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낚시하자고 하셔서 따라왔는데…….”
“캬캬캬. 역시 가주님은 대단하셔. 낚시를 발리올, 아니지 발리올 가주님이 사는 곳까지 와서 하실 줄은.”
“이게 바로 낚시 원정대인가.”
이안은 지붕이 양파 형태인 건물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둥글둥글하게 떨어지는 곡선들이 유려했다.
이런 미끈함을 더 강화하는 건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었다.
무척이나 온화한 초봄의 꽃바람.
이것들로 인해 명백하게 뷔트시겐이 아니구나, 라고 느끼고 있는데.
“어이 형제.”
저 앞쪽에서 꽃바람과 어울리는 경쾌함이 날아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깨가 드러나는 민소매 튜닉을 입은 남자였다.
발리올 가주.
그가 아버지에게 다가가더니 반가움의 끌어 안기를 시도했다.
물론 아버지가 시큰둥하게 피하면서 그 시도는 장렬히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렇게 피하긴가. 내 뜨거운 맘이 녹은 격한 인사를.”
“징그러우니 저리 가시게.”
아버지가 질색하는 저것.
만날 때마다 포옹하는 발리올 가주의 버릇은 일종의 애정 표현이었다.
오롯하게 자신의 편에게만 보내는.
그렇기에 그가 적으로 간주한 자는 절대 이 인사를 받을 수 없다.
이를테면 살리카 가주 같은 자.
‘하다못해 지나가는 똥개에게도 하는 인사를 말이지.’
이안이 입꼬리를 비죽 올린 사이.
“오, 수호검 자네는 어째 갈수록 젊어지는 것 같아. 회춘 약이라도 몰래 먹는 거야?”
발리올 가주가 칼브란을 억세게 안으며 등을 팍팍 두드렸다.
퍽. 퍼억.
등뼈가 저릿해 오는 타격에도 칼브란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여상함이 재미없었던 걸까.
가주는 얼른 다음 표적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나들이에 동행한 레브와 올리브에게로 말이다.
“욘석들, 머리 색깔들 봐라. 아주 예술이야. 응, 아주 이뻐.”
바삐 굴러가는 그의 동공을 따라 품 안의 힘도 거세졌다.
녀석들 얼굴이 시퍼레질 정도였으니 참으로 격한 환영 인사였다.
그리고 그건 여지없이 이안에게까지 이르렀다.
한데.
“끌끌끌. 까칠한 애송이 정말 오랜만이야.”
그가 이안에게만큼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행동 양상.
이안은 가주가 내민 손을 멀뚱히 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저와는 가주님 식대로 인사를 안 하시는 겁니까.”
“응? 내 식? 아아. 내가 팔만 벌려도 질겁하며 도망가니 보호 차원이랄까.”
“가주님께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심장을 맞대고 있으면 가주님의 심장이 알려준다고. 믿을 놈인지, 아닌지.”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 발리올 가주는 이 행동으로 사냥개처럼 사람을 추려냈다.
예컨대.
가주가 ‘얘는 좋은 놈’ 하면 정말 성자 수준으로 착했고.
‘응, 저거 나쁜 놈’ 하면 실제로 인간 말종이었다.
특히 나쁜 놈은 몸을 울리는 마력의 파동이 끈적하고 음습하다 했던가.
그 표준에 딱 들어맞는 인간이 살리카 가주라고 했고.
이안의 당돌한 변화가 신기한지 발리올 가주가 목청껏 웃어젖혔다.
“하하핫. 내 인사가 받고 싶단 말이지. 많이 변했어, 애송이. 근데 말이야 난 이쪽이 더 맘에 든다.”
귀청이 터지도록 웃더니만 가주가 이안을 힘껏 안았다.
뭔 힘이 이렇게 센지.
막상 부딪혀보니 바위에 눌린 달걀이 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가주가 조금만 더 힘을 줬다면 갈비뼈가 나갔을지도.
* * *
우여곡절 끝에 정착한 응접실.
중앙에는 두 가주가, 테라스에는 이안 일행이 자리를 잡았다.
찢어져 자리를 잡은 건 두 가주가 긴히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다.
“곧 있으면 황실에서 밀서를 들먹이며 황명을 전달…….”
조용조용한 대화가 7분쯤 흘러갔을까.
“오호! 그렇단 말이지.”
발리올 가주가 대화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콧바람을 뿜었다.
