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보기 드문 광경.
이에 이안은 흥미진진하단 눈빛을 하곤 상황을 관전했다.
2장로의 별칭이 무엇이던가.
쌈닭이었다.
그 별칭에 걸맞게 2장로는 허구한 날 1장로와 멱살잡이를 했다.
1장로뿐이랴.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들면 일단 들이박고 봤다.
워낙 강골이라 물러서는 법조차 없었다.
한데.
‘자고로 먹이사슬에는 천적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
2장로에게도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바로 알란.
지위로 따져도, 나이로 따져도, 등급으로 따져도 질 구석이 없는데.
2장로는 희한하게 알란한테 만큼은 맥을 못 추고 약했다.
‘이번에도 알란이 이겼네.’
알란의 축객령에 2장로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미련 많은 뒤태를 보이며 그는 터덜터덜 단상을 내려왔다.
비록 떠밀린 것이긴 했으나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뻗대면 모두가 불편해진다는 사실을.
싱거우리만치 쉬이 퇴장한 2장로가 느릿느릿 연무장을 떠난 후.
“어흠.”
알란은 주목하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신호 한 번에 생도들은 등허리를 곧추세우며 자세를 바로 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양새.
그런 생도들을 쭉 훑어본 후 그는 뒤쪽까지 들리도록 카랑카랑하게 말했다.
“교관 알란이다. 다들 반갑다.”
“예, 교관님.”
“그리고 내 옆, 시가를 물고 있는 교관은 에쉬튼이고…….”
교관 넷에 대한 소개가 짤막하게 이어졌다.
인사가 끝난 뒤에 알란은 생도들을 향해 아주 짧게 묵례를 했다.
생도들이 훈련생일 때는 하지 않았던 격식.
수습 기간 첫날에만 있는 격식을 선보이고는 그가 본격적으로 서두를 꺼냈다.
“오늘부로 제군들은 더 이상 훈련생의 신분이 아니다.”
“…….”
“각자가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을 지닌 어엿한 예비 정령 기사이다.”
다소 묵직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마른침을 삼킨 생도들의 표정이 약간 뻣뻣해졌다.
긴장감이 얼룩진 분위기에도 알란은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하여 나는 이제부터 제군들을 같은 정령 기사로서 대할 것이고 존중할 것이다.”
“…….”
“사설이 길 필요 없겠지. 제군들은 정령 기사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만을 남겨두고 있다. 수습 기간은 총 두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이 두 달 동안 할 일은 간단하다. 임무를 수행하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면 된다.”
임무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자기 생각과 더불어 기재하는 보고서.
이를 바탕으로 각 군의 사령관들은 생도의 능력과 성향, 그리고 장점을 면밀하게 파악한다.
그 후 부대의 특성에 들어맞는 생도를 요긴하게 발탁한다.
간략한 설명을 마친 알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몰아친 듯싶어서 틈을 두려는 것이었다.
수 초 그러다, 그는 여태까지 중 가장 분명한 울림을 품은 채 말을 굴렸다.
“선임으로서 내가 제군들에게 해줄 말은 하나다.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해라. 생도라는 신분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니.”
“예!”
생도들의 우렁찬 대꾸에 시종 무뚝뚝했던 알란의 표정이 펴졌다.
대개가 훈련생이었을 때부터 봐 온 아이들이니 오죽할까.
아무리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써도 기특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알란은 훔훔한 눈빛으로 생도들을 바라보다 이내 표정을 정비했다.
“크흠. 그럼 첫날이니만큼 대련하는 것으로 그 시작을 열겠다. 지금부터 자유로이 기량을 뽐내도록.”
* * *
무난하게 수습 기간의 첫날이 저물어 가던 그날 저녁.
루티멘툼 생활관 1호동에서는 가시 돋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말이 돼?”
“에루리안?”
“하!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는 촌구석 아카데미에 다녔던 것들하고 같이 훈련을 받아야 한다니.”
뾰족하게 날이 선 소리는 주근깨가 많은 소년에게서 나온 거였다.
소년은 짜증이 치미는지 인상을 팍 구겼다.
“거기다 페이라조 3성?”
“하긴. 페이라조 3성이 생도로 들어왔다는 게 어이없긴 해.”
“지금까지 그런 역사가 없어요, 역사가.”
