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54화 (154/214)

제154화

<내 가문, 발르와 가를 책임져야 하는 자로서 어쩔 수 없이 원로원에 몸담고 정치질을 하고 있소만……. 언젠가 내 성에 차는 강자를 만나면 꼭 그의 스승이 되고 싶소이다.>

언젠가 2장로가 간절함을 담아 그리 말한 적이 있더랬다.

강했기에 발르와 가의 가주가 되고 원로가 되었을 뿐.

실제 그는 땀내 나는 연무장을 더 좋아했고, 긴장을 조여야 하는 임무를 더 좋아했고, 피가 끓는 전장을 더 좋아했다.

아마 무거운 책임감만 아니라면 틀에 매이지 않은 채 살았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2장로의 한 서린 염원을 어찌 모를까.

하여 가주는 제법 누글누글해진 말투로 슬쩍 본심을 흘렸다.

“굳이 스승이 하나일 필요는 없겠지요.”

“하나일…… 필요는 없다?”

“예. 둘일 수도, 셋일 수도 있지요. 이안이 원하면 시간을 나눠 다른 분에게도 맡겨볼까 합니다.”

“다른 분이라면 누구……?”

2장로의 얼굴에 화색과 기대가 감돌았다.

‘나지, 나로 정하시오.’라는 눈빛이 빤하지 않은가.

하지만 끝내 가주는 2장로가 원하는 말을 끄집어내지 않았다.

“그에 대해선 1장로님과 상의해서 정하려고 합니다.”

“그럼 1장로가 추천하는 자를 가주께서도 받아들이겠단 뜻입니까.”

“그럴까 합니다.”

“오호라. 가주의 뜻은 충분히 알겠소이다.”

가주의 느물거리는 어투를 뒤로하고 2장로가 탁자를 후려치며 일어섰다.

왠지 비장했다.

내가 1장로 그 능구렁이 하나 삶지 못할까, 그런 몸짓이었다.

“내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일에 치여 죽을 판인 가주를 이 이상 붙잡고 있는 것은 불충이니.”

“급히 가실 데가 생긴 모양입니다.”

“1장로와 긴히 할 얘기…… 커흐흠. 내, 볼일이 있어서 말이외다.”

“하하. 급하지 않으면 차라도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아니외다. 내 그럼 바빠서.”

더 있으라 붙잡을 짬이 없었다.

2장로는 이동 스크롤이라도 찢은 사람처럼 삽시간에 집무실을 떠나버렸다.

폭풍이 가시고 홀로 남은 가주.

가주는 텅 빈 소파를 물끄러미 보다…… 얼마 안 가 파안대소를 했다.

늙은 너구리를 귀엽다고 생각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얼마나 정신없이 웃었던지 뱃가죽까지 억세게 당겼다.

“그나저나 2장로가 스승 하겠다 자청한 걸 알면 이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조금 있으면 올 이안의 반응이 사뭇 기대되었다.

그 아이도 왠지 저처럼 이를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가주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워프 게이트 초소의 청색 지붕이 유난하게 반들거렸다.

* * *

“독은…… 안 들었겠지?”

이안은 산딸기가 듬뿍 얹어진 타르트를 마나 폭탄 보듯 보았다.

그럴밖에.

이 타르트를 준 이가 바로…… 2장로였기 때문이다.

워프 게이트를 막 통과해 ‘아, 집이구나.’ 감회에 젖어 들려던 차.

<잘 지내봅시다, 도련님.>

성난 멧돼지처럼 돌진한 2장로가 선물이랍시고 웬 상자를 떠넘겼다.

그의 기세가 결투를 신청할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잘 지내자는 건지, 아니면 최선을 다해 싸우자는 건지.

한참을 기다린 듯 코끝이 발갛지만 않았어도 정말 오해할 뻔했다.

“한데 스승이라.”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다른 이유를 차치하고 2장로가 자청했다는 것에서 더 그랬다.

제 자식은 물론 손주에게까지 가르침을 준 적이 없는 이지 않던가.

