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그만 멍 때리고 우리도 들어가자.”
이안이 초소를 나가려 발을 뗌과 동시에, 그를 붙잡듯 보초병들이 우렁찬 목소리를 냈다.
“도련님, 보고 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나한테?”
“예. 친우분들이 도착하셨습니다.”
“녀석들이 벌써?”
“어젯밤부터 한두 분씩 워프 게이트를 넘으셨습니다.”
“흠. 집에 가도 정리할 게 없다던 녀석들인가 보네.”
“지금 생도들의 생활관인 루티멘툼에 계십니다.”
“아, 알았어. 알려줘서 고마워.”
이안은 보초병들의 어깨를 두드리곤 워프 게이트 초소를 벗어났다.
“이리 일찍 도착할 녀석들이라면 오스틴과 에드겠지?”
“그럴걸. 걔들은 주말에도 집에 간 적이 없으니까.”
“차라리 수도에서 만나 같이 올 걸 그랬다.”
셋은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누며 루티멘툼으로 향했다.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발걸음이 경쾌하다 못해 반쯤은 떠다녔다.
그 상태로 도착한 생도의 생활관.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대장!”
아이들은 이안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그를 얼싸안았다.
마치 몇십 년 만에 상봉한 형제를 대하는 것 같달까.
“여기서 보니 진짜 반갑다.”
그 채로 아이들은 레브와 올리브도 번갈아 등을 두드려댔다.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에 다들 고무된 상태.
약간의 초조와 불안도 섞여 있었지만 그건 정말 1할도 되지 않았다.
“다들 상태 좋네.”
“뷔트시겐의 공기가 아주 달아.”
“난 아까 잠깐, 지이이인짜 잠깐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한 시간이나 자버렸다.”
아이들의 왁자지껄함에 이안은 고갯짓을 했다.
“이러고만 있지 말고 나가자.”
“어딜?”
“저택 구경도 하고, 슈바츠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역시 대장. 오자마자 맛있는 것부터 챙긴다.”
“그니까. 대장 옆에 있으면 굶어 죽진 않을 거야.”
흥분한 장닭 무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안은 기분 좋게 생활관을 벗어났다.
* * *
아이들과 정신없이 쏘다니다 집으로 막 돌아온 길.
“도련님!”
정문을 통과한 이안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몸을 반쯤 틀었다.
하인 한 명이 석양을 등진 채 붉어진 얼굴로 뛰어왔다.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정돈되지 않은 헐떡임으로 보아 줄곧 뛰어다닌 흔적이 배어 나왔다.
그래도 하인은 가급적 흐트러짐 없이 정중하려고 애썼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예, 라줄리 관에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기로 모셨다는 건 꽤 귀한 손님이라는 얘긴데, 아버지도 아니고 왜 나를?”
의아한 이안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라줄리 관은 귀빈들만 머물 수 있는 접견실이다.
이를테면 4대 가문의 직계라던가, 다른 대륙에서 온 귀족이라던가.
그러니 저를 찾는 이들 중에는 라줄리 관에 머물만한 사람이 없었다.
‘흠. 아버지 손님인데 나를 만나보려는 건가.’
손님의 정체를 유추해보려 이안은 흘끗 하인을 보았다.
좀 전의 뜀박질로 달아오른 벌건 뺨이 가라앉고 나자 그의 얼굴이 여느 때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저 건조함에서 뭘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이안은 라줄리 관으로 가기 위해 오른쪽 갈림길로 발을 유유히 틀었다.
“날 찾는 손님이 누구지?”
“도련님을 찾으란 명을 받자마자 바로 움직인 통에 저는 못 봤습니다.”
“언제쯤 오셨어?”
“한 5분쯤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근데 저택 분위기가 이렇게 조용한 걸 보면…… 4대 가문 쪽에서 온 건가.”
본래는 손님이 오면 손님맞이로 저택이 전에 없이 들썩거린다.
단, 4대 가문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들과 만날 때만큼은 ‘은밀히’가 답이었다.
차 한잔 마시는 일상마저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황실과 정령사 협회 때문.
이안은 나름의 추측을 하며 익숙한 길을 찬찬히 걸었다.
라줄리 관은 중앙 정원과 꽤 가까운 곳에 자리해있었다.
하여 얼마 걷지 않은 수 분 후.
온통 하얀 풍경을 배경 삼은 이질적인 파란색이 눈에 들어왔다.
회백색 건물들 사이에서 저 혼자 튀는 코발트 블루의 건물, 라줄리 관이었다.