주근깨가 대차게 툴툴거리자 옆에 있던 생도들이 동조하며 말을 보탰다.
호응하는 자들이 있어 고취된 것일까.
소년의 목청이 한층 더 높아지며 끝이 잔뜩 갈라졌다.
“솔직히 좀 억울하지 않냐? 그 무지렁이들하고 같은 취급을 받는 거?”
“말이라고.”
“우리는 생도가 되려고 십 년을 빡세게 굴렀는데. 하 참.”
“그것들은 그냥 막 쉽게 굴러들어왔지.”
“앞으로 계속 실력도 안 되는 것들이 설쳐댈 꼴을 봐야 한다니, 아 씨, 생각만 해도 짜증 난다.”
소년의 격분을 따라 가열되는 분위기 속.
여태껏 무리의 중심에 있으면서 아무 말 않던 단정한 소년이 입을 열었다.
“니콜라스, 그만해라.”
“뭘 그만해. 리오 너 설마 이 마당에까지 고지식한 소리를 하려는 거냐?”
주근깨 소년, 아니 니콜라스는 이죽거렸다.
“같은 생도이니 다 같이 잘 지내야 한다, 뭐 그딴 말을 하려고?”
“그래야 할 거다.”
“리오!”
“불만은 있을 수 있는데 행동은 똑바로 하라는 거다. 그들을 생도로 받아들인 건 가주님의 뜻이었으니까.”
“그건…….”
“결과론적으로 네가 가진 불만은 가주님을 향한 것이 될 수도 있어.”
“그런 거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니 하나만 물어보자. 가주님은 어떤 분이시지?”
“어떤 분이시냐니?”
“그분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편애해서 결정을 내리신 적이 없으시다. 이번 결정 역시 그들의 잠재력을 바탕으로 결정을 하신 거고.”
에루리안의 아이들을 받아들인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또한 다른 원소를 가진 자들, 그들과 부대끼며 우리가 한층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누가 가주님의 결정까지 싸잡아 뭐라 했냐고.”
“다시 말하지만 네가 불만을 내비친 시점부터 그렇게 되었다.”
“아니, 내 말은 하찮은 그것들의 존재가 우리의 긍지를 짓밟으니까…….”
“긍지?”
“그렇잖아. 다른 데도 아니고 버림받은 것들이나 가는 에루리안 출신은 좀.”
“도련님께서도 에루리안 출신이다.”
“야, 그딴 식으로 자꾸 말꼬리 잡고 늘어질래?”
니콜라스의 앙칼짐은 고막을 날카롭게 긁었다.
이에도 귀를 후비적거린 리오란 열일곱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저런 떽떽거림이 일상이라는 것처럼.
“그럼 니콜라스 말해봐라. 네가 말하는 긍지란 게 뭐지?”
“그거야…….”
“그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배척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던가.”
“…….”
“긍지는 말똥 밭이건 지옥이건 제 신념을 관철하는 데서 나오는 것.”
리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울림만은 큰지 니콜라스 주변의 무리를 제외하곤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히 생도 무리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어린 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강하다는 의미.
“그러니 출신이나 등급 따지지 말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만 다하면 돼.”
“…….”
“아까 대련을 해봐서 알지 않나. 그들이 비록 우리를 이기지는 못했지만, 공격의 다양성과 의표를 찔러오는 방식은 훌륭했다.”
뿐일까.
대련을 관찰하던 이안이 그들에게 몇 마디를 해준 즉시 그들은 문제점을 곧바로 수정했다.
흠칫 놀랄 수밖에 없는 흡수력과 유연성을 갖춘 것.
이대로 성장한다면 아마…….
‘그리 멀지 않는 때에 우리를 넘어설 수도 있어.’
리오는 부정할 수 없는 직감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아닌 말로 종가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에루리안 출신보다 못해서야 어디 면이 서랴.
뒤에서 누군가가 바싹 쫓아오는 느낌이라 뒷골이 서늘했다.
그래서였다.
리오가 니콜라스의 징징거림을 어느 한 편으로 한심하게 느낀 것은.
“그렇게 깔보다가는 추월당할지도 모른다. 그들도 그들이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이 만만찮으니까.”
“스승?”
“도련님 말이다. 아까 대련에서 보지 않았나.”
