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폐하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안은 어느 순간에도 냉기 어린 황제를 빤히 보았다.
감정이 잡히지를 않는다.
표면이 잔잔한 호수와 같지만 이안은 수면 아래를 알고 있었다.
진즉 황제가 저를…… 죽일까 고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수도의 지형을 바꾸겠다 공표한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확실히 ‘제거하자’로 결론이 나지 않고서야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할 리가 없다.
이런 마당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녹스를 까발리는 거지.’
수호자란 존재, 그만으로 황제는 저를 함부로 죽이지 못한다.
두 수호자의 충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안은 시끄러운 속과 반대인 눈웃음을 지으며 사근사근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폐하의 충직한 신하로 오래 남고 싶습니다.”
“그런 자가 황가의 힘에 손을 댔다, 라.”
“제가 하는 말이 폐하께 변명처럼 들릴 것을 아나, 그래도 저를 변호해 보자면.”
“…….”
“절박한 사정이 있어 부득불 그리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는 법이지. 마력핵이 없는 삶은 뻔하니.”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 이유보다는, 그저 뷔트시겐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뷔트시겐을?”
황제는 의문을 표했다.
4대 가문 중 가장 강성해서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곳이 뷔트시겐이다.
한데 그런 곳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의구심을 헤집느라 이맛살을 접은 황제에게 이안이 설명을 덧댔다.
“아무리 너른 바다라도 풍랑이 일면 요동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풍랑을 견딜 튼튼한 버팀목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를 위해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말이냐.”
“예. 죽는 거 따위 두렵지 않습니다.”
진정, 두렵지 않았다.
알을 얻은 순간부터 이안은 현재만을 살고 있으니까.
살리카를 막고 나면 뭘 할 것인지.
전쟁의 불씨가 꺼진 뷔트시겐에서 뭘 하고 살지.
이와 같은 미래에 대해선 단 1초도 구상을 해본 적이 없다.
도리어…….
수호자를 가진 제가 언젠간 사라져야 뷔트시겐이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지독하게 잘 알아서 탈이다.
이안은 쓰게 웃었다.
혀끝이 씁쓸해졌지만 오래 곱씹어서 뭐하랴.
쓸데없는 감상을 곧바로 걷어낸 그는 속에 남은 말을 마저 내뱉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살리카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그 뱀 같은 것들이.”
이 시기쯤에 황제는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살리카가 꾸미는 짓거리에 대해서 말이다.
반역의 조짐이 보일 때 그냥 모가지를 뎅강 자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4대 가문의 수장을 치는 것이라 정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망할 명분을 조작하기 위해 황제가 이런저런 일을 꾸미는 사이.
그 사이에 모험가 협회장 독살 사건이 벌어지고 균형의 추는 기운다.
명백히 살리카가 우세한 쪽으로.
“그러니 저와 폐하가 굳이 반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균열을 노리고 있는 적이 지척에 있는 마당에 말입니다.”
“어린 것이 참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이안이 하는 양을 내버려 두고 있던 황제가 턱을 괴었다.
잠깐 뭔가를 고심하는 것 같더니만 그는 여전히 차게 질문을 했다.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그럼 내, 하나 묻겠다. 반역을 꾀하는 자와 황실의 보물을 취한 자, 두 가지 위협 중 어느 것이 크겠느냐.”
“…….”
“내 입장에서 말이다.”
“때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선택할 수 없는 자들의 입장이고.”
황제는 한기 어린 낯빛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다르지. 거슬리는 것이 몇 개든 내가 참아넘길 까닭이 무에 있을까. 다 치워버리면 그뿐인 것을.”
* * *
독대를 끝낸 이안이 떠난 뒤였다.
황제는 당돌한 그 아이가 앉아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척을 지고 싶지 않다고 해놓고 말만 번드르르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우려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현 수호자의 힘이 온전히 이관되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세대교체는 없을 거라는 맹약의 증표로 이것을 넘겨드리겠습니다.>
“바람의 인장이라…….”
