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제국을 영원한 번영으로 이끌 위대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아해야.”
아해?
황제에게 그리 불릴 줄 몰라서 이안은 찰나 당황했다.
“……예, 폐하.”
“나는 네가 누군지 알고, 너는 내가 누군지 안단다. 한데도 인사가 필요하겠느냐.”
“불필요한 형식이라도 첫 만남이라면 필요치 않겠습니까.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첫 단계가 될 테니까요.”
“음.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첫 단계라…….”
황제는 이안이 한 말을 반복하며 한편에 놓인 탁자로 향했다.
그의 걸음을 뒤따르는 건 수호자와 레와티움 다섯뿐이었다.
통상적이라면 황제를 수행할 자들이 줄줄이 열을 맞춰 따라붙었을 텐데.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자만 남긴 거군.’
황실에 관한 비밀 얘기가 오갈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황제의 걸음이 탁자에 가까워지자, 레와티움이 앞서서 얼른 의자를 뺐다.
앉기 편하게 황제의 동선에 맞춘 방향 조절은 필수.
성심을 다한 보필에 황제는 어떤 불편함 없이 착석할 수 있었다.
“그럼 통성명도 다 한 것 같으니, 사양치 말고 포도 한번 맛보려무나.”
보통 황제가 권해도 대개는 사양하고 만다.
왜냐하면 황제의 권유에는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야, 이거 받아’라고 떠안겨주는 거.
혹은 ‘원하면 가져도 되고’라는 두루뭉술함을 내보이는 거.
이 중 대부분이 후자이니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이안이라고 그를 모를까.
하지만 먹을 거 앞에서 사양은 없었다.
“폐하께서 재차 권하시니 빼지 않고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이안은 눈높이에 있는 포도를 따서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의 뻔뻔함 때문일까, 아니면 눈치 없는 철없음 때문일까.
넙죽넙죽 포도를 먹는 이안의 모습에 황제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흐음. 생각보다…….”
생각보다 해맑았다.
들은 것들이 죄다 영악하다, 머리 회전력이 비상하다, 심계가 깊다, 이런 소리뿐이었다.
해서 나이보다 더 올려 쳐 어른처럼 대할 심산이었다.
한데 직접 마주한 아이는 또래보다 키만 컸지, 그냥 열다섯이었다.
다소 뻔뻔한 구석이 있는 거야 뷔트시겐 가주도 그러했기에.
그저 부전자전처럼 보일 뿐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이마저 수작인가.
황제는 들은 정보와 직접 본 것의 차이로 인해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독대를 청한 이안의 방식은 정보와 일치하고 있었다.
모험가 협회장이 2황자라는 극비를 알고 있었던 것.
그 목숨을 기가 막힌 방법으로 구한 것.
그리고 제가 아끼는 손자를 통해 독대를 성사시킨 것.
이 모든 것들이 의표를 찔러오고 있었다.
이것만 봐도 만만한 상대가 아님은 분명한데…….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아 황제는 무릎에 놓인 손을 두어 번 까닥거렸다.
불확실하다면 대화를 더 나눠보면 될 일.
“크흠. 우선은 이 말을 먼저 해야겠구나. 내 손주를 구해주어 고맙다.”
“운이 좋았습니다. 마침 제가 수도에 온 사이 일이 벌어져서.”
“손주 놈의 목숨값은 내 넉넉히 치르도록 하지.”
“아. 폐하께서 주시는 거면 뭐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안은 뭐 하나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솔직한 건지, 능청을 떠는 건지.
이안의 표정을 보면 전자 같은데…… 정작 황제는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여전히 무엇도 확실하지 않으나 섣부른 단정은 하지 않았다.
대화의 물꼬는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까.
황제는 끊임없이 이안을 분석하며 하고자 하는 말을 해나갔다.
“하나, 고마움과 별개로 내 뜻은 분명히 전하도록 하마.”
“…….”
“협회장 일을 담보로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말거라.”
“아.”
“앞으로 나눌 대화에도 그 영향이 미쳐선 아니 될 것이고.”
