이 꼬리가 달린 수인족 한 명이 쑥덕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망토에 큼지막하게 ‘pē’가 쓰인 걸 보니.

‘모험가 협회군.’

이야기 도중 애거쉬가 탁자에 상체를 바싹 붙였다.

부담스럽게 눈까지 부라린 채였다.

“아, 맞다. 이 얘기 어디 가서 절대 하지 마라.”

“어허. 절대 하지 말라는 거 보니까 또 대장 얘기 엿들었네.”

“재밌는 걸 어떡하냐. 고급 정보가 술술 나오는데.”

“너 그러다 대장한테 혼나.”

“혼날 땐 혼나더라도 절대 끊고 싶지 않다.”

“어이구, 이 화상아.”

애거쉬는 고양이 수인의 타박에도 실실거릴 뿐이었다.

엿듣기로 얻은 정보는 그에게 쏠쏠한 용돈 벌이가 되고 있으니까.

절대 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어쨌든, 우리 당분간은 엄청 한가하겠다. 일거리가 줄어서.”

“수도의 지형이 바뀌는 것 때문에?”

“아니.”

“그럼?”

“대장이 귀족과 관련된 의뢰는 받지 말라고 명한 것 때문에.”

“아아.”

“의뢰 7할이 귀족가 의뢰인데……. 허허.”

“새삼스러워하긴. 1년 전에도 이 엄명 때문에 넉 달을 쉬었는데.”

“하긴. 그게 다 우리를 위한 거라 뭐라 하기도 그렇다.”

귀족가 의뢰는 뜨거운 감자와 같다.

의뢰비가 비싸 주머니를 풍족하게 만들어 주지만 잘못 엮이면 답도 없다.

의뢰를 받았는데 도중 귀족가에서 큰 문제를 일으킨다?

그럼 싸잡아 한 묶음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협회가 박살 나는 것 또한 자명한 일.

애거쉬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식탁으로 눈길을 내려트렸다.

입을 털다 보니 어느새 음식이 차게 식어 있었다.

자고로 음식이란 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적당한 때가 있는데.

굳어버린 음식을 뒤적거리며 애거쉬가 독백처럼 웅얼거렸다.

“아무래도 조만간 사달이 나겠다. 대장이 그 말을 할 때마다 귀족가에 항상 문제가 터졌으니까.”

“이번에는 대체 누가 단두대에 오르려나.”

“너 기억나지. 샤를르트 가 말이야.”

“아, 그 광산 부자? 돈 많다고 엄청 거들먹대던?”

“어, 그놈. 그때 우리가 그쪽 일을 한참 진행하다가 갑자기 의뢰비를 배로 돌려주고 도중에 손 뗐잖아.”

“그걸 어떻게 잊어. 우리가 손 뗀 다음 날 샤를르트 가가 광산 비리로 잡혀갔는데.”

“솔직히 샤를르트 건 같은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

“그렇지.”

“어느 때 보면 대장은 뭐든 다 알고 행동하는 사람 같다니까. 어느 귀족가가 어느 시기에 어떻게 될지.”

“그거…… 내가 본 거랑 관련 있는 것 같은데.”

침을 꼴깍 삼킨 고양이 수인이 애거쉬 쪽으로 더 기울었다.

은밀한 몸짓은 마치 깊숙한 비밀을 토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애거쉬의 볼이 미약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실은 나 몇 달 전에 불침번 서다가 봤거든.”

“뭘?”

“오밤중에 3황자가 우리 대장을 만나고 돌아가는 거.”

“허억!”

“아마 이것 때문이지 싶…….”

“그러니까 우리 대장이 황가의 끄나풀이라는 거야? 그래서 귀족가 정보를 잘 아는 거고?”

“그럴지도.”

“황가를 뒷배로 두다니 상상도 못 했다.”

“……황자뿐만이 아니야.”

“설마 뒷배가 또 있어?”

“글쎄. 나야 알 수 없지만…… 일주일 전에는 살리카 가주가 왔었어. 협회원 전원이 쉬는 날에.”

고양이 수인은 재차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한층 더 낮췄다.

“대장이 가주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던데, 그게 뭔지 진짜 궁금하더라.”

……살리카 가주가?

대화를 엿듣던 이안은 눈썹머리를 한껏 추켜올렸다.

그자가 모험가 협회의 협회장을 찾아갔다?

대체 자신이 죽이고자 하는 상대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 * *

의문을 떨치지 못한 저녁이 으슥하게 깊어질 무렵.

이안은 혼자 호그의 휘파람 뒤편의 별채에서 주인장을 만났다.

환한 등불 아래 마주 앉은 두 사람.

그들 사이에는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긴히 말을 나누잔 내 뜬금없는 청을 들어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호그의 휘파람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허투루 들을 순 없지요.”

주인장은 이안의 검푸른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호그의 휘파람과 관련한 일.

솔직히 뷔트시겐 도련님이 뭐가 아쉬워 이런 하찮은 음식점에 관심을 둔단 말인가.

여기가 망하든 무슨 일을 당하든 아무 상관 없을 텐데.

한데 은밀한 만남을 청했다?

