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예. 호그의 휘파람에서 폰투스 가의 인물과 은밀히 만났다 합니다.”
“뷔트시겐의 후계자 후보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라.”
“다만 직접적인 접촉이 아닌 점원을 통해 말들이 오갔다 합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겠군.”
“예, 그 밀담의 방식 때문에 거기까진.”
특수 처리된 음식에 할 말을 적어 상대방에게 건네기.
이로 인해 음식을 옮긴 점원조차도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거기다 음식을 먹어버리면 그만이니 증거인멸조차 쉽지 않은가.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지.”
보고를 다 들은 가주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메마른 눈빛.
감정의 온도를 알 수 없는 동공이 루시안, 후계자 후보가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내일, 그 녀석과 아침을 같이 해야겠군.”
대화의 흐름상 충분히 나올 법한 얘기였기에.
칼브란은 되묻지 않고 그저 묵묵히 가주의 심중에 살을 덧댈 뿐이었다.
“그럼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루시안이 머무는 별채의 사용인들도 입단속 시키게.”
“예. 이안 도련님에 관한 것이 루시안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차단하겠습니다.”
사람의 입이 막는다고 막아지랴.
입은 발이 달리지 않은 천리마이거늘.
가주도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물샐틈없이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이안을 보호할 수 있고.
그래야 혹여 배신자가 생기더라도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시안에게 신경을 좀 더 쓰게. 작금 후계자 건에 대해 별별 말들이 나돌고 있으니.”
떠도는 말의 골자는 주로 이랬다.
적자인 이안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루시안의 처지가 불완전해진 거 아니냐.
2장로의 행보로 보아 진즉 관심이 옮겨간 게 아니냐.
상황이 이렇다면 더 볼 것도 없지 않겠냐.
온통 부정적인 견해들뿐이었다.
어딜 가나 팽배한 이런 시선들을 자주 접하다 보면 어찌 되겠는가.
저도 모르는 사이 거기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더러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하지.’
가주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채 속내를 알기 어려운 낯을 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게 루시안을 잘 다독여야겠네.”
“마음의 틈이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까.”
“틈이 생기고 불안과 불만이 쌓이면 사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음이니.”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루시안이 휘둘리지 않게 중심을 잘 잡아줘야지.”
중심을 잡아 궁지에 몰리지 않게 하는 것 역시 가주의 몫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책 중 하나.
후보자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거라는 확신을 루시안에게 심어 주는 것이다.
그러자면 응당 후보자들에게 똑같은 지원을 해줘야 할 터.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게 공정히 대했음에도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가주는 ‘잘라낼 수밖에 없지.’란 뒷말을 삼켰다.
앞날을 대비해야 하는 건 맞지만 추측으로 재단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편협해진다.
일족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가주 역시 인간이었기에.
“어쨌든 상황이 이러하니 만일을 대비해야겠군.”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가주님.”
“루시안의 아비와 그 식솔들에게 감시를 붙이게.”
“명 받잡겠습니다. 그들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상세히 알아내겠습니다.”
칼브란이 고개를 숙이자 가주는 그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고자 한다면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지경.
하나 혀끝으로 밀어낸 근심과 우려와 안타까움을 이고 있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몫인 것을.
* * *
다음 날.
이안은 첫 번째 임무를 배정받고 목적지인 플로나 마을로 향했다.
타다닷.
그의 뒤로 C반 아이들이 바싹 붙어서 따라왔다.
물과 대지를 이용해서 이안만큼이나 재빠르게.
그리고 이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맹추격하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생도 내정자들.
그들은 바람의 선을 마구 접으며 열성적으로 따라붙었다.
거의 날다시피 하는 모양새랄까.
‘안 지겠다고 아득바득 움직이는 게 귀엽네.’
원래 저 나이대의 혈기 넘치는 아이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사소한 거 하나에도 불이 붙어 목숨을 건다.
이안은 아이들의 재롱을 관람하며 느긋이 앞서나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여유만만한지 임무가 아니라 놀러 나온 사람 같았다.
‘도련님은 확실히 다르구나.’
이안의 모습을 뒤쫓던 리오는 감탄을 연발했다.