인자한 음색에 비해 황제의 태도는 오연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최정점에 서 있는 권력자의 면모가 물씬 풍겼다.
동네 할아버지 같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상대하는 자에 따라 가면을 끼듯 신색과 기색이 달라지는 황제.
그 면면이 주는 위압감은 대기를 숨죽이게 할 정도였다.
솜털까지 쭈뼛 섰다.
그를 털어내려 이안은 습기 찬 주먹을 살포시 말아 쥐었다.
‘예, 알겠습니다.’ 수긍하며 물러나려고 황제를 알현하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폐하께서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오해?”
“예. 저는 단지 2황자님을 구한 과정을 폐하께서 아시길 바랐을 뿐입니다.”
문제 해결 과정을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성격, 가치관, 신념, 인격 등등을.
이런 것들을 통해 이안은 황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과 경계뿐인 상대에게 이 정도는 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다음, 그러니까 제 목적을 들이미는 것 말이다.
이를 위해 이안은 단정한 어조로 입을 떼며 호소력을 높였다.
“진실로 폐하의 신뢰를 얻고 싶으니까요.”
“신뢰를 얻고 싶다, 라.”
“가장 적절한 증명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2황자님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2황자의 역할?”
“역대 황제들께선 가장 신임하는 황자님을 모험가 협회장으로 앉히지 않았습니까. 수도의 지형을 속속들이 아는 둑스를 관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황실은 수도 방비에 진심이었다.
때마다 지형까지 바꾸면서 정작 둑스 관리는 남이 한다?
바꿔 말하면 철벽의 방어막을 세워놓고 내부에 폭탄을 놔둔 격이랄 수 있다.
이러면 방비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기에 황실은 어떤 불씨도 남기지 않으려 둑스를 직접 관리한다.
“둑스 관리에 실패하면 황실에 커다란 위협이 될 테니까요.”
실제로 지난 생이 그러했다.
모험가 협회장 독살 사건.
이를 필두로 다른 황자들도 암살당하면서 황실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이안은 하고자 하는 말을 서슴없이 황제에게 전달했다.
“하여 닥쳐올 위협을 막고자 2황자님을 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기를 바란 것은 과정만이 아니었군. 네 충심이지.”
“예. 만약 제가 허튼 생각을 품었다면 그리 했겠습니까.”
“황자를 구함으로써 증명한 것이다?”
“예.”
“내가 반박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말이지.”
황제는 틈 하나 없는 이안의 단호함에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앳된 얼굴이 더는 앳되어 보이지 않았다.
수 하나를 둘 때조차 그 수에서 뻗어나갈 수십 가지를 고려한다?
그건 정치판에서 닳도록 구른 노회한 대신들만이 가지는 거였다.
시간과 경험, 두 가지가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것.
이는 세월에 풍화되고 마모되어 둥글둥글해진 돌멩이와 비슷하다.
즉, 저 어린 아해는 가질 수 없는 거였다.
‘허허. 무섭구나, 무서워.’
황제는 등줄기가 쭈볏 서는 것 같아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는 여태껏 두려운 게 없었다.
수호자를 가질 황태자로 태어나 당연히 황제가 된 생에서 험한 장애물이 있었으랴.
거칠 거 없이 나아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한데…….
말년에 제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이를 만날 줄은.
상념이 길어질수록 이안을 보는 황제의 직시 또한 자연히 길어졌다.
그에 따라 황제의 의중을 살피던 수호자와 레와티움의 기도 역시 점차 날이 서 갔다.
살이 베일 것 같은 분위기.
이안은 그것을 묵묵히 견디며 시간을 인내했다.
* * *
10여 분쯤 지났을까.
‘밑밥을 깔았으니 슬슬 본론을 꺼내야지.’
장황하게 신뢰와 충심을 증명해야만 하는 까닭이 있었다.
바로 이때를 위해.
여전한 분위기 속에서 이안은 코트에 달린 단추를 뜯었다.
