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그 시각 뷔트시겐 본가.
“이제 곧 오겠군.”
뷔트시겐 가주는 이안의 침대에 앉아 시트를 살살 문질렀다.
시트가 주름 하나 없이 반듯했다.
예전엔…….
침대에 노상 누워 있던 이안 때문에 관리해도 주름이 가시질 않았었는데.
그저 정갈하기만 하니 새삼 이안의 부재가 실감 났다.
그가 번잡한 손길로 연거푸 시트를 쓸어내리자, 그 손길에 부드러운 말이 따라붙었다.
“도련님이 돌아오시는 게 그리 좋으십니까?”
“칼브란 자네는 아닌가 보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저 가주님께서 날마다 여기 앉아 이제나저제나 하시니 그렇지요.”
가주의 물음이 다소 짓궂어서 칼브란은 연하게 미소 지었다.
이안이 돌아오겠다 말한 후부터였다.
가주는 이안의 방을 닿도록 쓸고 닦으며 하루를 1년처럼 보내고 있었다.
마치 그때와 같다.
이안을 가졌단 소식을 주인마님께 듣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때와.
당시에도 오늘처럼 이안이 쓸 아기 침대를 헤질 정도로 어루만졌었는데.
칼브란은 가주의 속내를 짐작해보다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것을 내밀 절호의 시점이 지금인 것 같았으니까.
주군의 기다림에 기쁨 한 자락을 끼얹어줄 무엇.
은은하게 광택이 도는 양피지를 칼브란은 공손히 가주에게 건넸다.
이것 좀 보라는 손짓이라, 시트에 붙박여 있던 가주의 시선이 양피지로 떨어져 내렸다.
“…….”
역삼각형 모양의 탑의 인장이 그의 눈에 화인처럼 박혀 들었다.
“에르그 승급 시험 결과지군.”
“예. 그간 도련님께서 노력하신 것의 결과물이지요.”
칼브란은 들뜸을 감추지 못하고 입가를 실룩거렸다.
“협회에서 결과를 도출해내자마자, 정보부가 보내온 것을 곧장 가져왔습니다.”
본래 에르그 승급 시험 결과는 나흘 뒤에 나온다.
공식적인 일정은 그렇지만 실상 결과는 시험이 끝나면 몇 시간 만에 나온다.
그런데 왜 발표는 4일 후냐.
정령사 협회에서 괜찮은 인재를 포섭하기 위해 미적대는 것이다.
음침하고 간사한 그 속내를 4대 가문이 어찌 모를까.
해서 4대 가문은 결과가 나오면 즉각 세작들을 통해 보고 받는다.
기다리던 소식을 받은 가주는 얼른 양피지를 펼쳤다.
꼼꼼히 읽어내리는 동공은 느렸고, 표정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간혹 입술 끝을 위로 올렸다가 내리기는 해도.
시험 결과가 다소 실망스러운 건가 싶지만 천만의 말씀.
가주가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칼브란은 단숨에 간파해냈다.
“결과가 어떻습니까.”
“자네가 직접 보게.”
가주는 양피지를 칼브란에게 건네고는 입가를 가렸다.
틀어막은 손의 푸른 힘줄들이 자꾸 불뚝거렸다.
뭔가 버텨내려는 가주를 두고 칼브란은 양피지를 자세히 읽어내려갔다.
“……도련님이 에르그 2성이시라고요?”
“크흠.”
“잠재력 무한에…… 마력량은 에르그 3성 수준, 게다가 필기는…… 한 문제도 안 틀리시다니.”
“……하하핫.”
칼브란의 음색이 마냥 흔들리자, 가주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 관리에 실패해버렸다.
칼브란이 보고 있어 근엄을 잃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겨를이 없을 정도로 좋아서 파안대소가 절로 나왔다.
“크하하하핫!”
목청이 다 보이게 웃다 보니 어깨도 연신 들썩거렸다.
하나 이리 오두방정을 떨면 칼브란이 두고두고 제 모습을 우려먹을 게 아니겠는가.
1장로와 차를 마실 때도 ‘그때 가주님의 어깨춤이 아주.’
연무장에서 친위대와 수련을 할 때도 ‘그때 가주님의 어깨가…….’
닳도록 이날을 되새김질하며 놀려댈 텐데 그 꼴을 두고 볼 순 없었다.
가주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얼굴을 펴듯 문질렀다.
“어흠. 참말 대단하지 않은가?”
“예, 대단하십니다. 히에로스 역사상 필기 만점자는 고작 천 명 정도지 않습니까.”
“더 중요한 건 근 백 년 내에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지.”
“가주님께서도 한 문제는 틀리셨는데.”
