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황녀님, 이쪽으로 따라와 보시겠습니까.”
“그쪽으로요?”
“예. 특별히 황녀님께만 보여드리죠. 이 라줄리 관의 비밀을.”
잔디를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이안의 걸음을 따라 정원의 끄트머리로.
어느 구석진 곳으로 간 걸음이 멈춘 후였다.
이안이 엉켜있는 덩굴을 치우자 회백색 벽이 드러났고, 그 벽을 밀자 쪽문이 나타났다.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나무문.
그것을 본 5황녀는 저게 무슨 비밀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게 비밀인가요?”
“한번 열어보십시오.”
쪽문의 구석을 손바닥으로 누른 이안이 재차 눈꼬리를 휘었다.
흡사 벌을 유혹하는 화사한 꽃처럼 보였다.
호사가들이 외모를 순위로 나눌 때, 언제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게 뷔트시겐이라더니 과연.
절대 홀리지 말자 다짐하며 5황녀는 거침없이 쪽문으로 다가갔다.
‘문이 보이는 것과 달리 허술한 구조가 아니네.’
이안의 손바닥에서 나온 피가 문에 스미고 있었다.
이로 보아 순혈의 피로만 열리는 잠금 술식이 걸려 있는 게 확실했다.
5황녀는 이미 술식이 해제된 문을 과감하게 열어젖혔다.
“…….”
골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자락은 바로 중앙 광장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게…….”
“쉿. 둘만의 비밀입니다. 이제 저와 놀러 나가시죠, 황녀님.”
“……흔쾌히 따라가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죠?”
“뷔트시겐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황녀님께서 알고 싶어하는 그것을요.”
말을 끝낸 이안은 고민하는 5황녀를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본 5황녀는 발간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라니.
제가 온 목적을 알고 저러는 건지, 그냥 넘겨짚은 건지.
진심으로 이안의 속내를 가늠해볼 수가 없었다.
뷔트시겐의 칠흑은 머리카락 색이 아니라 시커먼 속 때문에 붙여진 모양이다.
참으로 의뭉스럽다.
하지만 여기서 망설이다 기회를 놓치면 필히 후회할 것이다.
이안 뷔트시겐을 알 수 있었던 선택의 순간에 포기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화사하게 웃은 5황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의 곁에 바투 붙었다.
“나도 뷔트시겐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네요.”
“그럼 가실까요.”
* * *
저벅저벅.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만한 폭.
외길인 골목을 걷다 보니 어느덧 중앙 광장에 다다랐다.
“이쪽으로.”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왼편의 샛길로 빠졌다.
달팽이처럼 꼬여 있는 나선의 길을 돌고 돌길 얼마쯤.
“이 양반이, 어제도 외상으로 처먹어놓고.”
“손님한테 이러기우?”
왁자지껄한 소음과 동시에 기름 냄새와 술 익는 냄새가 풍겼다.
앞선 거리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중앙은 정돈된 상점이 즐비했다면 이곳은 좌판이 많았다.
온갖 이국적인 물건과 사람이 눈을 사로잡고, 각종 길거리 음식이 늘어서 군침을 자극하는.
이안은 익살스럽게 팔을 아래로 내리며 상체를 숙였다.
“뷔트시겐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거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황녀님.”
“아.”
“이왕 오셨으니 구경하는 김에 이곳의 음식도 드셔보시겠습니까.”
“음식을…….”
“이래 봬도 깔끔합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맛보고 싶네요. 추천해주세요.”
5황녀가 빼지 않으니 진을 뺄 필요가 없었다.
이안과 황녀는 에이셔의 치즈로 만든 빵, 신맛이 일품인 카람볼라, 아케랑코 꽃 튀김 등 슈바츠의 명물을 먹으며 다녔다.
한동안 먹기만 하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정령에 관해 말하다가, 술식에 관해 의견을 나누다가, 그냥 음식 얘기를 하다가.
두서없이 떠들고 난 이후였다.
배부른 표정의 5황녀는 번들한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짐작할 겁니다. 내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황제 폐하의 뜻입니까.”
“그렇긴 한데…… 반쯤은 내 의지도 있어요. 오라버니께 도움이 되고 싶었거든요.”
“도움이라. 뷔트시겐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하셨단 거군요.”
