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48화 (148/214)

제148화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협회장의 상체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그의 자세가 느슨하던 때와 달라지면서 공기의 흐름도 일변했다.

그 변화가 피부로 여실히 느껴졌다.

누가 살집을 꼬집는 것 같은 아릿함.

이에도 이안은 ‘내 청이 무리한 청은 아닐 거다’라는 듯 평온한 낯을 내보였다.

“…….”

그 평온함을 뚫어지게 보던 협회장은 탐색을 멈추고 눈썹을 찡그렸다.

언뜻 그러더니 이내 그는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흠. 일개 협회장보다는 뷔트시겐의 적자가 더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러합니다. 하나 제가 원하는 건 협회장님을 통한 만남입니다.”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 혹 제 뒷배에 대한 소문 때문입니까.”

3황자와 친분이 있고, 3황자가 뒷배라는 소문.

이를 접한 사람들 대개가 이안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황자와 친분이 있으니 황제를 쉬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로.

“솔직히 시인하지요. 3황자와 어느 정도의 친분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덕분에 폐하를 만난 적도 있고요. 그렇다 하더라도 청을 들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

“저를 믿는 그분을 곤란케 하고 싶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흠. 짐작해보건대 그분도 곤란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식의 막무가내는…….”

“필시 저를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이안의 확언에 협회장의 눈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설마’하는 의혹의 눈초리가 따라붙자 이안은 속살거리듯 말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2황자 전하.”

“……!?”

***

다음 날.

이안은 저택의 계단참에 서서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오목한 천창을 통해 동공 안으로 쏟아지는 것.

하늘에 넓게 퍼져있는 빛무리가 사그라들듯 오므라들었다.

……약속한 때였다.

<하하하. 처음 봤을 때부터 예사 인간은 아니다 싶었는데 역시나…….>

더는 발뺌이 소용없다고 판단했는지 협회장은 솔직히 인정했다.

그때부터 대화는 급물살을 탔다.

더 재고하지 않고 이안의 청을 흔쾌히 수락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분.

빚을 달아두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황자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좋아. 소개해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나저나 할아버님께서 바싹 긴장해야겠다. 여간내기가 아닌 널 상대하려면.>

<한데 궁금하긴 하군. 어떤 연유로 날 구한 과정까지 첨언 해달라고 하는지 말이야.>

2황자는 이안의 사정을 궁금해하면서도 끝내 캐묻지 않았다.

곁에 있는 남자의 도움을 받아 황궁에 갈 채비를 서두를 뿐.

황자의 조력으로 말미암아 일사천리로 성사된 황제 알현.

저벅저벅.

이안은 각오를 다지며 1층 홀로 내려갔다.

여느 때처럼 느릿하게 계단을 밟던 그는 일순 고장 난 것처럼 멈춰섰다.

계단이 끝나는 부분에 레브와 올리브가 서 있어서였다.

시장 구경하고 있어야 할 녀석들이 집에 있는 걸 보니 빤했다.

‘음. 나 때문이구나.’

황제를 알현하는 것에 대해선 일절 말을 하지 않았는데…….

두 녀석 모두 돌아가는 정황을 알고 있는 거였다.

‘특히 레브가 모를 리 없지.’

앉아서 천 리를 보는 통찰을 지닌 게 레브였으니 뭐.

애당초 뭘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걱정을 시킬 순 없기에…….

이안은 알현 따위 별거 아니라는 듯 평소와 같이 말을 건넸다.

“야시장 구경한다더니 왜 벌써 돌아왔어.”

“아, 그냥.”

“왜, 무슨 일 있어? 아아, 용돈이 떨어졌구만?”

“그런 거 아니고요. 실은 너 배웅할까 해서.”

레브는 이안을 기다리고 있던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수호자 때문에 이안이 황제를 만난다는 사실.

이에 대해 걱정만 늘어지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속 편히 수도 관광이나 하고 있을 수는 또 없는 노릇.

“이안, 황제 폐하 만나도 쫄지 마라.”

“내가 누구냐. 이안 님이시다. 이런 일쯤은 밥 먹듯이 겪어본.”