“크흠. 이 시점에 자네는 꼭 그걸……. 그렇게 따지자면 칼브란 자네는 다섯 문제나 틀리지 않았나.”
“흥. 가주님이야말로 그걸 꼭 따지셔야 했습니까. 참으로 옹졸하십니다.”
“옹졸? 허.”
아이의 성취가 어른 싸움으로 번지는 현장이었다.
유치하고 낯부끄러운 전쟁.
이대로 쭉 이어가다 멋쩍은 하루를 마감할 것 같더니.
칼브란이 먼저 ‘이 좋은 날의 흥취를 망칠 순 없지요.’라고 말하며 백기를 들었다.
그 신색이 참으로 새침했다.
딱 고만큼의 손길로 외알 안경을 올린 칼브란은 마저 양피지를 정독했다.
“실기는…… 최고 점수를 받으셨네요. 한데, 판단 불가?”
“정말 놀랍지 않은가?”
“예. 겨우 넉 달일 뿐인데……. 이 정도 성취는 전례조차 없는 일 아닙니까.”
“없지. 이전에도 없었고, 아마 이후로도 없을 걸세. 거기에는 수호자의 영향도 있으니.”
“하나 그만으로 이룰 수 없는 성취지요.”
“그 아이가 죽을 만큼 노력해서 얻은 결과지.”
“예. 도련님이 수호자만 믿고 나태해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뿌듯해하는 칼브란의 기색을 보다 가주는 시선을 다시금 침대로 돌렸다.
이안 얘기를 해서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그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제 마음은 그러한데, 야속한 그놈은 제 볼일을 다 보느라 걸음이 더디다.
“매정한 녀석. 3일 뒤에나 돌아오겠다고 하다니.”
“서운하십니까.”
“흥.”
“볼일을 마치시면 기다리는 가주님을 생각해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내게는 기별 하나 없이 늘 제 맘대로 하는 녀석인데 무슨.”
“…….”
“그나저나 괜찮겠지?”
가주는 빈 침대를 물끄러미 보며 낮게 읊조렸다.
알맹이가 빠진 혼잣말이었다.
그렇다 해도 가주의 근심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집사장인 그가 어찌 모르랴.
칼브란이 근심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듯 즉답했다.
“도련님이십니다. 가주님과 사소한 것마저 닮은. 하니, 아주 잘 해내실 겁니다.”
“상황이 상황이지 않던가……. 레와티움이 이안이 머무는 수도의 저택까지 감시하고 있는 마당에.”
“…….”
“한데 홀로 황제를 만난다 하니…….”
이안이 황제와 독대하려는 연유야 수호자 때문이었다.
그와 관련해 결판을 내려는 것.
“다른 무엇보다 황제가 수도의 지형을 바꾸겠다고 공표한 것이 걸리는군.”
독대가 끝나고 나면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날 것이다.
황제와의 관계가 지금까지처럼 유지되느냐.
아니면 척을 지게 되느냐.
무엇도 섣불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황제의 의중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보자면 이안의 뜻대로 되기는 힘들 거라는 것이다.
마음을 바꿀 뭔가가 있지 않은 이상.
“친위대에게 전하게. 이안이 이 뷔트시겐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그 아이를 보호하라고.”
“명 받들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라는 건 목숨을 걸라는 거였다.
그에 대해 가주도 칼브란도 헤아리고 있지만, 그것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친위대의 존재 이유는 지키는 것이기에.
만약 목숨이 아까웠다면 그들 모두 친위대에 자원하지 않았을 터.
목숨을 담보로 한 충정의 무거움.
결단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명령을 내린 뒤였다.
가주는 때가 되었다는 듯 조심스레 다음을 언급했다.
이안이 수호자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줄곧 염두에 두고 있던 그것을.
“어쨌든 이안을 생각하면 황실을 견제할 패 하나쯤은 쥐고 있어야겠지.”
기어코 황제의 선택이 척을 진다로 간다?
그때 적시 적소에 써먹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칼브란, 그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나?”
“아. 밀서의 내용을 바꾸는 작업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느 정도 진행되었지?”
“한 땀, 한 땀 신중에 신중을 더하느라 작업이 더딥니다. 하나 거의 9할 가까이 진척되었습니다.”
“9할……. 며칠 후면 새로운 밀서가 탄생하겠군.”
새로운 밀서의 탄생.
이와 동시에 가주가 얻게 될 것은 말로의 탑과 에루리안을 아우른 그라나토스였다.
황가의 심장이랄 수 있는 곳.
천 년 넘도록 철저히 그 비밀을 은폐하고, 그랬어야만 했던 곳.
