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60화 (160/214)

제160화

키이잉.

이안은 정원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먼 하늘이 굵은 눈발을 아래로 내던지고 있었다.

뭐 하나 작살 낼 듯이.

“며칠 춥겠다.”

[이안. 저거, 저거 혹시 그거 아닐까.]

“응?”

[너한테 차인 황녀의 원한 덩어리.]

“오, 그래서 저렇게 매서운가.”

[황녀를 대차게 차신 내 제자님은 간이 커. 지나치게 커.]

“그렇다고 데릴사위가 될 순 없잖수.”

[허긴. 목줄이 매인 채 살 순 없지. 뭐 하나 원하는 대로 못 하게 될 터인데.]

녹스가 이안의 어깨 위에서 손바닥을 삭삭 비볐다.

그 비빔은 ‘황녀가 아니라 황녀 할애비라도 찼어야지. 자알 했다.’ 대충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람을 차고도 칭찬받을 줄 몰랐던 이안은 실소를 터트렸다.

제가 뭣 때문에 웃는 줄도 모르면서.

이안의 들썩거림에 장단을 맞추려는 건지 녹스가 어깨 위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남의 어깨를 제집 안방마냥 편하게도 쓴다.

[한데 말이다, 이안.]

“뭔데 또 그렇게 목소리를 깔아. 괜히 겁나게.”

[실은 내가 들은 게 있는데, 이번 생도들에 관해서.]

“이번 생도들?”

황녀 얘기하다가 난데없이 웬 생도들?

이야기가 녹스의 눈알 굴림처럼 마구 튀었다.

하지만 이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늘상 녹스와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흘러가니까.

거기다 오늘은 생도 수습 기간의 첫날이 아니던가.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칼브란이 말하길 내정자들이라 실력이 상당하다고 그러더구나.]

“그래서 칼브란도, 아버지도 모두 흡족해하고 계시지.”

내정자.

채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예비 생도로 낙점받은 자들을 일컫는다.

그만큼 자질이 뛰어나고 잠재력이 풍부하다는 뜻.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종가에서 머물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때문에 특히나 실력이 뛰어나다.

“녹스, 뷔트시겐에 머무는 10살 남짓한 꼬마들 봤지.”

[그 부스러기들이 내정자가 아니더냐. 오늘 만날 아이들 역시 똑같은 과정을 거친 것들이고.]

“그러니 실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지.

허연 입김을 뿜던 이안은 멈춰 서서 구두를 바닥에 비볐다.

앞코에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눈이 굳어져서 미끌거려 낙상하기 십상일 터.

이안은 눈을 다 털어낸 후에 다시 루티멘툼 생활관으로 향했다.

“아, 그 때문에 내가 밀릴까 봐 걱정돼?”

[무슨. 너 같은 독종이 고작 저런 애송이들에게 쫄아서 빌빌댈까.]

“근데?”

[그래도 만만찮을 거라는 얘기를 하는 거다. 고것들은 어릴 때부터 토대를 단단히 쌓아 올린 것들이니.]

“진짜배기들이지. 저들이 후일 단장이 되고 총단장이 되고 사령관이 되니까.”

[그러니까 괜히 방심하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이안이 익살스럽게 경례를 하자마자 녹스가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휘리릭.

그러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 돈 후 여덟 살 꼬마로 변했다.

집에 있으니 좋은 점 중 하나가 이런 거였다.

어떤 형태를 취하든 녹스가 편히 다닐 수 있다는 거.

“역시 집이 좋지, 녹스?”

[좋다. 충직한 칼브란이 있으니. 흘흘흘.]

“그나저나 웬일이래. 아이 형태는 제한 시간이 있어 아껴야 한다고 그러더니.”

[이번만은 예외다. 네가 기죽지 않아야 하니까.]

“응? 내가?”

[어젯밤 거센 눈 폭풍을 뚫고 ‘그자’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다.]

“그자? 아…… 후계자 후보?”

[중앙 아카데미에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누.]

“방학 땐 늘 여기서 지냈으니까. 열 살 때부터 줄곧 그래왔으니 여기가 집이지 뭐.”

[본디 2장로의 친척이라지?]

“정확하게는 2장로 동생의 아들이지.”

[흥. 그 인사가 양심은 있나 보네. 실력 좋은 제 손주들을 후보로 밀지 않은 것을 보면.]

이러든 저러든 마음에 안 든다며 녹스가 콧방귀를 대차게 뀌었다.

녀석은 2장로를 단단히 싫어한다.