“그렇죠. 뷔트시겐과 조금 더 돈독한 관계가 된다면 오라버니가 지고한 자리에 더 가까워질 테니까요.”
5황녀는 확신했다.
흔들림 없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저 얼굴과 똑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던 2황자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두 얼굴이 겹쳐 보이자 이안은 황제의 결정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왜 2황자를 차기 후계자로 정했는지.
행동 대장 격인 5황녀와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줄 아는 2황자.
둘의 조합이면 수호자가 없는 제국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제국에 큰 이변이 없는 한.
이안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두리번두리번.
한참 이안을 빤히 보던 5황녀가 무언가를 찾는 듯이 분주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길가 한편에 핀 들꽃을 발견하곤 힘차게 뽑았다.
그녀의 행동에 놀란 호위병이 말리든 말든.
5황녀는 뿌리째 뽑힌 이름 모를 들꽃의 흙을 툭툭 털더니, 그것을 이안에게 불쑥 내밀었다.
해사한 손을 닮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도 똑같이 그려졌다.
“이안 뷔트시겐, 나랑 결혼할래요?”
“……!?”
* * *
뷔트시겐 슈바츠에 자리한 황궁 소유의 한 저택.
“비 맞은 생쥐 꼴인 걸 보니 차였구나.”
5황녀는 낄낄대는 2황자를 힘껏 째려보았다.
황자가 되어서 어쩜 저리 경망스러운지.
자신의 핏줄이라는 게 가끔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황녀는 테라스 의자에 앉아 바지를 탈탈 털었다.
황자의 등짝을 두드리는 것처럼.
‘어쩐지 이안 그자를 만나러 간다니까 한사코 여기까지 따라붙더라니.’
아무래도 저를 놀리고 싶어서 그런 모양이다.
“아직 차이지 않았거든요?”
“추앙만 받던 네가 처음으로 거절을 당했으니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을 만하지, 아암. 현실을 인정 못 하는 거야…….”
“오라버니!”
“어이쿠. 내 어여쁜 동생님이 화나셨네?”
“이게 다 날 안달 나게 하려고 그자가 수를 쓰는 거라고요.”
“응? 수? 이안 그자가 이 일에 말이냐?”
2황자는 웬 헛소리를 그렇게 참신하게 하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주 사위니, 정략혼이니 하는 말들은 황제가 수호자와 나눈 밀담이었다.
그 내용을 알 리 만무한데 이안 그자가 무슨 수를 쓸 수 있다고.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은 거다.
그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억울해진 걸까.
입술을 깨문 5황녀가 고자질하듯 말을 다다다 쏟아냈다.
“그자, 완전 끼가 다분했다니까요.”
“…….”
“오라버니 지금 자꾸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데, 제 말을 들어보면 달라질 거예요. 아까는 말이죠. 그자가 갑자기 제 손목을 턱 잡더니 그의 품으로 잡아당기는 거 있죠.”
“어이하여?”
“마차가 다니는 쪽은 위험하니 제 쪽으로 붙으라나?”
“오호, 그래서?”
“그러더니 이렇게 눈웃음을 지으며 무심히 제 손을 놓더라고요.”
“그런 무심함, 상대를 안달이 나도록 만들지.”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쩔 수 없이 입가에 양념이 묻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가 있지.”
“제가 그걸 신경 쓰니까 그쪽에서 먼저 양념구이를 크게 베어 물더라고요. 저도 묻히고 먹는다며.”
“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는 미친 배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과식을 하고 말았어요.”
“하하하핫.”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2황자가 난간을 치며 박장대소를 했다.
도도하고 고고한 5황녀의 본모습은 언제나 그렇듯 귀여웠다.
본인은 황녀로서의 품격을 갖춰야 한다며 정제되려 하지만 글쎄.
사람은 천성이라고 하는 본바탕을 감출 수가 없다.
5황녀 역시 그렇다.
모두의 축복 속에 태어나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한 덕에 성정이 낭창하다.
물론 그 모습도 친애하는 이들에게만 보여줘서 그녀의 본 모습을 아는 이는 적지만.
“너무 능숙한 모습에 모든 여자한테 저러나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설마 모두에게 그럴까.”
“아니 오라버니가 못 봐서 그래요. 지나가는 강아지한테까지 친절했다니까요.”
“아.”
“가만 보면 아비인 뷔트시겐 가주와 닮은 듯 영 딴판인 것 같아요.”