그랬던 사람이 저를 가르치겠다고 하다니…….

뭔가 묘한 심상이 일어 이안의 고개가 모로 꼬아졌다.

그러던 찰나.

[으흐흐흐흑.]

괴이한 흐느낌이 너른 방을 가득 메우며 그의 사고를 방해했다.

제 방에서 이리 꺽꺽거릴 인사가 누구겠는가.

당연히 녹스밖에 없었다.

“…….”

줄초상이라도 난 듯한 서러운 울음소리.

그럼에도 이안은 녹스를 흘끗 볼 뿐 별말을 하지 않았다.

녀석이 저러는 이유를 아니까.

‘수도 마지막 날인 어제가 문제였지.’

어제는 별로 유쾌한 날은 아니었다.

살리카 가주를 만났지.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동쪽 관리자를 만났지.

가장 큰 문제는.

책 발매일인데 책은 안 나오고 작가가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불운을 실험해 보려는 듯한 일이 연속으로 몰아닥쳤다고나 할까.

그 결과가 지금의 우거지상인 녹스고.

‘한동안은 우울해하겠군.’

이안은 살풋 견적을 내본 뒤 도로 문제의 디저트 상자로 고개를 돌렸다.

그 무신경함이 괘씸한 걸까.

방금까지 괴이쩍은 울음을 토해내던 녹스가 탁자를 쾅쾅 치며 서러움을 표출했다.

[고얀 것!]

“평소에도 불초 제자였던 지라.”

[하나뿐인 제자가 스승의 상심을 달래줄 생각은 안 하고 그저 먹을 생각만.]

“달달한 거 먹으면 기분이 나아지니까?”

[매정도 저런 매정이! 너나 많이 퍼먹어라. 아주 유병장수하시겠어.]

“악담을 피하려면 그 수밖에 없네. 스승님 취향에 맞는 글을 써서 내가 작가가 되는 수밖에.”

[흥. 작가는 아무나 되는 줄 아누.]

“그러니까. 아가씨는 왜 시종들의……, 그 작가는 그 어려운 걸 해냈으면서 어쩌자고 4권과 함께 사라져선.”

[아니, 발매일에 도망가는 작가라니. 허 참.]

“허 참.”

[이게 말이 되니?]

“말이 안 되는데, 되네요. 압박감에 글을 못 썼다잖아. 이번 참엔 영상석과 함께 특별판을 내려다 그게 전부 엎어지는 바람에.”

[기다려 줄 수 있는데! 천년이고 만년이고 기다려 줄 수 있는데!]

“곧 돌아오지 않을까.”

[아예 연락 두절이라는데 언제? 언제 돌아오는데!]

“나야 모르지.”

이안은 건조하게 어깨를 위로 들어 올렸다.

삭막한 제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속이 더 꼬이는 것 같았다.

녹스는 도로 탁자에 널브러져 흐물흐물 녹아갔다.

[으흐흐흐흐.]

흐느낌인지, 웃는 건지.

녀석이 서서히 정신줄을 놓아가고 있던 그때, 이 흐름에 종지부를 찍어주겠다는 것처럼.

똑, 또옥 하는 독특한 문 두드림이 바깥에서부터 들려왔다.

칼브란이었다.

“들어와.”

이안의 반가운 허락이 떨어지고 몇 초 있다가 칼브란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여느 날과 같이 은쟁반을 들고 있었다.

준비된 집사는 이안에게 묵례를 한 뒤 상실을 겪는 녹스에게 다가갔다.

결연한 걸음새, 외알 안경을 추켜올리는 당당한 손짓.

그로 보아 녹스를 달랠 어떤 해결책이 있는 듯했다.

이안의 직감에 확신을 주고 싶은지 칼브란이 녹스를 부드럽게 불렀다.

“수호자님.”

“크응. 나의 충실한 종 왔느냐.”

“예. 충실한 칼브란이 왔습니다.”

“너를 보니 울적함이 가신다만. 으흑. 길게 얘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구나.”