달칵.
그곳으로 들어선 이안은 왼편에 자리한 응접실 문을 열었다.
손님은 혼자 있지 않았다.
짧은 칼단발을 한 여성 호위병 일곱에게 둘러싸인 채였다.
빈틈없는 호위 속.
중앙 소파에 앉아 기품있게 애플티를 마시고 있는 누군가.
“……5황녀님?”
* * *
이안은 소파에 앉아 맞은 편의 5황녀를 쳐다보았다.
5황녀.
현 황제의 첫째 아들, 그러니까 살바토르 대공의 딸이다.
그리고 제가 구한 2황자의 동생이기도 했다.
‘쌍둥이처럼 닮았군.’
2황자도 그렇더니 5황녀의 미모 역시 출중했다.
달빛 가루를 갈아 만든 듯 윤기 나는 곱슬곱슬한 은빛 머리칼, 반듯한 이마, 나비 날개 같은 속눈썹, 마늘쪽 같은 코, 사슴처럼 긴 목덜미.
19살의 황녀는 소녀와 원숙한 여성의 경계에 서 있었다.
그 탓인지 몰라도 묘한 분위기가 덧칠되어 있달까.
마법등 100개를 켠 듯한 미모의 5황녀 때문에 상사병에 걸린 이들이 수두룩하다더니 과연.
“제 손님이 황녀님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 갑작스레 찾아온 무례는 사과하죠.”
“아닙니다. 뜻밖이지만 황녀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과는 필요치 않습니다.”
“오라버니를 구해준 답례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만.”
“아. 그 값이라면 이미 황제 폐하로부터 넘치게 받았습니다.”
“할아버님이 주신 건 주신 거고. 동생으로서 개인적인 인사를 건네고 싶었답니다.”
5황녀는 우아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호위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손에 들고 있는 목함.
그 자체로 예술품 같은 상자를 호위병이 탁자에 내려놓으며 덮개를 열었다.
마법등의 조도 아래 선명한 보라색 빛깔을 뽐내는 무엇.
이안은 타조 알 크기의 보석 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워툴리온이군요.”
“9칸 정령 보관석을 만드는데 쓰는 보석이죠. 워툴리온이란 덩굴식물에서만 나는.”
“이런 크기는 저도 처음 봅니다.”
“내 농장에서 수확한 것 중 가장 큰 것을 가져왔어요. 선물은 실용성이 높은 게 최고니까요.”
“뜻밖의 것을 받아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황녀님이 주신 것이라 그런 것이겠지요.”
“후훗. 사양을 안 해서 다행이네요.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자고로 선물은 사양하는 법 없이 냉큼 받는 게 예의지요.”
대화는 막힘없이 시원시원했다.
이안은 웃는 낯을 하고선 목함의 옆면을 톡톡 두드렸다.
설마 황녀가 답례품이나 전하려고 직접 걸음을 했을까.
필시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단정 짓는 까닭이야.
‘내가 이곳에 들어섰을 때부터 줄곧 날 관찰하는군.’
5황녀의 찬기 어린 은회색 동공이 내내 그를 탐색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짐작되는 바가 없으니 정보를 모아 유추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하여 이안은 별거 아닌 양 지나가는 투로 질문을 던졌다.
“2황자님은 평안히 잘 지내고 계십니까.”
“잘 지내고 있어요.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게.”
“다행이군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할아버님께서 ‘또 죽을 일 겪기 전에 그만 결혼해라.’라고 재촉하셔서 오라버니가 곤혹 치르고 있죠.”
“아. 2황자님이 올해 스물일곱인데 애인조차 없으시니.”
결혼…….
황가의 결혼은 세를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2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다는 것이 황제의 속내이고.
그런데도 2황자가 결혼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황제로서는 애가 탈 터.
아마도 이 때문인 듯싶다.
2황자의 결혼이 늦어질 것 같으니 세를 불릴 또 다른 수단을 위해 5황녀를 보낸 것이겠지.
세가 탄탄한 자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만큼 좋은 수는 없으니까.
‘뷔트시겐에 2황자의 지지기반이 되어달라 청을 하러 온 모양이군.’
할 일이 많아 짬을 못 내는 2황자 대신 황녀가 전령이 된 것 같다.
진즉 2황자와 끈이 닿았으니 얘기가 더 쉽다고 판단한 것일 테고.
하지만.
‘황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할지는 오롯하게 수장의 권한이지.’