그러니 목줄을 쥐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패는 없을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도련님을 에루리안으로 보내라는 밀서가 없었다면 몇백 년 묵은 양피지를 어디서 구했겠습니까. 것도 수호자의 인장이 찍힌 것을.”
“그렇지. 그것부터 난항이었을 텐데.”
“기존에 있던 밀서의 내용을 바꾸자는 가주님의 생각은 정말 신박, 그 자체였습니다.”
굳이 이런 식의 재활용을 한 건 위조 판별을 통과하기 위해서다.
진짜처럼 꾸민 밀서를 통해 에루리안의 소유자를 다시 바꿀 심산.
“게다가 그 내용, 에루리안을 발리올에게 반환하라, 라니.”
“의심을 피하려면 그것이 최선의 수지.”
에루리안이 발리올에게 가면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다.
이후 발리올과의 비밀 협약을 통해 소유권을 가져오면 될 터.
그렇더라도 황실은 두 가문의 연계점을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남몰래 에루리안을 쥐고 있다가 여차하면…….
가주는 침대에서 바깥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설원이 보였다.
뷔트시겐을 상징하는 두 설산 무누스와 크라바나스가.
그곳에서 부는 한기 어린 바람이 어루만지듯 대지를 긁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영원한 겨울일 이곳.
겨울, 아니 뷔트시겐은 제 일족이 터전을 잡고 나아가는 곳이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이고.
더불어 제 아들인 이안이 살아나갈 곳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이 뷔트시겐을 지키는 것이 가주의 의무이자 사명이기에.
“에루리안을 가져야겠네. 황실이 내 아이를, 뷔트시겐을 건들 수 없게.”
* * *
다음 날 아침 모험가 협회.
타다닷.
길쭉한 회랑을 달리는 그림자 중 하나의 꼬리가 휙휙 움직였다.
고양이 수인이었다.
그녀는 댓바람부터 쫓기는 것처럼 달리게 된 게 못마땅한지 인상을 구겼다.
그러고는 이 사단의 원흉인 스물 후반의 남자, 애거쉬를 째려보았다.
“으이구, 이 화상아. 술 좀 그만 처먹으랬지.”
“술술 넘어가는 걸 어떡해.”
“그놈의 술 때문에 어? 허구한 날 아침 식사에 늦으면서도 꼭.”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 오늘은 반병만 줄여보겠습니다.”
“으휴. 내가 어쩌다 너랑 엮여서.”
“같은 뒷골목 출신끼리 좀만 봐주십쇼.”
애거쉬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고양이 수인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숨이 어찌나 거센지 그녀의 꼬리만큼이나 기다랗게 발치로 늘어졌다.
“다 좋으니까 제발 지각 좀 그만하자.”
“알았어, 알았어. 잔소리는 1절만 하셔.”
“아침마다 번번이 제일 늦게 도착해서 얼마나 눈치가 보이는지 알아? 우리가 제일 말단이라고.”
모험가 협회에는 협회장이 정한 한 가지 전통이 있다.
다 같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 것.
이는 목숨줄이 경각에 달리기 전까지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반강제 의무였다.
임무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자들로 인해 생긴 전통이기 때문.
일종의 안부 인사 같은 거랄까.
아니, 생존 신고랄까.
“……어?”
내달리던 애거쉬가 돌연 창밖을 내다보며 기웃거렸다.
지각한 마당에 굼뜨기까지.
멈춰선 그를 향해 고양이 수인이 딴짓 좀 그만하라며 재촉을 했다.
“그게 아니라 뷔트시겐 도련님을 본 것 같아서…….”
잘못 봤나?
재빨리 밖을 훑어봤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그렇게 빨리 이동할 수 없으니 역시 잘못 본 모양이다.
“술이 덜 깼어?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안 와! 어서 들어가자니까.”
고양이 수인이 채근하며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몸짓을 따라 애거쉬의 눈길이 자연스레 이동했다.
1층 복도 끝에 있는 응접실.
언제나 협회장이 수뇌부와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간다, 가.”
애거쉬가 재게 걸음을 놀려 다가간 즉시였다.
고양이 수인이 문을 열더니 대뜸 애거쉬의 등을 떠밀었다.
미처 대비를 못 한 터라 애거쉬는 맥없이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거의 구르다시피 들어간 응접실 안.
안은 이미 간부들로 꽉 차 있었다.
입김 한 번에 제 모가지를 뎅강 날릴 수 있는 자들이.
“…….”
그들이 널따란 탁자에 앉아 지각한 애거쉬에게 눈총을 주었다.
거 얼마나 늦었다고 눈치들을 주시나.
그는 천연덕스럽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응접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빛이 서린 자리에 협회장이 있었다.
석양을 연상시키는 빨간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덮은 미남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