“그러실 거라 예상했습니다.”

“크흐흥.”

“하여 상심했을 수호자님을 위해 제가 준비한 게 있습니다.”

“설마, 호옥시! 그 작가를 잡아 온 게냐?”

“이 칼브란 그것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만, 대신.”

칼브란은 은쟁반의 덮개를 치운 뒤 녹스에게 내밀었다.

자신만만하기에 녹스는 슬쩍 은쟁반으로 눈길을 떨어트렸다.

뭔가 했더니…….

영롱하게 반짝이는 은쟁반 위에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 * *

『마왕 성에 떨어진 공주는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나』

고급스러운 보라색 양장본.

그 위에 휘갈겨진 멋스러운 필기체의 제목.

그것을 본 녹스는 눈을 빛내다가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애정하는 작가의 책이 아니었기 때문.

“가져온 정성은 고마우나, 그 작가 책은 재미가 없다.”

“예, 수호자님의 취향이 어떤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안다니 솔직히 말하지. 그 작가 건 얌전하고 단정하고 정갈해서 쪼는 맛이 없어. 그래서 손이 안 가.”

“…….”

“필명만 해도 그래. 마담 바이올렛이라니. 싯구금 작가의 필명이 그리 참해서야.”

반면 아가씨는 왜 시종들의 셔츠를 뜯었나의 작가 필명은 어떤가.

‘거긴 안돼요.’

필명만큼 책의 내용도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고 거기다 막장이었다.

본디 막장만큼 사람을 뒤흔드는 건 없다.

무진장 욕을 하면서도 절대 손에서 놓지 못한다는 악명이 괜히 붙었겠는가.

인기가 많은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거긴 안 돼요님의 책이 아닌지라 썩 맘에 차지 않으실 수 있으나…….”

칼브란은 녹스에게 더 은밀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먹잇감을 던지는 모양새로 책의 표지를 비밀스럽게 넘겼다.

“이 책으로 말하자면…….”

무언가를 말하려던 칼브란은 일순 모든 행동을 정지했다.

이안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

그와 눈이 마주친 칼브란은 이안의 시야를 가리려 왼쪽으로 더 이동했다.

아이의 정서에는 좋지 않다나, 뭐라나.

이안으로서는 퍽 어이없는 소리를 하고선 칼브란이 책을 한 장 더 넘겼다.

그때까지도 녹스는 시큰둥했다.

그러다 성의도 있으니 한 번 봐볼까 하며 흘끗 책을 곁눈질했더랬다.

그 즉시.

“……오오!”

녹스가 탄성을 지르며 시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흡사 관 뚜껑을 박차고 일어나는 것 같은 모양새랄까.

대체 뭘 봤길래 저러나.

호기심이 인 이안은 몸을 일으킨 뒤 칼브란의 어깨너머를 훔쳐보았다.

부활하듯 녹스를 벌떡 일으키고 눈알이 튀어나오게 한 것.

그것은 시스루 차림의 공주가 옴팡 젖은 채로 마왕에게…….

자극적인 맛보기를 보여준 후 칼브란이 책을 매정하게 덮었다.

“감질 그 자체지요.”

“마담 바이올렛이 이런 책을?”

“이번엔 칼을 갈았다고들 하더군요. 호적수인 거긴 안돼요를 이기기 위해.”

“오호.”

“오죽하면 출간일까지 동시에 잡았겠습니까.”

“그럼 어제……?”

“예. 어제 나온 아주 따끈한 신작입니다.”

“신작은 내가 또 못 참지.”

“수호자님 취향에 맞으실 겁니다. 공주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아주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서술이 된…….”

칼브란은 또 거기서 얘기를 끊었다.

녹스를 실컷 안달나게 할 땐 언제고, 충실한 집사장께서 안타깝다는 양 은쟁반의 덮개를 덮었다.

상심한 표정을 덤으로 단 채.

연기가 일품이었다.

“하나 수호자님께서 마뜩찮아하시니…….”

“아니, 내가 언제!”