“딴판?”
“뷔트시겐 가주는 오직 한 사람만 봤잖아요.”
“아아, 유명하지. 그의 사랑 이야기는.”
뷔트시겐 가주에 관한 풍문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뜨겁게 회자 되는 얘기가 바로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평범한 귀족가의 여식에게 반해 몇 년을 따라다닌 것부터.
기어코 맘을 얻어 결혼하더니, 꽃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설원 한복판에 온실을 지은 것.
아내와 떨어지는 게 싫다며 1박 이상의 임무는 절대로 하지 않은 것.
아이를 낳고 아내가 죽은 지도 벌써 15년째인데 여전히 아내만을 그리워하는 것까지.
진부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꽉 사로잡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2황자는 뷔트시겐 가주를 떠올리다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가주가 그리 살았다고 아들까지 그리 살란 법은 없는데. 다들 이안 그자도 그럴 거라고 단정 짓다니 꽤 억울하겠어.”
“사실 할아버님도 그렇게 생각해서 그자와 엮어주려고…….”
“그래서 이 결혼을 추진한 면도 있지.”
아무리 정략혼이라도 해도 5황녀를 그저 그런 놈팡이에게 줄 순 없었다.
하여 황제는 이안이 손주 사위 되는 것에 무척 만족해하고 있다.
적어도 여자 문제로 황녀의 골치를 썩이지는 않겠지 라면서.
어찌 보면 황제로서 꽤나 순진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재차 입꼬리를 푸들거린 2황자는 지난번에 만난 이안을 떠올려 보았다.
친절과 웃음.
황녀의 말처럼 제일 먼저 연상되는 건 잘 웃는다는 거였다.
세상 사는 게 그렇게 재밌나 싶게 잘도 웃었지만…….
‘진짜는 아녔어. 그저 열다섯처럼 보이고 싶은 웃음이었지.’
사자가 토끼처럼 보이고 싶은 것에 가깝달까.
그리고 하나 더.
이안은 현재를 보되 아득히 먼 어느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사명을 가진 구도자의 그것처럼.
“할아버님도 퍽 순진하시지. 그런 자를 옭아매려 하다니.”
“……제가 농담 섞어 이말 저말 했지만, 실은 오늘 만나보니 알겠더라고요. 그자가 어떤 자인지.”
“꼭 여기 있되 이곳에 없는 자 같지 않더냐.”
“맞아요. 그랬어요. 굉장히 친절하고 어디 하나 미워할 만한 구석이 없는데…… 마치 허상 같았어요.”
황녀는 높게 묶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었다.
웬일인지 그 손길이 조금은 쌉쌀했다.
“이안 뷔트시겐이 그런 자인 것을 알고…… 예까지 따라오신 거죠. 일이 이렇게 틀어질 것을 알고”
“네가, 그리고 할아버님이 내미는 제안은 그자에게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아닐 것이다.”
“맞아요. 성정이 유하단 소문만으로 단정 지어버린 제 패착이었어요.”
“하나 우리에겐, 이 황실에는 그자가 반드시 필요하지.”
“…….”
“살리카란 승냥이가 이를 드러냈는데 다른 가문이라고 다를까. 그들을 억압하던 황실의 힘이 계승되지 못하고 있는 이 마당에…….”
“오라버니…….”
“하아. 올해는 유난히 겨울이 길고 춥구나. 이때를 견디면 봄이 올 것을 아는데도.”
2황자는 견디기 힘든 계절이란 생각을 했다.
황가는 흔들리고 있고, 그것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줄 자는 외부인사였다.
다음 세대인 수호자를 얻은 자.
하여 절대적으로 황실에 필요하나 제 뿌리인 뷔트시겐이 더 소중한 자.
“이 상황에서 이안 그자와 척을 지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이지.”
“…….”
“황가가 어느 순간이든 뷔트시겐을 적대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신의를 보이는 거.”
“……뷔트시겐 가주를 만나보실 거예요?”
“그리해야지. 그러려고 온갖 구박을 받으며 네 뒤꽁무니를 쫓아온 거니까.”
“구박한 적 없거든요?”
5황녀의 잡아뗌에 2황자는 실없이 웃음을 내보였다.
어느 한구석 메마른 웃음.
그것은 테라스를 휘돌며 연기처럼 위로 말아져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