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황궁의 서문을 막 벗어난 참.
“으윽.”
이안은 궁 문 끄트머리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코트 깃을 여몄다.
수도의 겨울은 뷔트시겐에 비한다면 봄날이었다.
해서 여태껏 추위를 느끼지 않았는데 이번 칼바람만은 뭔가…….
“싸하네. 굶주린 짐승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미뤄뒀던 일을 해치우고 나니 허한 것 아니겠누.]
“그런가?”
녹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한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비록 황제에게 확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네 의중은 충분히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라.>
물러나는 순간까지도 황제의 속내는 가늠키 어려웠다.
그렇다 한들.
독대로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 시점에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황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이란 격류, 그것에 휩쓸려서 떠밀려 가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안은 잠시간 머릿속을 정리해보았다.
우선해야 할 것과 나중으로 미뤄도 될 것.
거미줄처럼 얽혀 부유하던 것들을 분류한 후였다.
복잡함을 걷어낸 이안은 텔로스를 부르려 코트의 단추를 톡톡 두드렸다.
포로롱.
경쾌한 두드림에 텔로스가 곰살맞게 우짖었다.
“독대도 끝났겠다, 이제 스승님이 가장 고대하던 행선지로 가 볼까요.”
[푸흘흘. 그러자꾸나. 어서 가자.]
울음소리에 맞춰 단추에서 새의 형태로 변한 텔로스.
텔로스는 이안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착지하며 접는 날갯짓이 어째 신이 났다.
텔로스가 드러내는 감정은 곧 녹스가 느끼는 것.
이에 이안은 눈가를 유려하게 반으로 접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크흠. 수도에 온 김에 파악해 봐야지. 문학의 위대한 흐름에 대해.]
“암요.”
[빨간 책이야말로 가장 유행에 민감하고, 가장 뜨겁게 유행을 선도하지.]
“늘 스승님께서 귀에 딱지가 얹도록 말씀하셨지요.”
[크흐흠. 서둘러야 한다. 아가씨는 왜 시종들의……, 교양 도서 4권이 나올 시간이 채 1시간도 안 남았다.]
텔로스, 그러니까 녹스가 작은 앞발로 이안의 어깨를 꽉꽉 눌렀다.
재촉이었다.
‘아가씨는 왜 시종들의 셔츠를 뜯었나’ 신간 발매일이었으니까.
기대와 함께 약간의 초조가 섞인 발짓에 이안은 푸스스 웃고 말았다.
“근데 녹스.”
[왜 그러느냐.]
“굳이 한 시간 전에 가야 해?”
[허허. 이래서 일반인과 겸상하는 게 아니지, 아니야.]
“뭘 또 정색씩이나.”
[네놈이 뭘 알겠누. 벌써 수도 외곽까지 줄이 늘어졌을 텐데 한 시간 전? 지금 이것도 하아아아안참 늦은 것이다.]
“참 대단들 하다.”
[멀었구나. 멀었어. 교양 도서를 탐독하는 덕후가 되기엔 갈 길이 구만리다.]
“하하핫.”
녹스의 타박마저 재밌어 이안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상업 지구를 가로질렀다.
길드 거리로 가기 전에 있는 잡화 거리.
그곳에 있는 어느 서점이 둘의 최종 목적지였다.
“그나저나 50년 만의 방문이랬지?”
[5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그 간판이 맘에 들어서 방문했었더랬지.]
“하긴. ‘젖은 목소리가 흐르는’, 딱 녹스 네 취향이긴 하다.”
[간판뿐일꼬. 주인장의 말발도 한 가닥 하는 통에 내 홀려서 400년 넘게 단골이지 않누.]
“유구한 전통과 역사가 있네?”
[고럼, 고럼. 빨간 책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에 내가 빠져서야 쓰나.]
“빠지면 섭하지 않겠…….”
잘 얘기하다 이안은 말꼬리 끝을 힘없이 뭉갰다.
머리가 핑글 돌면서 순간 어지럼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이러지?
누가 눈두덩이를 세게 후려친 것처럼 눈앞이 번쩍거렸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이안은 시야를 원래대로 돌리려 머리통을 흔들어 보았다.
몇 번 그랬더니 깜깜했던 시야가 다시금 제대로 돌아왔다.
“좀…… 어지럽다.”
[긴장이 풀려서 그럴 거다. 어제오늘뿐이 아니지. 지난 넉 달간 불의 가시 하나만 보고 달려왔으니 쯔읏.]
