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52화 (152/214)

제152화

“아버지의 동기였던 분을 뵈어 즐거웠습니다. 더 얘기를 나누고 싶으나 저는 이만 가봐야 할 듯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이안 뷔트시겐.”

“……예?”

“그럼 선약 장소까지 내 마차를 타고 가도록 하지. 또 쓰러질지도 모르니.”

어울리지 않게 웬 소름 끼치는 친절?

“아닙니다. 폐를 끼칠 순 없지요.”

“폐는 무슨. 뷔트시겐 가주와 동기였으니 이 정도 호의쯤이야.”

아버지가 말만 하면 입바른 소리 한다고 학을 뗀 주제에 무슨.

이안은 괜히 질척거리는 살리카 가주 때문에 곤란해졌다.

제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니면 철저히 무관심한 게 그였다.

그런 자가 저를 붙잡으려 한다?

좋지 못했다.

자리를 속히 떠야 할 듯싶어 이안이 입을 벙긋거린 그때.

“어머, 자기. 여기 있었어?”

고혹적인 울림이 대화의 틈바구니를 매끄럽게 파고들었다.

이후, 그의 팔을 휘감는 보드라운 감촉이 생생하게 맞닿아왔다.

이안은 조건반사적으로 고개를 제 오른편으로 돌렸다.

……청록색 머리카락을 지닌 요염한 미인이 서 있었다.

대체 누구지?

누군데 저를 자기라고 부르며 아는 척을 하는 걸까.

* * *

[들러붙지 마라, 동쪽 관리자.]

“흘흘흘.”

[살리카 그놈한테서 떨어질 명분을 준 건 고맙다만.]

녹스는 앙칼지게 양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 움직임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이안의 팔을 붙잡고 있던 관리자가 순순히 팔짱을 풀었다.

“……동쪽의 관리자 오쿨루스.”

이안은 놀라움을 담아 청록색 머리카락의 미인을 직시했다.

탑의 관리자를 수도에서 보게 될 줄이야.

것도 인간형의 모습으로 말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이안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흐응.”

이안이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어디 흔하던가.

자신이 그 경우 중 하나가 된 게 기꺼운지 관리자가 개구지게 눈꼬리를 접었다.

날렵하게 올라간 그녀의 눈매가 뭉그러졌다.

요염한 미인에게서 묻어나는 훈풍에 누가 설레지 않을까.

눈이 발끝에 달려 있지 않은 한.

[순진한 내 제자를 홀리려 들지 마! 천년 묵은 기린 놈아, 훠이.]

아, 물론 눈이 제대로 달려있어도 예외는 있다.

취향도 결국 개인의 호불호에 달린 거니까 말이다.

“흘흘흘. 수호자여, 그거 아는가.”

[무얼?]

“그렇게 질색팔색하니까 어째 그대를 건들고 싶잖아.”

방방 뛰는 녹스와 그럴수록 입매가 더 짙어지는 동쪽 관리자.

둘의 공방을 보며 이안은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대체 관리자가 왜 여길.’

잠시 골몰했으나 애초 제가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해서 이안은 더 고민하지 않고 그냥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이 수도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겁니까.”

이안의 물음에 관리자는 눈을 간드러지게 찡긋했다.

“숙녀의 비밀을 함부로 캐는 건 무례란다, 아가야.”

“아…….”

“이 시큼털털한 반응은 대체 뭘까.”

“크흠. 어쨌든 그리 말하니 더는 묻지 못하겠군요.”

이안의 칼 같은 단념에 동쪽 관리자가 눈꺼풀을 끔벅거렸다.

이렇게 쉬이 물러날 줄은 몰랐다.

대개가 제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끈덕지게 쫓아다니며 엄청 성가시게 구는데.

한데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순순히 물러났다.

그 태도를 보니 뭐랄까.

괜스레 뭔가를 끼얹어주고 싶어졌다.

관리자는 청록색 속눈썹 사이로 스미는 이안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린 결속자야, 뭐 하나만 묻자.”

“물어보십시오.”

“네 눈에도 내가 제국 제일가는 미녀로 보이니?”

“솔직히 말할까요, 아니면 양념 좀 칠까요.”

“흘흘. 듣지 않아도 답을 알겠구나.”

“음.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워낙 강렬했던지라.”

“결국 네 눈은 못 피했네. 눈만큼 속이기 쉬운 감각은 없는데.”

“…….”