단순 콧바람인데도 탁자가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덩달아 출렁거리는 찻잔의 차가 물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휘도는 소용돌이처럼 응접실을 웅웅 맴도는 발리올 가주의 목소리.
그게 어찌나 큰지 따로 떨어진 보람이 없을 정도로 이안의 귀에도 잘 들렸다.
“한데 형제, 나 모르는 새 빛의 정령이라도 꼬셨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너무 잘 아는데?”
“그 정도는 정보부만 잘 가동해도…….”
“에헤이. 또 나왔네, 나왔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의뭉 떠는 거.”
발리올 가주는 제 허벅지를 탁탁 소리 나게 쳤다.
얼굴의 주름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는데 시치미 떼긴.
수선한 타박에도 뷔트시겐 가주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어쨌든 내가 부탁할 것은 하나뿐이네. 황실에서 에루리안을 돌려주거든 나한테 넘겨.”
“곧장?”
“어.”
“그러지 뭐.”
“응? 이리 쉽게?”
“그러면 안 되나?”
“이번 참에는 왜 이리 순순하게 구는 건데.”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여러모로 발리올 가주로서는 나쁠 거 없었다.
이게 빌미가 되어 더 자주 왕래할 수 있을 테니까.
“형제한테는 에루리안이 필요한 것 같고, 나는 밀서를 핑계로 바쁜 형제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그거 외에 뭐가 더 필요해.”
“이래서 내가 자네를 좋아하지. 뭐든 단순명쾌해서.”
“크하하핫. 내가 의리 빼면 시체긴 해. 그러니까 자주 놀러 와. 또 날 꽁으로 써먹으려면 말이야.”
“이번에 자네를 중간책으로 써먹은 대신 내 약속하나 하지. 다음에 또 낚시하러 오겠다고.”
”다음에도 또?“
발리올 가주는 뷔트시겐 가주의 확언에 다소 놀랐다.
채근하지 않아도 다음을 들먹이며 먼저 오겠다고 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솔직히 오늘 일정을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었다.
저 일벌레가 무려 이틀이나 빼가며 낚시하러 오겠다고 해서 잘못 들었나 했더랬다.
대체 뭔 바람이 불어서 그럴까.
밀서에 관한 것만 담판을 짓자고 온 것이 아닌 게 분명한데.
코를 벌름거린 발리올 가주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함께 입을 뗐다.
“어이 형제, 솔직히 불어.”
“뭘 말이야.”
“오늘 낚시하러 온 것도 나 보러 온 게 아니라 아드님 자랑하러 온 거지?”
“하하핫. 그게 또 그리되나?”
“들려오는 소문들이 아주 요란하더군. 최근엔 중급 시험을 씹어먹었다던데.”
“그까짓 것 뭘 그리 대단한 거라고 벌써 발리올까지 소문이.”
“허이구 내숭은.”
발리올 가주는 시선을 테라스에 있는 이안 쪽으로 옮겼다.
녀석의 주변을 흐르는 고요하고 정적인 공기.
마치 해저와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보고 있자면 깊숙이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런 괴상한 마력 파동은 처음 보는데.”
“크흠. 그런가.”
“꼭 4대 원소를 마구잡이로 섞어 놓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물의 부드러움. 불의 흉포함, 바람의 냉정, 대지의 단단함, 이게 다 들어있는데?”
“그 정도야 뭐 상급 정령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형질…….”
“오호.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하핫. 내 새끼가 가진 게 전부 특별한데 굳이 하나를 꼽아 뭐할까.”
“그동안 어찌 참았나. 아드님 자랑하고 싶어서.”
“잘?”
뷔트시겐의 능청에 발리올 가주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음. 묘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뭐가 말인가.”
“그냥. 형제가 자식 자랑하는 걸 듣고 있으니 내 심장이 다 벅차오른달까.”
“참 싱겁긴.”
뷔트시겐 가주는 별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이었지만 발리올 가주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 제 친우가 자식 얘기를 할 때 오늘처럼 밝은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그늘진 얼굴로 입을 다물기 일쑤였지.
정확하게 꼬집자면 할 수가 없었다, 가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회합 때도 번번이.’
발리올 가주는 1년에 한 번 있는 가주 회합을 떠올렸다.
가주 회합.
4대 가문의 수장들이 모여 여러 안건을 조율하는 회의를 일컫는다.
그리고 이 회합에서 빠지지 않는 얘기가 있다면 단연코 그거였다.
바로 가주의 자식들에 관한 것.
수행차 따라온 측근들이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 부러 떠드는 얘기들.