이유는 찾을 필요도 없이 이안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중간에 스승이 되겠다고 자처하며 마음을 바꾼 것도 별로란다.

만약 이안이 제 성에 차지 않았다면?

여전히 반대했을 거 아니냐며 일전에 마구 화를 낸 적도 있었다.

[헹. 꼭 무쪽 같이 생겨 먹어선.]

녹스는 연신 툴툴대는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아갔다.

그렇게 진정되는 것 같더니만 다시금 녹스의 콧구멍이 과하게 벌어졌다.

저러다 터지겠다.

왜 저러나 싶어 이안은 녹스의 거한 콧김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 * *

저 멀리 10시 방향.

아른거리는 수준인데도 확연하게 누군가가 이안의 동공에 박혀 들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새까만 눈동자.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는 칠흑을 닮은 색을 가진 자가.

‘루시안 발르와.’

5년째 후계자 후보이고, 본래라면 올해 후계자가 되는 자.

그가 아버지와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장면이었다.

몇 마디 말이 오가는가 싶더니.

아버지가 후보자의 손을 토닥이며 책 한 권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공손하게 받아든 후보자가 고개를 꾸벅임과 동시에 녹스의 눈깔이 활활 타올랐다.

[저게 뭣이여?]

“수장이 일족을 자애롭게 돌보는 감동적인 장면?”

[옘병. 우리 이안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뭔 장면?]

녹스가 발을 쾅쾅 굴리는 동안 이안은 덤덤하게 두 사람을 보았다.

‘예전이었으면…….’

저 모습을 본 순간 오장육부가 꼬이며 속이 왈딱 뒤집혔을 것이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장로들과 일족의 신뢰를 받는 저자가 미치게 부러워서.

미치게 질투가 나서.

미치게 미워서.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휩싸인 채 불면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게 저를 갉아먹는 등신 같은 짓인지도 모른 채.

‘……저자는 여전히 빛이 나는군.’

후계식이 있던 그 날을 연상시키는 반짝임이었다.

그의 후계식을 보려고 몰래 숨어들어와 먼발치에서 본 그날.

혹여 누가 알아볼세라 시커먼 후드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던 그 날.

어둠 같았던 저와 다르게 그날의 루시안은 영광과 환호 속에 환하게 빛났더랬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저를 무자비하게 할퀴어댔었다.

물론 그 상흔은 한때이지 지금은…….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도 그저 잔잔할 뿐이었다.

닳고 닳아 삭아버린 감정에 무엇이 더 남아 있으랴.

더 태울 것도 없이 텅 비어 산화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이안은 지난 생의 아득한 기억을 더듬다 건조하게 고개를 돌려 제가 갈 방향을 보았다.

“……녹스, 그만 가자. 수습 기간 첫날인데 늦겠다.”

[…….]

녹스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체 녀석이 뭐하나 싶어 이안은 눈길을 내려트렸다.

녀석은 후보자의 손에 들린 책을 노려보며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어째 사고 칠 각이다, 라고 생각한 찰나.

녹스가 먹잇감을 포착한 사냥꾼 마냥 앞으로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이안의 손도 녹스의 속도에 맞춰 움직였고.

터억, 가까스로 녹스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어디 가시게.”

[놔 봐라. 내 저 꼴은 못 보겠다. 깽판 치러 가야지.]

“아이고, 스승님.”

[후계자 후보? 헹! 내가 누군지 저 잡것에게 알려줘야겠다.]

“통성명한 뒤에 친해지시게?”

굳이 두 사람 사이에 난입해서 무엇하리.

이안은 앞발을 휘젓는 녹스의 뒷덜미를 질질 잡아끌었다.

안 가려고 버티는 녀석 때문에 한 걸음 떼는 데에만 한세월이 걸렸다.

[놔라. 안 가련다. 내 저 것에게 한 마디마아아안.]

* * *

제5 연무장.

소 연무장은 생도들을 위한 것으로 루티멘툼 생활관 옆에 붙어있다.

그 안으로 들어선 이안은 검은 물결을 마주했다.

빳빳한 검은색 정복을 입은 생도들이 만들어낸 광경.

이 물결의 정점은 정복의 등에 수놓아진 늑대의 발톱이었다.

그 기세가 사뭇 등등했다.

생도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한데…….’

등등한 검은 물결의 무리는 한데 뭉쳐있지 않았다.

[이야, 아주 예쁘게 반반이다.]

