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기운이라는 건 마력핵에서 나오는 거라 저마다 다르지 않습니까.”
설령 핏줄로 이어진 부모 형제간이라도 다르다.
이것은 불변의 법칙이었다.
“그러니 거슬릴 수밖에. 어깨 위에 있던 무 속성의 정령도 걸리고.”
“…….”
“흠. 아무래도 새끼 늑대를 관찰해볼 필요가 있겠어.”
가주의 이마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게 마뜩찮은 것이다.
정보의 부재, 이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것을 강박적으로 싫어하는 가주의 성정.
그를 아는 수호검은 아까 하지 못한 말을 서둘러 꺼냈다.
“정보부를 가동해 최선을 다해 알아내겠습니다.”
“어떻게 최선을 다할 거지?”
대개 지시만 내리고 마는데, 그런 가주가 질문을 던졌다는 것.
이는 그가 이 일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때 답변을 잘못하면 측근이고 나발이고 없다.
그렇기에 수호검은 혀로 입술을 축인 뒤 신중하게 입을 뗐다.
“가주가 사는 종가는 몇 번의 검증을 거친 자들만이 기거할 수 있습니다.”
“흐음.”
“그들은 제 목숨이나 가족의 목숨이 위협당해도 가주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만이 가주의 곁에 설 자격이 있다.
오직 가주를 위해 살고, 오직 가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들만이.
가주의 곁붙이란 특권은 그런 의무 위에 피어난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부추기기도, 세작을 몰래 잠입시키기도 힘듭니다.”
“…….”
“하나,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약점을 가진 자를 찾아내겠습니다. 반드시.”
“흠. 그런 자라면 하나 있긴 하지.”
“아, 이미 염두에 둔 자가 있으시다면 그자를…….”
“네 생각은?”
“실은…… 이전부터 주시하고 있던 자가 있긴 합니다.”
수호검은 말하는 내내 주군의 입매를 곁눈질했다.
입매가 일자인 것을 보니 여태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계속 말해도 된다는 신호라 수호검은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마력핵이 없던 적자가 제자리를 찾으면서 갈 곳이 없어진 후보자 말입니다.”
“2장로 파가 밀고 있는.”
수호검의 말을 차분히 듣던 가주가 고저 없이 뇌까렸다.
“그자라면 철벽의 얼음 성인 뷔트시겐의 심처를 들여다볼 수 있을 터.”
“예. 접근해보겠습니다. 신중하게.”
* * *
뷔트시겐 본가, 가주의 집무실.
연무장을 다녀온 가주는 안으로 들어서다 멈춰 섰다.
‘……늙은 너구리가 이번엔 무슨 일이지.’
주인도 없는 방에 객인 2장로가 먼저 와 있었다.
딱히 무례는 아니었다.
할 말이 있는 장로는 왔다 갔다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려 집무실에서 기다리곤 하니까.
다만 그게 2장로 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2장로는 보통 가주가 없다고 하면 지체하지 않고 쌩하니 떠난다.
대신.
심각하게 따질 일이 있을 시에는 이리 눌러앉곤 한다.
이번 참에는 대체 뭣 때문일지.
의아했지만 가주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온전히 안으로 들어섰다.
“요즘은 방문이 뜸하더니 웬일이십니까, 2장로님.”
“크흠. 그냥 왔소이다.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게요.”
“그럴 리가요.”
가주는 흘끗 2장로를 보곤 집무실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이미 날인이 된 서류들을 재차 검토하며 확인을 해나갔다.
검수를 마친 서류가 늘어가는데도 2장로는 조용했다.
해서 가주는 그러려니 하고 남은 서류마저 차츰차츰 줄여나갔다.
사각사각.
깃펜의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찻잔을 채워가는 동안.
2장로는 가주의 동선을 눈으로만 따라다니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아케랑코만 벌써 석 잔째 축낼 뿐.
설마 차가 떨어져서 그거 마시러 왔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으응?”
