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57화 (157/214)

제157화

가주는 이안의 마른 손에서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달빛을 받아 음영이 진 검은색 머리카락…….

실은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이 들고는 한다.

이안이 마력핵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것과 수호자를 얻은 것.

이것들은 애초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본디 가주는 운명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무엇이든 노력한 만큼 가지는 것이지, 제게 정해진 길과 정해진 몫은 없는 거니까.

그리 여겼는데…….

‘결국, 많은 것이 밀서의 내용대로 되어가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디 예삿일이던가.

뭐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안의 머리카락이 은발로 변해가는 것만 보아도.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해야겠지.’

이 모든 것이 정해진 수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확신에 사로잡히자 가주는 아비로서 속이 쓰리고 울화가 치밀었다.

망할 운명이 뭐라고 제 아들이 15년간 고통스러워야 했는지 모르겠기에.

여신의 멱살이라도 잡은 뒤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상황은 정해진 무엇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것을.

거칠고 흉포한 흐름 속에서 이안이 그것을 잠재울 배를 띄운 것을.

그렇다면.

‘이안이 순항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내게 주어진 몫일 터.’

가주는 일련의 결론 속에 이안의 속내를 들여다보려 질문을 했다.

진정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안 네가 가진 생각을 아비로서, 가주로서 듣고 싶구나.”

가주가 차분하게 말을 건넸지만 이안의 대꾸가 곧장 따라붙지는 않았다.

찰나의 침묵.

그 후 뻣뻣한 손을 말았다 편 이안이 딴딴한 입술을 느리게 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살리카 가주를 막고 싶습니다.”

“살리카 가주를?”

“예. 그자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지 않습니까. 터무니없는 야망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을 테지요.”

가주는 예상외의 답변에 조금 놀랐다.

애초 살리카 가주를 상대하는 건 저 같은 수장과 황제의 몫이었다.

자신들이 이안 같은 어린 후대를 위해 응당 정리해야 하는 것.

그게 당연할 진데, 제가 틈을 엿보고 있는 사이 이안은 어느새 저만치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냐.”

“거창한 건 없습니다. 그저 뷔트시겐을…… 아니, 아버지를 지키고 싶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이안을 가주는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아이루스 상단의 문제를 해결한 일도 그렇고.

이번에 황자를 살려 둑스의 악용을 막은 것도 그렇고.

모두 살리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밑 작업을 망치는 일들이었다.

자금줄과 정보를 끊어버리는 거였으니 말이다.

이안은 오래전부터 살리카 가주를 막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이안이 기특하면서도 가주는 자꾸 목이 메어왔다.

괜스레 꿀렁이는 목울대가 조용한 호수를 들썩이게 했다.

곧 숨이 끊어질 듯 연약하던 아이가 언제 이만큼이나 커버렸을까.

촉촉해지는 감정을 가주가 어쩌지 못하고 있는 사이.

“해서 아버지께 청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그런 가주를 보지 못한 양 이안이 얼핏 단조로운 투로 말했다.

“……청?”

“수습 기간 중 임무 해결 능력이 우수한 자는 단장으로 뽑히지 않습니까.”

“그러하지.”

“제가 만약 단장직을 얻게 되면, 정식 첫 임무는 살리카 쪽에 있는 것을 배정받고 싶습니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 가고자 한다면 까닭이 있을 터.”

“실은 ‘라세르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라세르타?”

“라세르타, 녹스가 말하길 별자리 중 도마뱀자리를 가리키는 고어라 하더군요.”

“흐음.”

“제게 특별한 친우가 있습니다. 예지몽을 꾸는. 그 친우가 언급한 단어라 신경이 쓰입니다.”

“도마뱀 자리라…… 도마뱀은 살리카를 일컫는 은어지.”

“예. 근데 그중 살리카의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직 좁히지를 못했습니다.”

가주는 이안이 던진 한 마디에서 많은 것들을 유추해냈다.

“특별한 친우가 언급까지 할 정도면 살리카 가주 자체일 수도 있고, 수도인 로토투아일 수도 있고, 역대 가주의 무덤이 있는 파호이 산일 수도 있겠구나.”

“가능성이 여럿이라 살리카로 직접 찾아가 볼까 합니다.”

“…….”