황제는 포도 덩굴이 음각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소리가 내려앉는 곳.
황제의 주름진 손에 들린 것은 늑대가 달을 문 문양이 그려진 은화였다.
새끼손가락 크기?
납작하고 판판한 은화는 문양에서 알 수 있듯 뷔트시겐의 것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은화가 아니라.
<뷔트시겐의 신물이지요. 수호자의 세대교체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열쇠 중 하나인.>
세대교체…….
황제는 복잡다단한 심경을 담아 신물을 만지작거렸다.
문지름이 길어질수록 시름만 깊어질 뿐이다.
그 손길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수호자는 다소 껄렁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 신물까지 이안이 자네에게 줄 줄은 몰랐네.”
“그 아해의 행동이 어느 것 하나 예측 가능한 게 있었던가.”
“하하. 의표는 여러 번 찔렸지만, 어깨춤을 춰도 모자랄 일 아닌가. 그 신물을 받았으니.”
“…….”
신물이 황제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
이는 황제의 수호자가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말이냐.
황제의 수호자와 새로운 수호자 간의 세대교체.
이것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선 세대교체의 마지막 단계인 4대 가문의 순방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황태자는 각 가주에게서 그들의 피가 섞인 신물을 받는다.
4개의 신물을 손에 쥐고 황태자가 황궁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
황제의 수호자는 모든 힘이 봉해짐과 동시에 소멸에 이르게 된다.
여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
“흐음. 이게 내 소유인 이상…….”
황제는 재차 바람의 인장을 문지르며 눈가를 찌푸렸다.
번잡한 옆태였다.
섣불리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
그 이유를 알면서도 수호자는 심각할 게 뭐 있냐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쭈글한 죽상 좀 펴게, 테시우스. 그걸 받아 그 녀석 뜻대로 되는 것이 못마땅해서 그래?”
“동맹을…… 맺어야 하겠지.”
“받을 거 다 받고 뒤통수를 후려칠 순 없지 않나. 왈패도 아니고 황제씩이나 되어서.”
“그렇긴 하지.”
황제는 작게 혀를 찼다.
영민한 그 아이가 세대교체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만 인장을 줬을까.
어떤 순간에도 신의를 다할 것이고, 저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황제의 권력에 맞서지 않겠다는 약속의 의미로 넘긴 것이다.
정말 순수한 의도였든 다른 계산이 숨어있든.
확실한 게 있다면 이로써 황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자기 등을 훤히 내보인 아이의 등에 보란 듯이 칼을 꽂을 순 없으니까.
수호자 말대로 제가 왈패도 아니고.
“끄응.”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
틈이 생기자 수호자는 말린 포도가 든 병에서 포도를 꺼내 씹었다.
포도로 만든 음식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거였다.
아마도 황제를 만난 초기부터 황제가 포도밭을 가꾼 영향 탓일 터.
수호자는 말린 포도를 입안에서 굴리며 완곡하게 말을 흘렸다.
“테시우스, 난 여러모로 이안 그 녀석이 괜찮더군.”
다소 생뚱맞게 던져진 수호자의 본심.
이에 황제는 그 말을 되새김질해보다 고개를 옅게 끄덕거렸다.
“사실 말일세. 직접 만나보니 나도 그 아이가 마음에 들더군. 하나…….”
아홉 가지가 마음에 드는데 한 가지가 흠이 크다.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어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황제의 말꼬리가 흐려지는 연유를 어찌 모를까.
그 심정을 충분히 헤아려 본 수호자는 못 박듯이 단언했다.
“테시우스, 좋게좋게 생각하게. 엄밀히 따져 이안 뷔트시겐이라 다행이지 않은가.”
“다행이라…….”
“수호자를 얻은 게 뷔트시겐이라 이 정도 소란에서 그친 걸세.”
“하긴.”