“날 만나러 온 연유가 있는 것 같은데, 대체 그게 뭐길래 이리 뜸을 들이십니까, 2장로님.”
“어흠. 겨울이 깊었습니다.”
“아. 삭풍이 부는 혹한기지요.”
“이곳에 막 터를 잡은 초기에는 이맘때쯤 동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데……. 지금은 그런 허망한 죽음은 없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비를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요.”
가주는 말을 나누면서도 이 대화의 목적이 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혹한기 대비라면 반년 전부터 안건이 오가고 결론이 났다.
한데 케케묵은 주제를 또 꺼내는 저의가 뭘까.
가주의 머릿속이 바쁜 가운데 2장로가 짐짓 여유로운 척 말을 붙여왔다.
“아 참. 혹한기 하니 이맘때쯤의 중요한 일정이 떠오르는군요.”
“중요한…… 아아. 생도 수습을 말하는 것입니까.”
가주는 그에 대해 생각하며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생도란 예비 정령 기사를 일컫는다.
15~19세 사이의 전도유망한 아이들로 구성된.
그리고 이 생도들은 두 달의 수습 기간을 거친 후 군대에 편성된다.
검은 늑대라 불리는 기사단, 늑대의 그림자라 불리는 정보부, 히루푸스라고 불리는 공중 부대.
이 세 곳 중 하나에 말이다.
“일정이 끝나면 새로운 피가 수혈되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가주.”
“뷔트시겐이 더 강해질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매끄러운 대화 중간중간 2장로는 손바닥을 연신 비볐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다, 종내엔 목 상하겠다 싶게 헛기침을 해댔다.
할 말을 미처 못 꺼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대체 용건이 뭐기에.’
2장로가 누구던가.
지나치게 솔직해서 때로는 가주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자였다.
이안을 반편이라고 서슴없이 칭할 정도로 말이다.
그만큼 솔직함을 빼면 시체인 자인데, 수상쩍게 머뭇거리고 있었다.
“흐음.”
가주는 자꾸 목청만 가다듬는 2장로를 향해 실눈을 떴다.
탐색하는 시선에 2장로가 또, 아니지 넉 잔째 되는 홍차를 들이부었다.
“아케랑코가 참 달구려.”
“그 말만 벌써 서른 번째 하고 있습니다, 2장로님.”
“큼. 이번 생도들 말입니다. 가주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발탁하셨더이다.”
……‘아하!’였다.
변죽만 울리던 2장로의 저의가 무엇인지, 이제야 가닥이 잡혔다.
이번 생도의 구성에 대해 따지러 온 거였다.
금년은 지금껏 이어져 온 형태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으니까.
이안이 추천한 자들, 그러니까 에루리안의 C반 또한 생도라는 점 말이다.
아마도 2장로는 이 사실이 못마땅한 것일 터.
“2장로도 아실 겁니다. 생도 후보 발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추천과 내정을 통하지요.”
“그 이후,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쳐 생도로 최종 발탁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
“에루리안의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 과정을 거쳤습니다.”
기존에 먼저 뽑힌 생도들과 실력 차가 많이 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 두 가지로 인해 발탁되었을 뿐 다른 이유가 개입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안의 추천이라 얼렁뚱땅 봐준 게 아니란 것인즉.
이에 대해 가주는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못 박았다.
가주의 말을 경청하던 2장로.
그는 묵직하게 찻잔만 빙글빙글 돌리다가 가만히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행동이 가주의 오해를 산 것 같소이다.”
“오해요?”
“내가 생도 얘기를 꺼낸 건 도련님 때문이었습니다. 도련님도 이번 수습 기간에 참여하니 말이오.”
“아아. 후계자 후보라면 누구나 거쳐 가는 과정이지 않습니까.”
“물론이외다. 하나 도련님이 있는 이상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성싶어서 말입니다.”
“2장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정당한 후계자가 되려면 과정에 특혜나 편파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허. 넉 달 만에 에르그 2성을 찍은 분이외다.”
분?
반편이에서 대체 언제 ‘분’이 되었을까.