망설임 없는 손짓을 보인 뒤.
그는 경계의 시선이 몰린 손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단추 하나.
“폐하, 이쯤에서 제가 진심 하나를 더 꺼내 보일까 합니다.”
“흐음.”
“이는 폐하께서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이안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황제는 바로 간파했다.
그 탓일까.
지금껏 평정심을 유지하던 황제의 동공이 찰나 번득거렸다.
필시 수호자와 관련된 것이라 여기는 것일 터.
정말 그것이냐는 말 없는 물음에 이안은 단추를 톡톡 두드렸다.
이만 나오라는 신호.
그 즉시 단추에서 오색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안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대비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폐하를 보호하라!”
수호자의 명에 레와티움이 황제를 둘러싸고 곧장 방어진을 펼쳤다.
수선해진 가운데.
“반갑네. 크흠……. 반갑습니다, 황제여.”
오색 빛을 째며 뒷짐 진 녹스가 나타났다.
본디 수호자는 황제에게 반말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친구 같은 존재로 격 없이 지내니까.
그 기억을 간직한 녹스로서는 높임말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녹스가 어색함에 몸부림치는 사이.
황제는 놀라움에 양 눈썹을 격하게 꿈틀거렸다.
“수호자가 실제로…….”
긴가민가하던 것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이리라.
황제는 물론 수호자와 레와티움까지 기색들이 모두 늪처럼 가라앉았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메마른 공기가 버석하게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로 인해 모래바람을 들이킨 것처럼 폐부까지 까끌까끌해졌다.
“황제여, 그리 놀랄 것 없ㄷ……습니다.”
“그보다 외양이…….”
보통 수호자는 어린 황태자에게 맞추려 대개 8~10살 즈음의 모습을 한다.
그 후 황태자의 성장에 맞춰 함께 자라고.
황태자가 서른 즈음이 되면 수호자의 성장은 그 나이에서 멈춘다.
힘이 완숙을 이룬 시기에 머무르는 것.
이것에 비추어 보자면 눈앞에 있는 수호자의 외양은 마치…….
“이제 막 성장하는 듯한 모습이군.”
……정곡이었다.
4대 원소 중 두 가지만 다룰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였다.
하나 이를 사실대로 말할 순 없잖은가.
그게 밝혀지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수호자를 가운데 놓고 대등하던 관계가 깨지기 때문.
이안은 뜨끔한 속을 감추고선 아무것도 아닌 양 말을 흘렸다.
“녹스가 가장 좋아하는 형상입니다. 해서 자주 저런 모습을 하곤 하지요.”
“결속자가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인가.”
황제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지그시 녹스를 쳐다보았다.
오색 동공을 꿰뚫어 보는 듯 그러다가 그는 이내 단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나저나 수호자를 텔로스에 숨겨 왔군.”
프로보사의 검사까지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기물 텔로스.
본디 황궁의 것이었지만 몇백 년도 전, 뷔트시겐의 2장로 가문으로 그 소유가 바뀌었다.
해서 간과하고 있었다.
텔로스란 존재도, 이안이 이걸 이용할 거라는 것도.
‘이전에 레와티움이 보고한 허속성의 정령도 필시 텔로스였을 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황제의 입꼬리가 비죽 위로 올라갔다.
그 삐딱한 선은 지금껏 쌓아 올린 것이 무너질 수 있음을 나타내는 징조였다.
이 징조의 종착지가 무엇일지는 빤하지 않은가.
제 손을 떠나버리기 전 이안은 속내를 까뒤집듯이 털어놓았다.
“무례인 줄 알면서도 이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녹스를 폐하께 보여드리기 위해선.”
“비밀을 지키려면 그리할 수밖에 없었겠지.”
황제는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옅게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솟구친 입꼬리 채로 이안을 나직하게 불렀다.
“이안 뷔트시겐.”
“예, 폐하.”
“너는 필시 이 패를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여태껏 그러한 것처럼.”
“…….”
“하나 너는 숨김없이 내게 내보이고 있다. 이러는 연유가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