도통 이안의 저의를 알 수가 없어서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

주인장의 눈빛에서 의심이 걷히지 않자 이안은 미소를 내보였다.

어떤 누구도 결단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빚 갚는 생이 어떤 의미인지.

그가 진 빚 중 주인장 것도 있었다.

호그의 휘파람의 주방장이 배고픈 이안에게 내민 비어드 호그.

비록 먹다 남긴 거였더라도 주방장이 제멋대로 고기를 내어주었으랴.

주인장의 뜻이 담겨 있지 아니하고서야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그 고깃값은 아직 온전했고.

당시를 되감던 이안은 말이 길어질까 봐 흐름을 딱 잘라버렸다.

“시간 끌지 않고 본론부터 말하겠네.”

“…….”

“매번 호그의 휘파람에서 모험가 협회로 아침을 보내지 않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향신료 하나만 빼서 보내게.”

“으음. 그 향신료가 있어 모두가 극찬하는 비어드 호그 구이가 만들어집니다.”

“아네. 그래도 그 때문에 사달이 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사달…….”

“비가 올 때 우산이 없으면, 처마에라도 들어가 피해야지.”

“어찌 그런 말씀을.”

“돌려 말하지 않겠네. 그대가 향신료를 빼지 않은 채 비어드 호그를 보낼 경우 내일 모험가 협회장은 죽을 걸세.”

“……?!”

이안의 단언에 주인장의 볼이 마구 실룩거렸다.

주인장으로선 황당하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저러고 있지.

주인장이 그러나, 저러나.

‘협회장의 죽음과 엮어서 교수형을 당하는 것만은 막아야지.’

이안은 어느 과거를 더듬듯 주인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비단 주인장의 목숨만으로 그쳤을까.

주인장의 가족과 주방장, 호그의 휘파람에 있는 자들 전부 도륙당했다.

돌풍처럼 불어닥친 피바람.

그것이 남긴 참상을 잘 아는 이안은 곧장 다음 말을 이어붙였다.

“만약 협회장의 죽음이 그대의 책임이 된다면 그다음은 어찌 될까.”

“다 죽겠지요. 협회장의 뒷배가 어디 보통입니까.”

“보통은 넘지. 하여 그대의 소망, 그저 연인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그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될 터.”

“…….”

“뿐일까. 연인을 위해 만든 견고한 성, 이 호그의 휘파람이 부서질 테지.”

언제나 진실은 불편하다.

어딘가 껄끄러운 대기가 등불에 녹아 일렁거렸다.

그러나 주인장은 웬 헛소리냐고 목청을 높이지 않았다.

대신 이안의 말을 곱씹어 보기만 할 뿐.

한참을 그러다 주인장은 저를 관망하고 있는 이안에게 말을 건넸다.

“도련님이 한 말들을 사실로 가정하죠. 그런데도 한 가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향신료와 협회장의 죽음이 연관될 수 있는지 묻고 싶은 건가.”

“예. 지금껏 그 향신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제가 살던 곳에서는 정화 작용을 한다고 해서 수프로 끓여 먹기도 하니까요.”

“향신료 자체는 문제없네. 다만 뭔가와 만나면 문제를 일으키지.”

이안은 코트 주머니에 넣어둔 것을 꺼냈다.

모험가 협회의 짐 마차에서 슬쩍한 하얀 가루.

“이것 말일세.”

이안이 가루를 내밀자, 주인장은 더 묻지 않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신중하게 눈으로 관찰하다 손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냄새를 맡아본 후.

어떤 확신이 생긴 모양인지 주인장이 황급히 종을 흔들었다.

그 즉시.

기다린 것처럼 문이 열리며 하인 한 명이 들어왔다.

허리를 숙이는 그에게 주인장은 유황 섞인 지하수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주인의 명이 떨어진 터라, 지체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몇 분 후.

지하수가 담긴 유리병이 전달되었고, 그것을 주인장은 가루에 조심히 부어 보았다.

그러자 하얀 가루가 핏빛의 빨간색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짭조름하고 시큼한 향이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역시 루베오의 눈물이군요.”

“흔히들 그걸 붉은 모자 정령의 눈물이라고 부르지.”

“붉은 모자 정령이 죽음을 옮긴다고는 하나, 눈물은 그저 눈물일 뿐 어떠한 해도 없지 않습니까.”

이안은 혼란스러워하는 주인장을 스쳐 붉은 물을 쳐다보았다.

“그 눈물이 오에난테 오일과 만나면 화학 작용을 일으켜 독이 되네.”

“처음 듣는 말입니다. 향신료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 자부한 저인데.”

그럴 것이다.

수시로 인체 실험을 했던 살리카 가주, 그자가 우연히 발견해 낸 것이었으니까.

“무튼 고약한 독이지. 단 세 시간 만에 심장마비로 사람을 죽이면서도, 자연사처럼 보이게 만드니까.”

“무슨!”

“내가 그대에게 해주어야 할 말은 다 했군. 믿고 안 믿고는 그대의 자유겠지.”

이안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부드럽게 일어섰다.

그 어떤 강요도, 그 어떤 설득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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