“흐응. 좋아. 날 파악 값이다. 아니, 내게 현혹되지 않은 값이다. 내 너에게 선물 하나를 주마.”

“선물이요?”

이안의 반문에 동쪽 관리가 봉긋한 광대를 샐룩거렸다.

그러더니 어딘가 모호하고 의뭉스러운 서두를 던졌다.

“특별함은 때때로 누군가가 만들어낸 기적의 다른 말.”

맥락이 없는 말의 알맹이에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갑작스러운 서두긴 한데…….

미몽의 포식자라고 불리는 동쪽 관리자의 말은 무시해선 안 된다.

때때로 예지몽을 꾸니까.

“그리고 기적의 뒷면에는 언제나 그렇듯 뒤틀림이 존재하지. 그러니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그 실체를 잘 들여다보렴.”

특별함, 기적, 뒤틀림.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말들이었다.

“라세르타가 시작되는 곳에서 말이다.”

“그게 무슨…….”

눈가를 찌푸린 이안이 대체 무슨 의미냐고 재차 묻기도 전.

다그닥.

그의 붙잡음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동쪽 관리자가 발을 약하게 굴렸다.

그러자 보라색 드레스에서 청록색 물결이 일어났다.

화아아아악!

물방울 수준이던 색의 물결은 삽시간에 관리자를 집어삼켰다.

자신이 한 말을 명심하라는 눈빛을 보내는 관리자.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간다는 흔한 인사조차 없었다.

관리자는 그렇게 이안의 망막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돌을 던진 자는 사라졌지만, 정작 돌에 맞은 개구리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눈썹머리를 내려트리며 동쪽 관리자의 말을 곱씹었다.

“무슨 뜻일까, 녹스.”

[흐음. 그놈은 제가 꿈을 포식한 자에 한정해서 예지몽을 꾸는데.]

“내 꿈을 포식한 이후 뭔가를 봤다면…….”

[네가 아는 사실과 뭔가 다른 점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싶다.]

“다른 점이라.”

[그걸 찾아내라는 것 같군.]

핵심을 쏙쏙 짚어낸 녀석이 오랜만에 지적인 면모를 마구 뽐냈다.

진중할 땐 언제고.

풀이하면 할수록 뭔가 심사가 뒤틀리는지, 쌀알 같은 송곳니가 도드라졌다.

[하여간 정이 안 가, 정이.]

“우리 스승님, 또 급발진하시네.”

[기린 노무 자식이 하는 꼴을 봐라. 알려 줄 거면 속 시원하게 다 까발릴 것이지 어? 수수께끼를 던지고 토껴?]

“하하. 뭐라도 던져준 게 어디야.”

이안은 태평하게 대꾸하고선 동쪽 관리자가 서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 자리에는 흐릿함만 미지근하게 고여있었다.

관리자가 남긴 말처럼 모호한 형태를 한 채로.

하긴.

어디 불확실한 게 그뿐일까.

동쪽 관리자의 행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리자가 그라나토스를 벗어났다는 건 누군가와 결속을 맺었다는 건데…….”

[대체 누가 기린 노무 자식과 결속을. 아니, 것보다 그놈이 결속을?]

“좀 의외란 목소리네.”

[동쪽 관리자니까. 그놈의 성정상 평생 꿈이나 만지작거리며 살 줄 알았거늘. 한데…….]

방구석에서만 살 것 같은 사람이 밖으로 나온 격이었다.

그래서 더 걸린다.

안 그러던 사람이 뭔가를 한다면 응당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이안, 아무래도 로르랑 루체한테 부탁해야겠다.]

-동쪽 관리자를 주시해 달라고?

[어. 음흉한 기린 놈의 결속자가 누구인지 알아봐야겠다.]

* * *

그 시각.

살리카 가주는 마차를 타고 상업 지구를 벗어났다.

마차 바퀴가 잘 정돈된 표면을 긁는 소리, 누군가가 웃고 떠드는 소리, 욕설과 고함…….

온갖 소음이 쏟아져 들어오는 마차 안.

살리카 가주는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그가 내보이는 미세한 감정.

그것을 맞은편에서 정면으로 목격한 수호검은 움찔했다.

제 주군이 저런 식으로 입술을 씰룩거린다?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왜냐면 저 표정을 보일 때마다 일이 커지곤 했기 때문이다.

열 명 죽을 거 백 명이 죽고, 마을 하나가 날아갈 거 두 개가 날아간다.