엄청난 신분 상승에 입가가 푸들거려 가주는 입술을 감쳐 물었다.
이제야 헛다리 대신 완벽하게 감이 잡혔다.
늙은 너구리가 변비 환자처럼 안절부절못한 이유에 관해서 말이다.
강한 자라면 끔뻑 죽는 2장로이니 오죽할까.
성장이 빠른 이안이 퍽 성에 차서 욕심이 난 것이다.
‘하여 가르쳐 보고 싶은 거로군.’
2장로의 단순함을 귀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태세전환이 빠르다고 타박해야 할지.
가주는 헛웃음이 터지는 입가를 가리며 턱을 괴었다.
‘본래는 1장로를 스승으로 내정해두었는데.’
다른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1장로는 이안을 처음부터 지지했던 자라 믿을 수 있으니까.
거기다 실력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를 스승으로 두면 이안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두어 달 전 종탑에서 1장로와 대화를 나눈 뒤 이미 정한 바였다.
하지만.
‘2장로의 속내가 저렇다면.’
그를 스승으로 두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아니, 두 장로이면 금상첨화였다.
삶의 방식이 부드러운 1장로와 삶의 방식이 힘 하나라 우직한 2장로.
둘의 장점을 이안이 흡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니까.
계산을 마친 가주는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즉각 내뱉지 않고 홍차를 들이켜며 이 순간을 음미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2장로가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또 볼 수 있겠는가.
* * *
차 한잔을 다 마신 후였다.
가주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숭을 떨며 운을 뗐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커흠. 수습 기간에 도련님을 가르칠 스승은 누구로 할지 정하셨소이까.”
2장로의 속내가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입매를 올린 가주는 2장로를 약 올리기 위해 부러 찬찬히 말문을 열었다.
“아, 그거라면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다.”
망설임 없는 가주의 답에 2장로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역시 1장로구나.’라는 꿈틀거림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2장로가 말을 빙빙 돌리던 전략을 내팽개쳤다.
그는 콧구멍을 벌름대며 1장로의 흠을 하나씩 까기 시작했다.
“설마 1장로 그 책상물림을 도련님의 스승으로 낙점하신 게요?”
“1장로님만한 분이 어딨겠습니까.”
“그 물렁한 인사가 도련님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소이까.”
“지금은 뒤로 물러났다 하나 한때 ‘질풍의 늑대’라 불렸던 분입니다. 그러니 자격은 차고 넘치지요.”
“뒷방 늙은이가 된 지가 언젠데. 에잉.”
2장로가 연신 툴툴거렸다.
말투는 거친데 어쩐지 기색만큼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가주가 하도 단호하니 1장로를 까는 전략이 안 먹힌 것이라 여긴 모양.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지 2장로가 제 가슴팍을 팡팡 쳤다.
찰진 소리가 났다.
탄탄함을 자랑하더니 이번엔 전략을 바꿔 본인의 잘남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가주께서 잊은 것 같소이다.”
“또 무엇을요.”
“나는 말이외다. 아직 임무를 나갑니다.”
“알고 있습니다. 스물의 젊은이보다 더 팔팔해서 따라잡기 힘들다, 그리 보고서가 올라오니까요.”
“맞소이다. 내가 젊은것들보다 마물도 더 많이 잡고, 임무도 더 많이 완수하지 않습니까.”
“2장로님이 건강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니 그걸 또 그렇게 받아치면…… 에잉.”
속이 타는지 2장로가 홍차를 또 벌컥벌컥 들이켰다.
벌써 다섯 잔째였다.
꿀렁거리는 목울대에 알알이 박힌 건.
‘난 아직 현역이다. 날 뽑아라. 내가 더 잘 가르칠 수 있다.’
명백하게 그런 것들이었다.
꿀꺽꿀꺽.
애타는 목 넘김 때문인지, 아니면 그 간절함이 넘실거리기 때문인지.
가주의 뇌리로 오래된 기억 하나가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정확히는 장면이라기보다 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