목청을 높인 녹스는 그런 적 없다는 양 은쟁반을 갈취했다.

그야말로 갈취였다.

그런 뒤에는 은쟁반 위로 제 몸을 덮어 소유권을 주장했다.

“크흐흠. 이 좋은 걸 받았으니 어쩐다.”

“성에 차시면 그걸로 되었습니다.”

“아니지. 내 그만한 값을 해야지.”

“이 칼브란, 수호자님께서 기뻐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서로서로 얻는 게 있으면 좋잖아.”

“크흠. 그렇다면 아주 소소한 부탁이 있사온데…….”

어쩐지 이때만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칼브란이 조심스럽게 양피지 하나를 탁자에 꺼내놓았다.

그러더니 오른쪽 귀퉁이를 가리키며 은근하게 청했다.

“여기에 수호자님의 인장을 찍어주시겠습니까.”

“거기에?”

“예. 요쪽 하단에.”

“그게 뭐 어렵다고.”

녹스는 말랑한 앞발을 들어 양피지에 도장을 꾸욱 눌렀다.

선명하게 찍힌 강아지 발자국.

그것을 무심하게 본 녹스가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입을 뗐다.

어쩐지 은쟁반 위로 떨어지는 말에는 묵직한 깊이감이 담겨있었다.

“밀서를 조작한 것인가.”

“……아, 쓸데가 있어서 부득이하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수호자는 다 알고 있었다.

이에 칼브란은 감탄하고 말았다.

“작업 도중 문제가 생겼나 봐. 수호자의 인장이 거의 지워진 걸 보면.”

“글자를 덧씌우는 과정에서 복원가가 실수하는 바람에 그리되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녹스의 날카로움에도 칼브란은 차분히 답을 이어나갔다.

양피지는 가주와 칼브란의 대사기극…… 아니, 치밀한 계획의 일부였다.

발리올에게 에루리안을 반환하라는 내용이 담긴.

“그래서 그 밀서는 어떻게 할 셈인가?”

“예?”

“그 밀서, 어떻게 황제에게 전달할 거냐고.”

녹스가 흘리듯 묻자 칼브란은 진한 미소를 내보였다.

“이미 황궁의 기록관을 매수했습니다.”

“기록관을? 그들은 황제의 치세를 기록하는 자들이라서 철저히 황제의 사람이지 않나. 하여 매수하기 쉽지 않았을 터인데.”

“욕망을 가진 사람인데 무에 어렵겠습니까.”

“과연 뷔트시겐이군. 황궁의 기록관까지도 손을 쓰다니.”

“그 정도는 되어야 황궁의 정세를 살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해서 그 기록관을 통해 황제에게 이 밀서를 전달하겠다?”

“예. 자연스럽게 역대 황제의 기록을 조사하다 발견했다는 식으로 들이밀 겁니다.”

“그 방법도 좋긴 하나, 이는 황제의 의심을 살 수 있지. 결국 사람의 손을 타는 일이라.”

“섣불리 의심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지 말고.”

녹스는 은쟁반을 덮은 엉덩짝에 힘을 주며 히죽거렸다.

“내가 더 자연스럽고, 더 기막힌 방법을 아는데. 어때? 해볼 텐가.”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암. 이 밀서가 비밀 서고에 나타나면 그만 아니야?”

“비밀 서고라면…… 간혹 신탁이나 밀서가 절로 생긴다는?”

“응. 거기. 크록소스.”

“그곳에 이 밀서를 넣을 수만 있다면 최고의 방법이겠지요.”

칼브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람을 매수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의 의혹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 것인데, 수호자가 제시한 방법이라면…….

“그치? 기똥 차지.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이건 수호자인 나만이 할 수 방법이지.”

녹스가 거들먹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에헴, 에헴.

잰체하는 녀석에게 칼브란이 ‘우윳빛깔 수호자님’이라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환장할 조합이었다.

대사기극을 벌이는 일당들의 면면이 정말.

그들을 보며 이안은 피식피식 새는 웃음을 허허롭게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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