아홉 살에 페이라조 2성이 되었다,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페이라조 2성인데 정령이 둘이다, 등등.
과장 섞인 잘난 척이 오가는 중에도 뷔트시겐만은 항상 조용했다.
당당하고 긍지 높은 그들에게 어린 근심 한 조각.
특히 가주를 따라온 2장로는 언제나 낯을 팍 구기고 돌아갔다.
자존심이 강한 자이니 오죽할까.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2장로가 그간 후계 건에 대해 미친 듯이 쪼아댄 이유 말이다.
‘끌끌끌. 이제는 회합의 중심에 저 아이가 있겠어.’
발리올 가주는 제 일이 아닌데도 짐을 던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친우의 얼굴에 더는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근데 말이야. 이안 저 애송이는 사람 보는 눈도 꼭 형제를 닮았어.”
“아아. 참 멋진 녀석들하고 어울려 다니지 않나?”
“만만치 않은 꼬맹이들을 달고 다니네.”
눈썹을 실룩거린 발리올 가주는 이안 옆에 있는 두 어린 것을 번갈아 살폈다.
짙은 푸름의 레브와 발랄한 레몬색의 올리브.
얼핏 봐도 시퍼런 기운들이 마구 넘실거리는 게 잠재력이 무한에 가까웠다.
별 이변이 없는 한 카르디아는 무난히 찍을 자질.
그만큼 마력의 파동이 거침없었다.
“루하흐도 루하흐지만 특히 저 녀석.”
같은 발리올이라서 그런가.
발리올 가주의 시선이 올리브에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앞으로 기우는 그의 몸.
거기에 깃드는 흥미를 눈치챈 뷔트시겐 가주가 끼어들어 타박했다.
“그 불손한 눈알, 빨리 집어넣으시지.”
“어이 형제, 나 섭섭해지려고 그래. 내가 설마 이안 저 애송이 것에 침을 바를까.”
“바를 것 같은데?”
“파하하핫. 들켰나. 솔직히 말해 가르쳐보고 싶긴 하군. 내가 손을 보면 더 쓸만해질 물건이라.”
발리올 가주는 장난스레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더니 아쉬움을 털어내려는 듯 손 떼는 시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말이 길어 뭐해. 일단 내 별장 가서 재밌게 노는 것만 생각하세.”
“자네 별장? 낚시할 장소만 빌려주랬더니 따라오려고?”
“내 별장이니 따라가야지. 날 떼어 놓고 갈 심산이었어?”
“아니 내 아들과 낚시 좀 해보겠다는데 왜 다들 제비 새끼 마냥 졸졸 따라오는 거지?”
“어이 형제, 낚시는 여럿이서 하는 게 묘미라는 거 모르나.”
실실거린 발리올 가주는 뷔트시겐 가주의 반박을 묵살해버렸다.
죽더라도 따라갈 것이다.
의지를 표명한 가주는 째려보는 친우를 피해 그의 아들인 이안을 불렀다.
“어이 안목 높은 애송이.”
“그 별칭은 또 뭡니까.”
“사소한 것은 신경 끄고. 내가 말이야, 저 머리 노란 녀석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 *
어쩌다 대 인원이 되어버린 낚시 나들이.
북적거림은 가시질 않고 그날 밤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찌르. 찌르르르르.
이안은 풀벌레 소리가 참으로 고즈넉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온함에 젖은 시선이 호수에 드리워진 낚싯대 끝으로 향해 갔다.
낚싯대는 미동이 없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지 어느덧 두 시간째.
그래도 느긋했다.
애초 낚시의 신이 되려고 낚시를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이안은 제 오른쪽에 있는 아버지와 제 왼편에 있는 레브를 번갈아 보았다.
발리올 가주와 올리브는 따로 저 너머의 호수로 떠났다.
뭔가를 속닥거리던데.
‘대체 무슨 얘기를 그리 재밌게 나누는 건지.’
이안이 둘의 작당에 대해 유추해보고 있을 때였다.
야밤의 고즈넉함에 한몫을 보태고 있던 아버지가 나지막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안.”
“예.”
“내 여태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구나.”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진정으로 무얼 하고 싶은 것인지.”
가주는 낚싯대에 얹어진 이안의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직 여물지 못한 손.
저 손이 가주에게 똑똑히 알려주고 있었다.
다 여물지 못한 이 녀석에게는 아직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낚싯대가 있어야 물고기를 수월히 잡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