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55화 (155/214)

제155화

그로부터 정확히 하루 뒤.

황제는 누군가가 올린 보고에 미간을 와그작 구겼다.

“크록소스에 밀서가 나타났단 건가?”

[예, 폐하. 비밀 서고를 지키던 정령이 신호를 보내와, 곧장 폐하께 달려온 길입니다.]

“흐음.”

침음을 삼킨 황제는 보고를 올린 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얼마나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탁색 동공이 벌겋게 달궈져 있었다.

감정 변화가 극도로 적은 레와티움마저 놀라게 한 이 상황.

“250년 만에 급작스럽게 밀서가…….”

황제는 집무실 책상에 턱을 괴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크록소스의 입구를 지키는 건 레와티움, 안을 지키는 건 보물지기 정령.

이들은 모두 자신의 권속들이다.

하나같이 믿을 수 있는 자들이란 얘기.

거기다 비밀 서고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오직 황제와 수호자밖에 없다.

“하니 누가 수작질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한데…….”

“그게 걸리나 보군.”

수호자의 모호한 말을 알아먹었는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래라면 크록소스에 밀서가 생겼다고 의심을 할 까닭이 전혀 없다.

밀서나 신탁이 생기거나 사라지는 게 자연스러운 장소니까.

애초 초대 황제 때부터 그랬으니.

한데.

“자네 말고 수호자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 걸리네.”

“과민하게 반응하는군, 테시우스. 그저 뷔트시겐의 수호자일 뿐인 그 어린 수호자가 무슨 수로.”

“그렇긴…… 하나.”

“매사 머리를 두 번 굴리며 심각해지지 말게.”

“상황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으이.”

“지나치게 똑똑한 자는 그 머리 때문에 함정에 빠지기도 하니 염려하는 걸세.”

“후. 자네 말이 맞네. 내가 괜히 노파심이 많았군.”

황제는 일말의 찜찜함을 덜어내며 일어섰다.

사서 걱정을 하긴 했지만 사실 그도 머릿속으로는 인지하고 있었다.

절대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롯이 황제의 인장을 받은 자와 그 수호자만이 물건을 넣었다 뺄 수 있는 곳에 무슨 수로?

그 어린 수호자에게는 방도가 없었다.

티끌 만한 의심까지 떨쳐낸 황제는 비밀 서고를 향해 나아가면서 말했다.

“그래도 밀서는 조사해봐야겠네.”

“그리하게. 그래야 안심할 수 있다면.”

“의심병 환자처럼 보이겠지만…… 이 자리는 그래야 휘둘리지 않을 수 있으이.”

“누가 뭐라 한 적 없네, 테시우스. 황제이니 뜻대로 하시게.”

황제의 변명 같은 말에 수호자는 깔끔한 태도를 내보였다.

드러내지 않았다뿐이지 그라고 의심을 안 했으랴.

보고를 듣자마자 ‘설마?’ 하는 생각부터 스친 건 비밀이었다.

황제의 근심에 제 것까지 얹고 싶지 않았기에.

대체로 수호자는 이런 중차대한 사안에 한해선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

그는 황제의 말에 몇 마디 대꾸를 한 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따르는 이라곤 레와티움 다섯밖에 없었다.

크록소스로 갈 때는 언제나 이랬다.

은밀하고 조용한 움직임에 밤이 깊어지는 소리조차 숨죽였다.

적막함이 스산함으로 치환되자 수호자는 괜스레 이 침묵을 깨고 싶어졌다.

안 그러면 어둠에 잡아먹힐 것 같았으니까.

수호자는 짓궂은 표정을 하곤 속닥속닥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밀서의 내용이 무엇일 것 같나, 테시우스.”

“글쎄. 짐작이 가지 않네.”

“그럼 자네의 골머리를 썩이는 자와 연관된 것이다, 아니다, 하나만 골라보게.”

“이 판국에 내기하자는 겐가.”

“뭐 어떤가.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하여간 철이 없어. 처음 만났을 때와 어쩜 이리 한치도 변하지 않는지.”

“하하. 사람은 죽을 때가 돼서야 변하는 거라지 않던가.”

능청맞은 수호자와 못 말린다는 낯을 한 황제.

그들은 이번 일 역시 별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양 투덕거리며 긴 복도를 걸어갔다.

* * *

이안은 창가에 등을 기댄 채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이안 네가 수도에 며칠 더 머물렀다면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엇갈린 게 너무 아쉬워.>

에이프릴의 마음을 대변하듯 단정한 글씨체에는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그녀만 그러할까.

이안 역시 에이프릴을 만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애초 황제를 만나고도 수도에 더 머물 예정이었던 건 그녀 때문이었으니까.

살리카 가주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리지만 않았어도…….

“재수 없는 도마뱀은 어디서든 거치적거리네.”