직접 가보겠다는 말에 가주는 눈썹을 찡그린 채 잠시간 골몰했다.

지금까지는 무엇을 알고자 할 시 정보부를 가동하면 되었다.

지리멸렬하고 오래 걸려도 정보부가 실망을 안긴 적이 있던가.

오히려 늘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건져 보고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예감이 든다.

오직 이안만이 저 단어에 얽힌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안.”

“예.”

“임무를 통해 살리카로 가는 것도 좋지만 지금 네 상황을 고려하면 썩 괜찮은 방식이랄 수 없구나. 대신 더 안전하고 심장부에까지 접근이 가능한 방법이 있는데.”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가주 회합.”

“가주 회합이요?”

아버지가 던진 명쾌함에 이안은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가주 회합은 4대 가문 중 하나에서 열리는 게 규칙이다.

발리올, 살리카, 루하흐, 뷔트시겐 이 순서로.

작년에 발리올에서 열렸으니 올해는 살리카 차례였다.

회합 기간은 나흘.

나흘이면 넉넉하게 이것저것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거면.’

이안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자 가주의 입매가 위로 말아 올려졌다.

어떤 방법을 제시한들.

받는 쪽에서 못 씹어 먹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한데 이안은 경이로우리만치 잘 흡수하고 다음 수까지 고려한다.

‘그래도 호락호락하게 굴 수는 없지.’

편애한다는 편견이 씌워지면 녀석에게 여러모로 좋을 건 없으니까.

“네가 살리카를 파보겠다 하면 회합 때 나와 동행할 수행단에 널 포함시킬 수는 있다.”

“…….”

“하나 이안 너도 알 것이다. 수행단에 어떤 자들이 발탁되는지.”

4대 가문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다.

가주를 지키기 위해 발탁되는 자들이 어디 보통의 면면이랴.

한 명 한 명이 소부대 하나와 맞먹는 전력을 가졌다.

그들에 비하면 이안은 어떤가.

햇병아리인 에르그이다.

굳이 수행단의 자격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절대 그 무리에 낄 수 없는 실력이라는 것인즉.

적어도 녀석이 깜냥 정도는 보여주어야 데려갈 수 있을 터.

“수행단에 들고 싶거든 네 스스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려무나.”

“그를 어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생도 수습 기간이 끝날 때 각 군의 사령관에게 영입 제의를 받으렴.”

“그거야 당연히…….”

“한 명 말고 세 명 모두에게.”

“……!!”

이안은 어려운 임무에 목덜미를 문질렀다.

각 군의 사령관 셋에게 자신의 군대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는 것.

이를 달성한 자는 수습 기간 역사상 여태껏 채 스무 명도 되지 않는다.

아마 코끼리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게 더 쉽지 않을까.

거의 데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는 제안.

그럼에도.

이안은 아버지의 속뜻을 알아채고 입매에 호선을 그렸다.

그 정도 성과는 내야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명분이 될 터.

“그러겠습니다.”

이안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사령관 세 분에게 모두 제의를 받겠습니다. 반드시.”

긴 대화가 일단락된 후.

낚시터는 또다시 기나긴 침묵에 잠겨 들었다.

튀어 오르는 물고기도 하나 없이 수면에 어린 달이 낮게 이지러졌을 무렵.

가주의 눈길이 낚싯대를 꽉 쥐고 있는 레브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네 차례라는 듯이.

* * *

츠즈즛.

워프 게이트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 희미함은 나들이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쉬움에 레브는 발동이 멈춰가는 진만 응시했다.

아직 털어버리지 못한 마음이 고이듯 남아 있는 진.

그 위에서 제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이안의 목소리가 번졌다.

“아버지, 다음에 또 낚시가요. 이번 참의 여정은 너무 짧았어요.”

“그러자꾸나. 언제 시간을 내서.”

얼굴 곳곳에 온화함이 그득한 가주에게서 레브는 눈을 떼지 못했다.

어젯밤의 대화가 자꾸 생각나서다.

가주는 제게 물었다.

‘레브 넌 무엇이 하고 싶으냐.’

온후한 물음에 무어라 대꾸했더라.

레브의 뇌리는 손쉽게 현재에서 과거로 빠르게 이동되었다.

그가 무언가를 답했던 그때로.