아버지가 정할 일이라 이안은 제 의견을 덧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수호자로 인해 제멋대로 군적이 있던 터라 더더욱 그러했다.
다만, 나쁜 인상을 줄 필요는 없을 터.
어차피 황실과의 관계는 우호적인 게 더 나으니까 말이다.
‘흠. 이렇게 집구석에서 입만 털다 돌려보내긴 애매한데.’
황궁으로 돌아간 5황녀에게 누군가가 ‘뷔트시겐은 어땠나요’라는 질문을 한다고 치자.
그 물음에 ‘방구석이 다 똑같지’라고 황녀가 답하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뷔트시겐이 얼마나 멋진 곳인데.
이안은 관찰자인 5황녀를 두고 특유의 느릿함을 선보이며 일어섰다.
그런 뒤에는 가슴팍에 손을 얹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황녀님, 저와 함께 라줄리 관을 탐험해 보시겠습니까.”
“탐험?”
왜 갑자기 탐험이라는 말을 꺼냈을까.
5황녀는 잠깐의 의구심을 무표정 속에 섞어 뭉개버렸다.
대체 이안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굳이 입씨름할 필요가 있을까.
뷔트시겐의 적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왔으니 오히려 기회였다.
앉아서 나누는 대화로는 상대를 전부 파악할 수 없으니.
‘장소나 상황이 달라지는 건 나쁘지 않아. 상대의 심층을 깊이 들여다보려면.’
이를 통해 알아내야만 한다.
황제가 뭘 보고 그를 손주 사위로 낙점했는지.
그녀가 이것저것 재는 틈바구니를 비집고 이안이 재차 권했다.
“한 곳에만 앉아 있어선 원하는 것을 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겠네요. 탐험, 가죠.”
5황녀는 딱딱해져 있던 제 표정을 매만져 부드럽게 바꿨다.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고 상대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그 표정으로.
그런 뒤 방을 나와 이안과 함께 회랑을 걸었다.
나무가 아치형 기둥이 되어 천장을 받치고 있는 근사한 회랑.
이곳은 마치 봄이 만개한 숲 같았다.
나붓하게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음미하다 5황녀는 부드러이 입을 뗐다.
“뷔트시겐의 혹한기는 유명한데 이곳은 봄 같네요.”
“바깥과 온도가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무척.”
바깥은 코트를 열 겹 겹쳐 입어도 욕이 나올 만큼 추웠다.
반면 라줄리 관은 얇은 홑겹의 옷만 있어도 될 정도로 포근했다.
이곳의 별칭이 봄의 화원이라더니.
그녀가 두꺼운 코트의 소매를 쓸어내리자 이안이 적당한 때에 말을 붙여왔다.
“이런 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선대께서 발열석을 사방에 때려 박아 넣었지요.”
“푸른색 발열석이 물결처럼 수놓아진 게 신비롭네요. 한데…….”
구경에 여념이 없던 5황녀가 살포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점이 생겼다는 몸짓.
“이곳의 발열석에선 소리가 나지 않는군요. 보통은 고양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데.”
그 소음을 감추려고 건물 자체에 다른 소리를 덧입혔다.
새가 우짖고 나무의 이파리가 사락사락 비벼대는 봄의 소리를.
이에 손님들은 발열석의 시끄러움도, 뷔트시겐의 혹한기도 모두 잊어버렸다.
“여러 문제점을 보완하고 나니, 손님들이 봄의 소리에 빠져 좀체 떠나지를 않습니다.”
“객으로 와서 식구가 된다 하더군요. 항간에 떠도는 말로는.”
“짧게 머무는 손님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정취이지요. 아, 짧게 머무는 손님에 한한 얘기입니다.”
말간 표정의 이안한테서는 그 무엇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5황녀는 그의 진심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오래 머물라는 건지, 빨리 꺼지라는 건지.
웬만한 상대의 속내는 전부 간파할 수 있다 자부했는데.
어쩐지 2황자, 그러니까 오라버니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하하핫. 그놈을 파악하겠다고? 능구렁이 같은 이안 뷔트시겐의 속내를?
아서라. 네가 ‘심안의 황녀’라 불릴 정도로 통찰력이 뛰어난 건 인정한다만. 고작 그 정도로는 그놈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제가 당해본 일이라며 2황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라버니가 그리 말할 정도면 쉽지 않을 것이다.
‘정신 차리자.’
눈에 힘을 준 5황녀가 부릅뜬 눈을 키운 그때, 정원에 다다른 이안이 눈가를 휘었다.
그 곡선에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