녹스가 앞발로 이안의 어깨를 힘차게 눌렀다.
이번 발놀림에는 근심이 한 움큼 녹아있었다.
[정말 아쉽긴 하다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안, 집으로 돌아가자.]
녹스가 딱 잘라 말하자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녀석이 이날만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잖아도 작가를 만난다고 수도로 오기 전날 밤잠을 설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안은 연거푸 괜찮다는 뜻을 내비쳤다.
“작가 보고 가자.”
[보긴 뭘 봐. 어서 돌아가자꾸나. 휴식이 먼저다.]
“진짜 괜찮대도 그런…….”
[어허.]
“이번 기회를 놓치면 우리 스승님 평생 후회하실 텐데.”
[제자의 건강보다 우선인 건 없다.]
“오올. 쫌 감동인데? 교양 도서보다 제자 사랑이 먼저라니.”
이안은 능청을 떨며 한 걸음을 떼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어지럼증이 도지면서 몸이 그대로 기울어버렸다.
이대로 머리통 깨지기 전에 어떻게든 중심을 잡아야겠다 생각한 찰나.
“괜찮나?”
서늘하다 못해 시리고, 아릴 정도로 유황불 냄새나는 음색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이안의 시야를 너울대는 핏빛이 채웠다.
……머리카락?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장막처럼 그의 앞을 가려 덮었다.
이 색깔, 이 목소리.
……살리카 가주!
이안은 헛숨을 들이켜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의 팔을 잡은 채로 살리카 가주가 정말 제 눈앞에 서 있었다.
* * *
“안색이 창백하군.”
이안의 얼굴을 살피던 살리카 가주는 천천히 팔을 놓았다.
떨어져 나가는 서늘한 손도, 가주의 표정도 모두 평온했다.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 얼굴.
아니지.
지난 생이 아예 없는 일이 되어버린 저 얼굴을 보자…… 창자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뭔가가 끓어올랐다.
당신이 사지를 찢어 죽인 뷔트시겐이 수천인데.
당신이 산채로 불에 태워 죽인 뷔트시겐이 또 수천인데.
어떻게 그리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냐고, 이안은 그만 따지고 싶어졌다.
물론 안다.
제가 겪은 일은 생생한 현실이지만 저 작자에게는 아직 훗날의 일이라는 것을.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쌓을 겹겹의 악업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시야가 점멸하고 이명이 울리고 속이 메슥거려왔다.
삽시간에 현재와 과거가 뒤섞이며 오장육부가 손으로 비틀어지듯 쥐어짜졌다.
흉통이 심장을 압박하면서 모든 혈관이 바싹바싹 말라 갔다.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네.’
언젠가 살리카 가주를 맞닥뜨릴 것을 대비해 수백, 수천 번 이 장면을 그려봤었다.
냉정해지자, 최대한 차분해지자, 죽일 듯이 미워도 참자.
한데…….
이 모든 다짐이 아무 소용없게 그대로 길바닥에 나동그라져 버렸다.
참 부질없는 짓을 했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이성과 논리가 먹힐 리가 없는데.
“…….”
어지러운 이안의 망막으로 보란 듯이 살리카 가주의 모습이 굴러 떨어졌다.
그가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제야 이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적의와 증오를 쉽사리 드러내선 안 된다.
멍청하게 굴 때도 아니었고.
이리 쉽사리 감정을 드러낸 채 어설픈 이빨을 내보이려고 돌아왔던가.
아니었다.
살리카 가주의 심장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는 건 차가워져야 가능한 일.
“후우.”
이안은 격류처럼 몰아치는 것들을 단숨에 내리눌렀다.
그가 감정의 파편을 수습하는 동안.
살리카 가주는 존재만으로 제가 딛고 있는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위압감? 포식자의 여유로움?
그딴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천외천은 그 자체가 땅이고 하늘이었다.
저런 자에게 순간의 분기를 못 참고 덤벼든다?
그건…… ‘나 자살하겠소.’ 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하여 이안은 누르고 눌러도 발작적으로 튀는 감정들마저 완전히 죽였다.
그 뒤 평소처럼 느릿한 어조로 살리카 가주에게 말을 건넸다.
“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괜찮은 것인가.”