바람의 선을 어렸을 때부터 다뤘던 자신들보다 뛰어난 운용 능력.
바람을 완벽히 제 뜻대로 부리는 미친 통제력.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여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이게 예사라는 양 레브란 자가 이안 곁에 바투 붙었다.
‘레브 아르데슈.’
새로 영입된 자들 가운데 가장 만만치 않은 자였다.
실력이 이안만큼이나 사기 수준이랄까.
지금도 얼음으로 바람의 선을 접듯이 이동하고 있잖은가.
얼음은 접는 게 아닐진대.
얼음의 끝과 끝을 포개는 기발한 운용으로 이동의 불편함을 간단히 해결해버렸다.
끼리끼리라더니.
두 사람은 독보적이었다.
“근데 이안, 이러고 있으니까 뭔가 신기하지 않냐?”
푸스스 실없이 웃은 레브가 목덜미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왜, 임무 나온 것 때문에?”
“어. 아카데미나 여기나 임무를 받고 수행하는 건 똑같은데…… 정식 임무는 처음이라 그런가.”
“묘하지. 실은 나도 그렇다.”
생도로서 임무를 배정받는 것, 이안으로서는 꿈에서도 바라던 일이었다.
연신 각혈을 하며 창밖 너머의 활기찬 생도들을 볼 때마다 가졌던 염원.
그것을 이뤘기 때문일까.
이안은 내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이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 표정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마저 그리 단순하랴.
그 속내가 어떨지 샅샅이 열거할 수 있기에 레브는 부러 장난을 걸었다.
안에 든 감정들을 물고 늘어지면 한없이 가라앉아버릴 테니까.
“으음. 아무리 봐도 역시 내가 더 빠른 것 같단 말이야.”
“까분다. 뷔트시겐의 속도를 누가 따라온다고.”
“천재인 나?”
약 올리듯이 레브가 바닥의 얼음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덩달아 돌아가는 레브의 몸뚱어리.
진심으로 얄밉단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동작이었다.
그 얄미움에 장난을 좀 튀기려고 했더니만.
레브의 우아한 회전력 너머로 회색빛이 넘실넘실 밀려들어 왔다.
뷔트시겐에서 생산되는 아케랑코 홍차.
그것의 7할을 책임지고 있는 플로나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 * *
“생도분들이 이리 때맞춰 와주셔서 안심입니다.”
쭈글쭈글하고 굽은 손이 아케랑코 나무의 꽃을 매만졌다.
평생 나무를 돌봐온 강인한 농부의 손끝.
동그란 모양새에 가시 돋듯 자라난 보라색 꽃이 수줍게 뭉그러졌다.
“막 수확기에 접어든 참이라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뭉그러진 꽃이 발산하는 진한 내음은 흡사 누군가를 꾀려는 것 같았다.
숨통이 조일 정도라 이안은 현기증이 났다.
반면 촌장은 익숙한지 도리어 평온한 낯으로 숨을 들이켰다.
“아케랑코를 잘 지켜주십시오. 잘 여문 꽃을 탐하는 사향 표범으로부터 말입니다.”
“예,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겠습니다.”
생도 대표로 촌장과 만나고 있는 이안과 리오.
두 사람은 똑 부러지게 대꾸했다.
대략적인 상황은 굳이 듣지 않아도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플로나 마을을 지키라는 임무는 매년 해왔던 임무였으니까.
그래도 이안은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했다.
“사향 표범의 기승이 심합니까.”
“예. 바지런히 쫓아내고는 있는데 꽃이 만개하니 이곳의 치안대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렇습니까.”
“하아. 어서 꽃잎을 쪄내야 하는데…….”
왜 저러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촌장은 근심이 많았다.
평생을 제 분신처럼 가꿔온 농작물에 대한 애착도 있을 테지만.
‘아케랑코가 갓난아기들에게는 필수품이니까.’
혹한기를 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한다.
“두 생도분도 잘 아실 겁니다. 아케랑코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이제 막 태어난 아기들의 생존과 연결되지요.”
“맞습니다. 이곳에 뿌리내린 초기, 혹한은 특히 생후 백일도 안된 어린 것들에게는 더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하나 이제는 아케랑코 덕분에 그 가혹함도 조금은 수월해지지 않았습니까.”