살리카가 얼쩡거리는 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아직은 그자가 뭔가를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는 시기였기에.

약속을 깨고 서둘러 뷔트시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 사실이 아직도 약간의 짜증으로 남은 것이 그의 진심.

하지만 그녀의 서신을 받은 뒤에 거짓말처럼 녹아 없어졌다.

<난 수도의 저택에서 중앙 아카데미에 함께 입학할 아이들과 지내고 있어. 에루리안에서처럼 같이 지내며 수련도 하고…….

(중략)

이안 네가 만들어준 기회를 절대로 낭비하지 않을게. 후훗. 나중에 만났을 때 놀라지 마. 엄청 멋있어져 있을 테니까.>

이안은 서신을 다 읽고도 눈길을 거기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에이프릴이 재잘재잘 늘어놓는 것들.

그 소소한 일상을 눈에 담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괜스레 들떠서 슬그머니 웃길 반복하고 있는데.

“……도련님, 이안 도련님.”

저를 흔들듯 속살거리는 음색이 들려왔다.

그제야 서신에서 눈을 뗀 이안은 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문도 활짝 열려 있는데, 칼브란이 문밖에 서서 저를 보고 있었다.

허락을 안 하면 30년이고, 40년이고 서 있을 기세였다.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낸 후.

이안은 서신을 반듯하게 접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의 손길만큼 조심스러운 발소리는 지척까지 다가와 멈추었다.

“외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공방에 가신다고요.”

“어. 며칠 있으면 애들이 오니까 준비 좀 하려고.”

“두 도련님과 나가시는 겁니까.”

“그러려고. 안 데려가면 몰래라도 따라올 녀석들이라.”

이안은 나갈 채비를 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동선을 따라 자연스레 칼브란도 함께 움직였다.

외출 준비를 도우려는 것.

칼브란은 총괄 집사가 된 후로도 여전히 저와 아버지의 보필만큼은 본인이 직접 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영 성에 안 찬다는 것이 이유였다.

칼브란이 꼼꼼한 손길로 코트를 연신 털어대다가 은근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도련님.”

“왜?”

“다소 뜬금없다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

“아니, 조금 주책맞다 하실지 모르겠으나…….”

“우리 집사장님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이리 말끝을 흐리실까.”

“아, 다름이 아니라 외출하시기 전에 머리카락을 빗겨 드려도 되겠습니까.”

“머리카락을?”

“예. 도련님의 어릴 적에는 자주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진짜 칼브란 아니었으면 내가 사람 꼴을 하고 있었을까 싶어. 단추를 잠글 힘도 없이 약했으니까.”

“도련님이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시니 그때 생각이 부쩍 나서요.”

“뭐 그게 어렵다고.”

이안은 흔쾌히 의자에 앉은 뒤 몸을 빙글 돌려선 칼브란을 등졌다.

“잘 부탁해, 칼브란.”

웃음기 묻은 이안의 말투는 둥글둥글했다.

그 말투에 칼브란의 눈매가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의 기억 어느 구석이든 도련님의 말투는 지금과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쭉.

‘적어도 나에게만은 한결같으셨지.’

사실 사람이 아프면 예민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귀결이지 않던가.

이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마다 늘 방어적이고 다소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감정을 만질 수 있다면 베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뾰족뾰족하고 위태롭기만 했던 나날들.

그때를 회상하던 칼브란은 빗을 쥐고 이안의 머리카락을 살살 빗어넘겼다.

걸리는 구석 없이 실크처럼 부드럽고 윤기가 반들반들했다.

“어릴 적에는 머리카락이 다 갈라지고 끊기셨는데.”

“영양 상태가 좋지 못했으니까.”

“건강해진 모습을 뵈니 이 칼브란 마음이 무척 좋습니다.”

“약속했잖아. 칼브란보다 오래 살겠다고. 그래서 내가 칼브란의 무덤가에 꽃을 놓아주겠다고.”

“그리 말씀하셨지요.”

약속이라기보다는 결의에 가까웠다.

걸핏하면 치료사가 ‘어쩌면 내일은……’이라고 했으니까.

음울하고 불안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날을 지나고 나니 이리 봄날이 찾아왔다.

칼브란은 감격에 젖어 이안의 머리카락을 빗고 또 빗었다.

팔이 저릿할 정도로 일정한 빗질이 이어지길 한참.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던 칼브란의 손끝이 순간 멈칫했다.

‘……응? 웬 새치가.’

이안의 정수리 한가운데서 삐쭉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흰머리.

그것을 발견한 칼브란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아이쿠야.

수련이 얼마나 힘드셨으면 열다섯에 벌써 흰 머리가.

이안이 알게 되면 속상할까 싶어 칼브란은 얼른 새치를 잘라냈다.

나풀나풀 바닥으로 낙하하는 머리카락.