“그 허세, 여전한 거 보니까 안심된다. 오늘만큼은 되레.”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아우님.”

“무튼,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라.”

레브는 최대한 담담한 투로 이안을 응시했다.

검푸른 동공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겠다.

이안의 눈에 확신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확신은 여태 보였던 그것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는 것.

하여 레브는 사족을 생략하고 더는 말꼬리를 잇지 않았다.

녀석은 그랬지만.

“이안, 나만 믿어! 내가 궁 앞에서 잘 보고 있다가 뭔 일 생긴 것 같으면 바로 쳐들어갈게.”

저는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올리브가 목청 높여 한마디 거들었다.

어떻게든 걱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두 사람의 태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괜스레 입가가 끌쩍끌쩍 간질거렸다.

그다지 웃길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건지.

이안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잇새로 웃음을 터트렸다.

소리가 몸을 진동시키며 전신이 이완되자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황제를 만날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는 진짜 괜찮아졌다.

정말로…… 괜찮다.

이안은 두 사람을 스쳐 빛무리 저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 지체하다간 늦겠다. 놀러 다녀오마.”

“오냐.”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두고 이안은 가볍게 돌아섰다.

거침없이 홀을 관통하다 다시금 녀석들 쪽으로 반보 튼 걸음.

이 걸음이 머뭇거려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돌아보는 게 무서웠었는데.

언제나 쫓겼고, 언제나 그를 대신해 누군가가 뒤에 남겨졌기에.

그리고 뒤에 남겨진 자는 시간을 끌려 몸부림치다 죽어버렸기에.

그들의 발목을 잡지 않으려면 저는 그저 앞만 보고 내달려야만 했다.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담지 않으려면.

하지만 지금은…….

이안이 느리게 돌아서자 레브와 올리브 두 녀석이 씨익 웃었다.

지금은 이렇듯 언제나 그 자리에서 굳건히 저를 봐주는 벗이 있다.

언제든 등을 맡기고 함께 걸어가 줄 벗이.

생생한 악몽이던 예전과는 다르게 말이다.

***

황궁의 접견 대기실.

“접견실을 거울의 방이라고 부른다더니.”

이안은 수백 개의 거울로 꾸며진 방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말라는 배려인 건지, 너 자신을 알라는 건지.

고개를 돌릴 때마다 거울들이 제 모습을 여과 없이 비추었다.

시시각각 아주 적나라하게.

오묘했다.

꼭 누군가가 저를 감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 탓에 상념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서 10분 정도 머무르게 하는 건 심리적으로 위축되도록 하려는 거지.”

이안이 중얼거리는 사이, 접견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프로보사.”

“뷔트시겐 공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정령이 발랄한 인사를 건넸다.

포로보사, 검사 요정이었다.

황제와 독대할 자를 조사하는 역할을 하는.

“진짜 처음이네요. 뷔트시겐 가주님은 공식 일정 때마다 오시는데, 공자님은 도통 황궁에 오시질 않았잖아요.”

올려다보는 정령의 머리통이 그의 무릎 높이쯤에 있었다.

추측했던 것보다 더 작았다.

조막만 한 정령이 정식으로 예를 갖추겠다며 배꼽 인사를 했다.

곱다랗게 굽어진 등에는 책을 매고 있었다.

귀여웠다.

동그란 안경을 추켜 올릴 때는 제법 똘똘해 보였고.

아카데미에서 노상 1등 할 것 같은 인상?

“그럼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에 앞서 소지품 검사부터 하겠습니다. 소지품을 모두 여기에 넣어주세요.”

똘똘한 정령이 매고 있던 책을 주섬주섬 풀어 내밀었다.

책의 겉면이 넘어가자 텅 빈 안이 드러났다.

말하자면 책의 형태를 띤 상자라고 해야 하나.

평범해 보인다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이 책 상자는 독과 저주, 술식은 물론 황제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을 모두 감별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만능이라는 것이다.

“뾰족한 물건은 절대 지참할 수 없어요. 혹 옷의 치장이나 장신구 등이 그런 형태라면 겉옷도 벗어주세요.”