언제나 그랬다.

한 번이라도 빗나간 적이 있던가.

없기에, 수호검은 오늘 역시 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데 그녀의 예측이 헛짓이었다는 듯.

“내가 실수했군.”

실수?

실수라는 말을 가주가 들먹인 게 맞나 싶어 수호검은 눈만 끔뻑거렸다.

그를 모시는 30년 동안 처음 듣는 말이었다.

도통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소리.

……잘못 들었나.

그래, 환청일 거다.

차라리 수호검은 그렇게 단정 지으며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 했다.

실제 주군이 실수……라는 말을 했다면 그건 정말.

‘재앙으로 돌아올 거다.’

실수를 메우기 위해 주군이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완벽주의자가 작은 흠집을 절대로 용납할 리 없으니까.

시끄러워진 수호검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비루먹게 약하든, 골골대는 새끼든 늑대의 자식은 늑대인데.”

“…….”

“그저 뷔트시겐 그 작자를 압박할 패로만 여겼으니. 적을, 그것도 뷔트시겐을 얕본 셈이 되어버렸어, 진정으로.”

살리카 가주의 올라간 입꼬리가 진하게 비틀렸다.

그제야 수호검은 제 주군이 말한 실수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가주는 파리 하나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설마 손짓 한 번이면 끝장날 걸 몰라서 그런 것일까.

그만큼 신중하다는 거였다.

그런 성정인데 이안에 관해서는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물론 일전에 사냥개를 통해 조사한 적은 있다.

‘그건 책 잡을 만한 게 있나 간 보는 수준이었지.’

주군이 작정했다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감시자부터 밀착해서 붙였을 터.

이안의 일거수일투족, 숨 쉬는 횟수까지 모조리 세어 보고하라고 했을 거고.

수호검이 상념에 잠긴 사이.

살리카 가주는 창틀에 팔을 얹고는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토록 시린 파란색이라니.”

“……혹, 이안 뷔트시겐을 두른 태동의 색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투명함에 가까운 냉정이라. 재미있어.”

“감정을 조절하는 게 능숙해 보였습니다.”

“그건 능숙한 수준이 아니었지. 완벽한 제어였으니까.”

살리카 가주의 흥미를 끈 건 그 점이었다.

굴곡진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이안이 감정을 가지고 논다는 것.

처음 만났을 때 내보인 증오도, 어쩌다 한 번 불쑥 튀어나온 비탄과 섬뜩한 증오도.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처음 만난 저에게 그토록 짙은 감정을 품을 리 없으니까.

아니지.

설령 그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의 흥미가 동한 건 이안이 감정을 내보인 직후의 처리 방식이었다.

일절 동요를 보인 적 없다는 양 금세 냉정을 되찾았으니까.

단순한 냉정이 아니라 맑고 깨끗해 아무도 살지 않는 호수와 같아졌다.

밑바닥까지 보이나, 보이는데도 심층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상태.

시리다 못해 손이 저릿해 오는 냉정의 색을 본 적 있던가.

그가 살아오는 생 동안 처음이었다.

‘뷔트시겐 그 작자도 날 놀라게 하더니 그 아들 역시.’

살리카 가주는 재미있다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가 내보이는 최대치의 감정 표현이었다.

“역시 범상치 않아.”

“아…….”

“수도 나들이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군. 비록 2황자는 죽이지 못했지만.”

낮게 중얼거린 가주는 재차 손가락을 위로 튕겼다.

“새끼 늑대 하나를 주웠으니 손해를 보지는 않았어.”

“그럼 그자에 관해…….”

수호검이 입을 떼자마자였다.

아직 목소리를 낼 때가 아니라는 듯 가주가 제 할 말을 이어갔다.

“한데 그 늑대가 가진 기운이 참 묘하더군.”

“마치 어두운 밤 같았습니다. 심히 짙고 짙어서 파악이 잘.”

“그 때문에 따라가 말을 걸어본 것인데.”

“…….”

“지척에서 보니 더 희한하더란 말이지. 어찌하여 내가 데리고 있는 새끼 쥐와 그 기운이 같을까.”

새끼 쥐는 알을 얻은 라이라프스를 말하는 거였다.

한데 그 녀석을 닮았다고?

가주의 품평에 놀란 수호검은 입을 벌렸다가 얼른 닫았다.

하마터면 주군이 싫어할 짓을 또 할 뻔했다.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운을 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