그것은 쨍한 햇빛을 받자 묘한 빛을 반사했다.

‘머리카락 색이…….’

눈두덩이를 꿈틀한 칼브란은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빠르게 낚아챘다.

날랜 손길로 그것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연후.

그는 혹시나 해서 흰머리를 잘랐던 정수리 부근을 좀 더 들춰 보았다.

아래쪽에 몇 가닥이 더 있었다.

칼브란은 그 머리카락들마저 교묘하게 잘라냈다.

워낙 은밀해서 목격자는 없었다.

……라고 여겼건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이안과 한 묶음인 녹스를 간과하고 있었다.

팔락팔락.

책에 파묻혀 있어 못 봤을 줄 알았다.

한데 녹스의 시선이 그의 코트 주머니에 박혀 있었다.

왜 그러는지 안다는 눈빛.

하지만 녹스는 티를 내지도, 이안에게 언질을 주려 하지도 않았다.

* * *

잠시 후.

칼브란은 서둔 걸음으로 뷔트시겐 가주의 개인 서재에 들어섰다.

개인 서재, 가주 외에는 누구도 출입하지 않는 곳.

하여 가주가 오롯하게 쉴 쉬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런 곳에 불쑥 침범하는 건 가신의 도리가 아니나, 별수 없었다.

그만큼 화급한 일이었으니까.

칼브란은 편안한 얼굴의 가주에게 다가가 곧장 그를 불렀다.

“가주님.”

어쩐지 조급함이 묻은 소리에 가주가 칼브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온했던 얼굴에 깃든 의문 한 조각.

개인 서재에 있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방해하지 않던 칼브란이 아닌가.

한데 기척조차 내지 않고 이리 정신없이 들이닥치다니.

“무에 그리 급한 일이 있다고 답지 않게 허둥대는 것인가.”

“그게…….”

칼브란은 다짜고짜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런 뒤 작은 사각의 탁자에 내려놓고선 머리카락이 보이게 즉각 펼쳤다.

빛 때문인지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은색의 머리카락.

“가주님께서 필히 보셨으면 해서 가져왔습니다.”

“이건…… 은발이 아닌가.”

“예. 도련님의 것입니다.”

“이안의?”

놀란 가주의 입술 끝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등급이 오르며 머리 색이 진해지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색깔이 완전히 탈바꿈하는 건…….

“이게 지금 말이 되는가.”

“본디 타고난 머리 색은 절대 바뀌지 않지요.”

“그것이 법칙이지. 색은 제가 다룰 수 있는 원소를 나타내는 거니까.”

“제 추측이지만 수호자님과 결속하며 생긴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그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지.”

가주는 은색 머리카락을 해부하는 것처럼 손끝으로 눌렀다.

이안에게 찾아온 변화가 결코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아서다.

“지금은 몇 가닥뿐이지만 앞으로 더 많이 변할 것 같은데.”

“실은 검은색과 은색이 섞인 모발이 몇 가닥 더 있었습니다. 이제 시작이라는 징조가 아닐는지요.”

“흐음.”

가주는 이 현상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가와 연관되어 제국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나 칼브란 자네는 이안의 머리 색이 검든 파랗든 상관없지만, 황실은 얘기가 다르지.”

“태연할 수 없을 겁니다.”

“은색은 황실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니까.”

“그들의 긍지기도 하지요.”

“이안이 황제와 단판을 지어 어렵사리 황제의 마음을 바꾸자마자, 츠읏.”

수도의 지형을 바꾸지 않겠다는 황제의 선언.

그게 어디 말 몇 마디로 이루어낸 것이던가.

그리 노력했는데.

“이안의 변화를 알게 되면 이번엔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은색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상징이란 그런 것.

그런고로 이안의 변화는 절대로 새나가서는 안 된다.

어느새 낯빛이 서늘해진 가주는 손수건으로 손을 뻗었다.

거기 놓인 은색 머리카락을 유심히 본 연후였다.

화르륵.

뻗친 손에서 정전기가 튀더니 금세 푸른 불길이 일며 손수건을 삽시간에 태웠다.

매캐한 냄새가 났다.

공기 중을 휘도는 향보다 더 알싸하게 가주가 말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선 아는 자가 적을수록 좋겠지.”

“앞으로 도련님을 잘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파나케이아의 행적을 수배하게.”

“떠돌이 약제사 무리라면…… 도련님의 상태를 감추기 위한 염색약을 사시려는 겁니까.”

“부작용이 없으면서 오래 가는 건 그들이 만든 것뿐이지.”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쉬이 드러나선 안 되는 힘이니 철저히 감춰야지.”

가주의 단단한 말에 칼브란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서로 말없이 갈무리되는 각자의 상념.

그러느라 서재에는 침묵만 켜켜이 책장 틈바구니에 꽂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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