“반편이 도련님이 뭐가 무서워서…….”
콰앙!
니콜라스가 입을 떼자마자 리오는 탁자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순전히 악력만으로 탁자가 쩌적 두 동강이 났다.
“반편이?”
리오의 분노에 니콜라스는 실수했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어릴 때부터 듣던 말이라 저도 모르게 나온 것이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단코 해서는 안 되는 말.
니콜라스가 사과하려 입을 열기도 전, 리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다신 도련님에 대해 그딴 쌍소리 지껄이지 마.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정치질하며 선동할 거면 돌아가!”
“리오!”
“우리는 정령 기사가 되려고 가문을 떠나왔다. 그 순간 넌 니콜라스 발르와이되 발르와가 아니게 됐고, 나 역시 리오 퐁텐블로이되 퐁텐블로가 아니게 되었다.”
“…….”
“그러니 수습 기간일 때 노선을 확실히 정해.”
“무슨 노선.”
“기사가 될 건지, 아니면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 정치질하며 살 건지.”
“야, 내가 말실수 좀 했기로서니 그딴 식으로 면박을 줄 것까진…….”
“정령 기사는 가문을 위해 살지 않는다. 수장님과 일족, 그리고 뷔트시겐을 위해 살뿐.”
리오는 단호하게 말하며 일어섰다.
“그러니 정령 기사가 될 거라면 도련님을 적대하지 마.”
이안 뷔트시겐, 그가 뷔트시겐이란 성을 쓰는 한 존중해야 한다.
뷔트시겐이란 뿌리는 바람을 다스리는 자들의 근원이며 긍지이므로.
절대 그 이름이 훼손되어서도, 망가져서도 안 된다.
“만약 도련님이 후계자로 정해지면 우리의 주군이 될 테니까.”
리오는 명료한 눈빛을 하고선 생도들을 직시했다.
주군, 그 단어를 입에 담으면 천근의 무게를 토해내는 것처럼 입안이 무거워진다.
아니지.
뭔가를 알아갈수록 덧씌워지는 무게에 말을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주군을 깔보는 거야말로 긍지를 제 손으로 짓뭉개는 멍청한 짓이지.”
본심을 모조리 끄집어낸 리오는 곧장 응접실을 떠났다.
저벅저벅.
그의 걸음은 천둥이 되어 남겨진 생도들의 가슴을 싸하게 긁어내렸다.
.
.
.
“여전하네, 리오는.”
이안은 저 멀리 걸어가는 리오를 보며 중얼거렸다.
실은 리오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1호동으로 찾아온 참이었다.
그러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생도들의 대화와 리오의 발언까지도.
“그 고지식한 성정이 떡잎 때라고 유할까.”
사람 성격은 참 어디 안 간다.
그러니 다른 누구도 아닌 리오의 생각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리오 퐁텐블로.
지난 생에서 알란만큼이나 제 곁에 오래 남아 있었던 호위부대원.
외팔의 정령 기사라 불렸던 자.
<제게 한쪽 팔이 없다고 배려하지 마십시오. 두 팔이 전부, 아니 설령 다리마저 없다 해도 도련님을 지키는 것이 저의 의무이니.>
리오는 전형적인 기사였다.
주군은 주군일 뿐 제가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저 주군을 위해 살다 죽으면 그뿐이다.
그것이 진정한 긍지이며 자긍심이니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해선 안 된다.
리오는 그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더랬다.
그리고 그는 꼭 그렇게 죽을 때까지 그런 놈이었다.
“……회포 좀 풀어볼까 했더니만.”
분위기가 이래서야 어디 얘기나 제대로 나눠볼 수 있겠는가.
어차피 두 달 동안 지겹게 볼 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때든 시간을 내어 대화할 틈을 만들면 되겠지.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그런 뒤 생활관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 * *
그 시각 가주의 집무실.
뷔트시겐 가주는 정갈한 보고서를 훑어 내려갔다.
얼핏 무감해 보이는 눈길이나 자세히 뜯어보면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 동공을 칼브란은 면밀하게 주시했다.
찰나의 찰나도 놓칠세라.
집요한 관찰의 끄트머리에 이른 순간.
가주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말문을 열었다.
“루시안이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살리카 측과 접촉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