“예, 이것이 그 어린 것들을 살렸지요.”
동사자가 많던 초창기 시절.
쉬이 생의 불꽃이 꺼지고 마는 것은 생후 백일도 안된 아기들이었다.
연약한 싹이 견디기 힘든 날씨였으나, 어떤 아기들은 더러 잘 견뎌내기도 했다.
여기에 어떤 연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어느 선대.
그는 이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끝내 알아낼 수 있었다.
아케랑코를 물 대용으로 꾸준히 섭취하면 추위를 잘 견뎌내는 체질이 된다는 것을.
그때부터 뷔트시겐에서는 아케랑코의 번식에 많은 힘을 쏟아부었다.
그 시작점이자 성공점이 바로 이 플로나 마을이다.
대를 이어 관리자로 살아온 촌장의 얼굴에는 긍지와 자부심이 넘쳤다.
어린싹은 곧 뷔트시겐의 앞날.
그럴지니 그들을 살린다는 것은 뷔트시겐을 살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아케랑코는 우리의 크나큰 전력 중 하나이지요.”
끄덕끄덕.
이안과 리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격한 흔들림에 옅은 미소를 내어 보인 촌장은 재차 꽃을 매만졌다.
“하여 잘 지켜내야 하는데…… 아케랑코 자체가 조금 특이한 녀석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손길만으론 잘 자라지 않고, 사향 표범이 필요하니까요.”
“사향 표범의 똥을 거름으로 써야만 마력량을 올려주는 아케랑코가 피지 않습니까.”
“예. 하여 사향 표범과 공존을 택한 거지요. 그것들이 아케랑코를 먹으려 주변을 알짱거리니 똥을 구하기는 쉬우니까요. 한데 문제는…….”
“사향 표범이 아케랑코 꽃에 환장하다는 것이지요.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씨를 말려버리니.”
나무를 살리기도 망치기도 하는 사향 표범과의 공존.
그것은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치밀하게 진행된다.
우선 수확철.
수확을 해야 1년을 나지 않겠는가.
해서 이 시기에는 사향 표범을 뷔트시겐의 경계선까지 쫓아낸다.
이때만큼은 굳이 거름이 필요치 않으니까.
사향 표범을 쫓아낸 몇 달 후면 다시 표범들이 돌아온다.
암컷이 새끼를 밴 채로 말이다.
이때를 휴식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그들이 아케랑코를 섭취하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
그들이 새끼를 낳고 후대를 잇는 것이 뷔트시겐으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에.
오히려 새끼가 죽어버릴까 봐 말린 꽃을 던져주며 공동 육아를 한다.
이렇게 공존한 지 천 년.
지금은 수확철이라 사향 표범이란 마수를 멀리 몰아낼 때였다.
이것이 이안을 포함한 생도들이 맡은 임무였다.
* * *
촌장과의 대화를 끝마친 후.
이안은 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리오에게 말을 걸어볼 심산이었는데.
“……응? 왜 이렇게 시끄럽지?”
의문을 품은 이안은 소란이 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다다른 소란의 중심지.
뭣 때문인지 내정자와 C반 아이들이 갈라져 대치하고 있었다.
촌장과 얘기를 나누러 갈 때만 해도 데면데면했을 뿐인지 험악하지는 않았는데.
“그러니까 우리보고 한쪽에 찌그러져 있어라?”
웬만하면 화내지 않는 레브의 말투가 날카롭다 못해 까칠했다.
“괜히 어쭙잖은 실력으로 나대지 말고 짐꾼 노릇이나 하면서?”
단 두 마디만으로 상황이 짐작이 갔다.
단체 임무라서 협력을 해야 하는데 내정자들 쪽에서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신들의 실력만으로 충분히 끝낼 수 있다 여기는 것일 터.
‘하여간 어딜 가나 이놈의 텃세가 문제야.’
거기다 출신은 왜 이렇게들 따지고 드는지.
망할 학연에 지연에 혈연은 반드시 없어져야 할 것들이었다.
눈썹을 구긴 이안은 성큼성큼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건조한 눈빛으로 원흉인 니콜라스는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