누가 자르기라도 한 것처럼 생도 무리가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왼쪽은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는 말랑한 C반 아이들.

오른쪽은 당장 전쟁터로 뛰어나갈 듯 매서운 뷔트시겐의 내정자들.

두 무리가 뚝 떨어져 긴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로의 데면데면한 마음의 간격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특히나 내정자들.

그들은 아직 C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껄끄러워하는 눈치였다.

‘흠. 두 달간의 생활도 쉽지 않겠다.’

이안은 눈썹을 구부러트리며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내정자들의 동공이 빼곡하게 뒤따라왔다.

어디로 가는지 염탐하는 것 같은 시선.

그것들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이안은 자리를 잡았다.

해맑게 손짓하는 C반 곁이었다.

순간, 정제되어 있던 생도들 쪽의 기류가 출렁거렸다.

조용한 수선함 속.

그것을 잠재우려는 듯 저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알란.’

이번 수습 기간의 교관은 알란으로 발탁된 모양이다.

알란을 필두로 총 다섯의 교관이 중앙의 단상에 느긋하게 올라섰다.

그들 전부 여름의 한낮처럼 기운들이 뜨거웠다.

마치 열화의 사막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근데 교관들 말고도 또 다른 기운이…….’

교관들을 보던 이안은 눈가를 갸름하게 치떴다.

다섯의 기운을 압도하는 더 거칠고 강한 기운이 교관의 뒤쪽에서 느껴졌다.

이안이 자세히 그 기운을 가늠해보려던 때.

“어흠. 첫 대면에 말 없는 인사가 이리 길어서야.”

뒷짐을 진 2장로가 다섯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술렁.

그의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뷔트시겐의 생도들이었다.

각이 꽉 잡혀서 누가 명하지 않으면 입도 열 것 같지 않던 그들.

그들은 진심으로 놀랐는지 대열까지 흐트러트리며 수군거렸다.

“2장로님이 왜 여길?”

“수습 기간 중에 장로님들이 이곳에 오신 적이 있었나?”

“보통은 수료식 때 빼곤 안 오시지.”

“그런데 예고도 없이.”

“아, 2장로님이 갑자기 오신 게…….”

작게 수군거리던 생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바로 이안.

그들은 2장로가 온 이유가 이안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각자 본분에 맞는 일을 하시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

말을 저렇게 한다고 누가 2장로의 존재를 외면할 수 있을까.

특히 이안은 남들보다 배는 무작스럽게 신경이 쓰였다.

왜냐.

2장로가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데 무시가 될 리가.

얼굴이 익을 것 같았다.

‘아이고, 저번에 얻어먹은 타르트가 역류할 것 같다.’

이안의 눈썹머리가 내려간 그 순간, 그를 흘끗 본 알란이 움직였다.

“신경 쓰지 말란다고 꼬장꼬장한 그 기운이 어디 감춰진답니까?”

“아, 글쎄 날 연무장의 돌이다 생각하시게.”

“이리 부담스러운 돌은 제 평생 처음입니다.”

“어허. 부담 갖지 말래도.”

“아니, 2장로님. 평소에는 눈치 빠르신 분이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하시는 겁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나.”

“몰라서 그러십니까? 장로님이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어린 생도들이 불편해서 어디 훈련이나 제대로 받겠습니까.”

“즉슨, 이 늙은이는 이만 꺼져라, 그 말인 겐가.”

‘그 말입니다.’란 알란의 압박 섞인 눈빛에 2장로는 눈썹을 일자로 내렸다.

돼먹지 못한 서운한 척.

이에 알란이 ‘저한테는 그런 수작 안 통합니다.’라며 타박을 했다.

“그 귀한 걸음을 여기다 쓰지 마시고 좋아죽는 임무에나 쓰십시오.”

“에잉. 말하는 본새하곤. 배려가 없어, 배려가. 늙은이에 대한 배려가.”

“그런 배려도 저 말고 귀애하는 손주에게 받으십시오.”

“저놈의 싹퉁바가지는 갈수록 더 고약해지는군.”

“괜찮습니다. 이런 제 성격을 장로님은 몰라도 가주님께선 무척이나 좋아하시거든요.”

“그렇게 윗사람한테 따박따박 대들어서 어디 출세는 하겠나.”

“그 또한 괜찮습니다. 가주님께서 제가 위아래 없이 잘 들이박는다고 좋아하십니다. 그거면 됐지 출세는 무슨.”

“……에잉.”

알란의 독사 같은 말발에 결국 2장로는 매가리 없이 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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