뷔트시겐이라 이런 결론에 이른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황제를 배려하고 선뜻 맞춰주는 뷔트시겐이라.
만약 알을 얻은 게 그들이 아닌 도마뱀이었다면…….
가정도 싫다는 듯 수호자는 말린 포도를 질겅질겅 짓씹었다.
“차근히 따져보세. 초대 황제가 제국을 세우고 4대 가문의 터를 정했을 때 말일세. 그때 동쪽으로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지 않았나.”
“그 당시 동쪽은 불모의 땅에 마수가 넘쳤으니까.”
“하지만 뷔트시겐의 초대 가주가 자청을 했지. 제가 가겠다고.”
“주군이자 벗이었던 황제를 위해 그가 희생한 게지.”
“그리고 그날부터 뷔트시겐은 언제나 황가에 충심을 다하고 있으이.”
“부족함 없이.”
황제는 싱싱하게 영근 포도밭에 눈길을 고정했다.
작물을 재배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적당하게 해충을 잡아줘야 하고 햇빛이 골고루 가게 해야 하고 병든 작물을 골라야 하고…….
포도밭 하나 돌보는 데도 이리 할 일이 많은데.
하물며 제국을 다스리는 일이 아닌가.
수십, 수백 배의 공을 들여야 한다.
그렇게 공을 들여 가꾼 지도 어느덧 50년이 지났는데…….
“포도밭을 지킬 이를 견제했다간, 기껏 가꾼 포도밭을 생짜로 도적놈에게 뺏길 수도 있을 터.”
“틀림없이. 살리카 그 도적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능히.”
“지금만 봐도 그래. 자네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려 기를 쓰고 있지 않나.”
“그자는 천성적으로 욕심이 많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뷔트시겐은 순한 양이지. 그들은 제 동족만 건들지 않으면 얌전하니.”
“허긴. 동족 의식이 누구보다 강한 자들이라.”
황제의 입술 끝이 샐쭉거렸다.
지배자를 새침하게 만드는 그것에 대해 수호자는 놀림조로 입에 담았다.
“오늘만 해도 그래. 그치들이 포도 정원과 가까운 서문에서 어쩌고 있었나.”
“친위대가 두 눈을 희번덕대며 대기하고 있었지.”
“여차하면 아주 그냥 들이박을 판이던데?”
“하! 내가 그 아이를 잡아먹기라도 한대?”
황제가 코웃음을 치자 수호자는 더 호들갑을 떨었다.
“황제한테 제 아이가 잡혀있다고 친위대의 절반을. 어이쿠야. 오금이 저린다, 저려.”
“하여튼 위나 아래나 똑같은 것들.”
황제는 뷔트시겐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행동과 말투는 면박에 가까웠지만, 사실 안색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당장 변경의 황무지로 떠나라고 해도 토를 달지 않을 그들이 뭐가 미우랴.
그저 오늘처럼 과민반응할 때만 얄밉지.
“아무래도 수도 지형을 바꾸는 거, 취소해야겠네.”
“테시우스 잘 생각했네. 뷔트시겐을 체스 말로 훌륭히 이용하면 그뿐이지 않겠나.”
“그렇지. 게다가 내가 진정 견제해야 할 것은 살리카가 아닌가.”
호시탐탐 황좌를 노리는 살리카.
그 망할 반역자를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더라도 이안이 가진 힘을 마냥 뒷전으로 미뤄둘 수만은 없었다.
그 힘을…….
뭔가를 가늠해보는 듯 황제의 시선이 허공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박제된 것처럼 굴길 얼마쯤.
황제는 기막힌 묘수가 떠오른 표정을 하고선 싱긋 미소를 지었다.
“도마뱀을 잡을 늑대에게 목줄을 채워야지 않겠나.”
“목줄? 그게 뭔가.”
“이게 성사되면 말일세. 이안이 가진 힘을 다시 황가로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네.”
“설마……?”
“맞네. 이안 뷔트시겐을 손주 사위 삼아야겠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