“예. 며칠 잠을 설쳤더니 잠깐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흠. 뷔트시겐의 적자가 몸이 약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
“길에서 쓰러질 정도면 소문보다 더한 것 같군. 보아하니 뷔트시겐 가주가 속상하겠어.”
말의 알맹이는 근심인데, 살리카 가주의 표정은 흡사 밀랍 인형과 같았다.
말의 고저도 없고 감정의 고저도 없었다.
상황에 맞춰 이럴 때는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에 가깝달까.
심장이 없는 악귀.
그렇게 불렸던 예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지.
정확히는 늘 저 모습밖에 못 봤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밥을 먹을 때도, 대화를 나눌 때도, 심지어 사람을 죽일 때도.
한결같이 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이안은 은밀히 살리카 가주를 탐색하면서도 여상하게 대화를 기워나갔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응?”
“아버지께서 그리 속상하지만은 않으실 거란 뜻입니다. 혹한의 삭풍이 이는 설원, 그곳을 달리는 겨울 늑대가 약할 리 없지요.”
“겨울 늑대라. 일전에 뷔트시겐 가주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아, 그렇습니까.”
“내게 충고란 걸 할 때마다 항상 늘어놓던 입버릇이었어.”
“아.”
“겨울 늑대는 다리 한 짝이 없어도 설원을 달린다던가.”
살리카 가주는 제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는 이안을 가늘게 응시했다.
누가 뷔트시겐 그 작자의 아들 아니랄까 봐, 대화 내내 단 한 번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어떤 누구도, 심지어 그의 수호검조차도 제 눈을 똑바로 보지 않는데.
뒷짐을 진 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 기울기에 흥미로움이 잔뜩 배어 나왔다.
“흐음. 볼수록 판박이군.”
“아, 아버지와 말입니까.”
“단순 외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빛, 말투, 행동, 심지어 그 걸음걸이마저 똑같군.”
“걸음걸이…….”
“참 반듯도 하지. 지나온 자국을 이으면 일직선이 되는 걸음걸이라니.”
살리카 가주는 뷔트시겐 가주를 보듯 이안을 훑었다.
오만한 검은색 머리카락, 날카로운 얼굴, 단단한 팔다리, 올곧은 걸음새.
어느 것 하나 삐뚠 구석이 없었다.
확 꺾어버리고 싶게.
“…….”
이안은 살리카의 생각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심호흡했다.
살리카가 지금 어떤 궁리를 하는지 그가 모를까.
그림자가 빛을 싫어하고 달이 태양을 싫어하듯, 저 작자는 한결같이 아버지를 증오하는데 말이다.
눌어붙는 상흔처럼 질척하고 음습한 감정.
그게 원인이었다.
저 미친 작자가 과거에 아버지에게 저지른 만행은.
뷔트시겐이 무너진 마지막 전투 당시, 살리카는 아버지의 시체를 삐딱하게 쳐다보다 잔악하게 눈알을 파냈다.
저를 직시하는 칠흑의 동공이 몸서리치게 싫었다며.
강제로 입을 벌려 혀도 뽑았었다.
충고랍시고 나불대는 그 혓바닥이 재수 없었다며.
또한, 목울대를 부서트리듯이 도려냈다.
그 뻣뻣한 모가지가 소름 끼치게 눈에 거슬렸다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버지를 수없이 난도질하고 또 난도질했다.
이미 죽은 자가 영면에 들지 못하게 처참히도 능욕했더랬다.
‘젠장!’
과거가 생생해질수록 억누르고 있던 감정의 반동이 도로 몸집을 키웠다.
여태 잘 추스르고 있었는데.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불뚝 솟아오른 관자놀이의 힘줄.
그 즉시였다.
꽈악, 녹스가 이안의 오른쪽 어깨를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인내하라며 발톱까지 세워 그에게 경고하는 거였다.
[이안, 태동의 색을 읽는 자 앞이다.]
“…….”
[그러니 결코, 의심을 살 감정을 보여선 안 된다.]
녹스가 작은 소리로 몇 마디 뗀 순간.
가주의 시선이 이안의 어깨, 정확히는 텔로스 쪽에 머물렀다.
뭔가를 감지한 걸까, 아니면 우연에 불과한 걸까.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더 대화를 끌며 마주하고 있어 봐야 저만 불리해진다는 것이다.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살리카 가주가 불러오는 과거를 직면해도 평온할 수 있는 시간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안은 싹싹하게 가주를 쳐다보며 마무리 짓는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