“보다시피 코트의 단추는 하나뿐이라.”

이안이 입고 있는 체스터필드 코트에는 둥근 단추가 하나뿐이었다.

그 단추를 정령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일순.

정령의 눈이 하얀색으로 변하며 실선 같은 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갔다.

일명 간파하는 눈.

프로보사의 눈은 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만약 실선이 지나간 후 눈에 빗금이 생기면 불온한 무엇이 감지됐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물건에 저주가 하나 걸려있을 시 빗금이 하나.

술식 하나에 저주가 하나일 시 빗금이 두 개, 이런 식이다.

정령이 작은 머리통을 움직거려 단추를 뜯어보길 1분여.

이제 되었다는 듯 녀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단추만은 통과라는 뜻이었다.

“다시 고지할게요. 책에다 넣을 물건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게 주세요.”

“알았어.”

깐깐한 검수에 이안은 가지고 있던 것들을 군말 없이 뺐다.

1장로가 준 아공간 반지와 영상석, 두 개를 내놓고 나자 더는 뺄 게 없었다.

단출했다.

“다 주신 거 맞죠?”

“보다시피.”

“솔직하셔야 해요. 제가 검사를 시작했을 때 걸리면, 저 거울들 속에 새겨진 감금 술식이 발동될 거예요. 것도 무시무시한 전기가 통하는.”

정령이 양손을 정수리까지 올리더니 전기를 표현하는 것처럼 꼬물거렸다.

실감 나는 으름장으로 보아 직업 정신이 투철했다.

한데 이를 어쩌나.

깐깐한 모습에도 꼬물거림 때문인지 되레 귀여움만 가중되었다.

아마 정령의 뽀글뽀글한 머리칼이 한 몫 거들지 않았을까 싶다.

“진짜 없어.”

몰랑해진 이안은 코트 주머니까지 탈탈 뒤집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정령이 안심이라는 듯 웃어 보이곤 반지가 든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이후로는 날카롭게 겉면을 빤히 주시했다.

정확히는 물방울 모양의 루비가 박힌 정중앙을 보았다.

정령이 간파 담당이라면 저 책은 해석 담당이다.

새겨진 술식이나 저주, 기물의 종류가 무엇인지, 그 흐름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는지 해석하는.

정령의 눈이 간파하지 못하는 것까지 책은 모조리 잡아낼 수 있다.

“……으음.”

아무리 기다려도 루비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다는 뜻.

이에 정령은 폴짝거리며 책을 도로 등에 멨다.

“검사가 끝났어요. 이 물건들은 알현이 끝나고 나면 돌려줄게요.”

활달한 목소리의 끄트머리.

줄곧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이안에게 다가왔다.

“제국의 영원한 겨울, 동쪽의 설원을 누비는 겨울 늑대인 대 뷔트시겐의 혈족을 뵈어 영광입니다.”

수도 사람의 특징인가 보다.

무슨 인사가 이렇게 장황하고 숨쉬기 곤란할 정도로 긴 걸까.

“나도 반갑네.”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포도 정원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곳까지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황제가 아끼는 포도 정원.’

이안은 잠깐 사이 바뀐 풍경을 눈에 담았다.

포도 정원, 낙소스.

웬만한 저택 다섯 채는 합쳐놓은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야외 정원이다.

이 정원을 황제가 어찌나 애지중지하는지.

손수 포도를 재배까지 하며 구석구석 돌보기까지 한다.

그 때문이리라.

황제에게 포도 바구니 혹은 포도로 담근 와인을 받는 건 영광 중의 영광이 되었다.

이안이 탱글탱글한 포도송이를 보고 있는데.

“그리 눈으로만 보지 않아도 된다. 한번 따서 먹어 보아라.”

“…….”

어떠한 기척도 없었는데 대체 언제 온 걸까?

어느 사이 맞은편으로 다가온 황제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음색이 포근했다.

마치 흔들의자에 앉아있던 할아버지가 동네 꼬마에게 말하는 것 같달까.

방심하게 만드는 목소리라 이안은 도리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자칫 어리바리했다가는 황제의 의도대로 끌려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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