“제 목표 또한 이안처럼 한 가지입니다. 루하흐 가주가 죗값을 받게 하는 것.”

“네 뜻 또한 내가 말리거나 부러트릴 수 없겠지.”

가주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브나 이안이나 어린 나이에 길을 정한 건 기특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어른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싸질러놓은 것을 아이들이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덕에 이 어린 것들이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말릴 수도 없으니 나오는 건 시름뿐이었다.

속은 뭉그러졌지만, 적어도 맨발이 아니게 하는 것이 어른인 제가 해야 할 몫.

발끝에서 치미는 숨 덩어리를 삼킨 가주는 다시 물었다.

“혹, 생각해둔 바가 있느냐.”

“생도 수습 기간이 끝나고 나면 루하흐에 다녀올까 합니다.”

“어찌하여.”

“슈튼하노버 가주를 만나보려고요.”

“슈튼하노버라……. 그자라면 만나봄직 하지.”

“예. 이안에게 들었습니다. 그자의 목적이 제 목적과 부합한다고.”

“음. 그자의 세는 숨겨져 있어 명확히 파악하긴 어려우나, 루하흐 가주에게 반기를 든 세력 중 가장 크고 결속이 좋긴 하지.”

“하여 임시 동맹을 맺어볼까 합니다.”

“네 정체만 노출되고 협상이 결렬될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하흐 가주를 끌어내리려면 그자가 필요합니다.”

레브의 목표는 루하흐 가주의 목숨을 취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자가 자신의 형을 독살하고 형의 가족을 도륙했다는 진실.

그 무도한 만행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것이었다.

일말의 의혹, ‘정말로 전대 가주를 독살했을까?’라는 찜찜함을 남기지 않은 채로 말이다.

제 숙부를 떠올리며 레브는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루하흐 가주의 만행이 온 천하에 드러나 몰락하는 것, 그게 진짜 복수겠지요.”

“흠. 알았다.”

레브의 똑 부러짐에 가주는 생각을 정리하려 낚싯대를 문질렀다.

수 분?

짧은 정적 후 가주는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레브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은 자칫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죽을 수 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아가고자 하니 도리가 있나. 네가 가는 여정마다 친위대를 붙여주마.”

“가주님, 친위대는 가주님의 직속…….”

“내 벗이었던 자의 아들에게 베푸는 내 최대의 호의이다.”

“…….”

“잊지 말거라. 너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가주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레브를 응시했다.

잠시 잠깐 그러다가 그는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슈튼하노버와 접촉하는 것 말이다.”

“그건 이안과 꾸준히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방도와 시기를 정하기 위해.”

“계획이 여러 가지여서 나쁠 건 없지. 너희가 짜낼 수와는 별개로 일단은 한스를 소개해주마.”

“한스라면.”

“주방장 말이다.”

“아. 이안만 보면 허리를 반쯤 접어 인사하는 그분.”

“그 인사가 허술해 보여도 물자보급 총책임자지. 하니 해상 무역을 하는 슈튼하노버와 접촉해도 의심을 사지 않을 터. 거기다 슈튼하노버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라 아직도 교류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지.”

가주는 말을 내뱉음에 있어 거침이 없었다.

폭탄 같은 두 녀석을 거둬들인 뒤부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물이었다.

“그를 통해 접촉하되, 매사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예.”

“내 날개 아래 너를 두었으니 보호하는 것은 나의 의무. 나는 그 의무를 다할 것이다. 내 신념을 걸고.”

가주의 단언에 레브는 어떤 말도 잇지 못했다.

그저 고마워서.

아버지를 잊지 않고 호의를 베풀어주는 것에 울컥해서.

혼자가 아니라 아군이 곁에 있다는 것이 든든해서.

뜨끈해지는 눈에 힘을 주느라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다.

“……레브, 뭐해?”

회상에 빠져 있느라 몰랐는데 제 눈앞에서 손바닥이 왔다 갔다 했다.

이안이 왜 얼 타고 있나며 손을 내젓고 있었던 것.

“아…….”

이안뿐 아니라 올리브도 똑같이 그러고 있었고, 가주님은…… 없었다.

대체 언제 가셨을까.

레브는 사람 가는 줄도 몰랐던 게 머쓱해서 뒷덜미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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