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일단 단체 임무니까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다 같이 협력을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래서 뒤로 빠지라 정중하게 제안을 한 겁니다.”
“제안?”
“도련님은 모르시겠지만, 저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서 연계에 능숙합니다. 전투에 들어가면 어떤 진형일 때 누가 선두가 될지, 후미가 될지 말하지 않아도 일사천리로 이뤄지죠.”
“아하. 우리가 끼어들면 그 진형이 흐트러진다?”
“어설픈 힘을 지닌 자들이 끼면 아무래도 진행이 더뎌지고, 그럼 서로 불편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자칫 그쪽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결국 우리가 보호하지 못한 탓이 될 테고요.”
“흠.”
그럴싸했다.
보기에는 그런데 결국 ‘너희 실력을 못 믿겠다.’였다.
대등하다 여겼다면 저런 소리를 하지 않았겠지.
힘의 논리를 들먹이며 이쪽을 명백하게 낮잡고 있었다.
“어째 말하는 게 2장로님을 똑 닮았네.”
이안이 2장로를 언급하자 니콜라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할아버지는 왜 여기서 들먹이냐는 거였다.
심기가 불편해진 니콜라스의 상태가 어떻든 알 바인가.
이안은 아이들의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줄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임무 때마다 잡음이 생길 테니까.
“상당히 우릴 맘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럼 나도 정중한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이요?”
“사향 표범의 대장 일곱 마리를 먼저 생포하는 쪽이 모든 결정권과 발언권을 가지자고.”
“그건 한쪽에게 너무 기우는…….”
“왜, 이쪽이 기운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러니 하는 말이다. 만약 너희가 낮잡는 우리가 이기면 어찌 될까.”
“…….”
“그 자만심을 다신 내비칠 수 없겠지.”
이안은 내기를 받아들일 거냐고 물으며 고개를 삐뚜름하게 꺾었다.
이에 니콜라스가 그의 곁에 붙어있는 생도들을 쳐다보았다.
말 없는 시선들이 분주히 오간 후.
니콜라스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저희야 뭐.”
“아, 하나 더.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이안은 조곤조곤함을 유지한 채로 상체를 숙였다.
니콜라스와 확 좁혀진 거리감.
흠칫 놀란 니콜라스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치려던 때, 이안의 평이한 음색이 그의 발을 잡아챘다.
“내기의 승패와 상관없이 다신 그딴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무슨…….”
“내 친우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니콜라스 발르와.”
대화 내내 거론된 우리와 너희.
C반이란 범주 아래 우리로 묶인 그들과 내정자를 일컫는 너희.
이안의 발언에 니콜라스와 내정자들은 바싹 경직되었다.
이안이 나눈 마음의 경계선이 지독하게 잘 보였기 때문.
이 때문이었다.
줄곧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오는 씁쓸하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 * *
힘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내기라…….
니콜라스는 눈매를 좁히며 이안이 떠난 자리를 응시했다.
“리오, 궁금하지 않아?”
상황이 참 재밌게 굴러간다는 눈빛이 다소 오만해 보였다.
이미 승패가 정해졌다고 확신하니 괜히 상대의 전력이 궁금해진 것일 터.
니콜라스의 머리통에 든 생각이 빤히 보여서 리오는 인상을 구겼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사향 표범의 대장을 찾으러 가자.”
“나는 궁금한데. 도련님이 어떻게 사향 표범을 생포하는지.”
“니콜라스.”
“왜에? 너는 몰라도 다른 녀석들은 나랑 같은 생각일걸.”
니콜라스는 언제나 저의 의견에 동조하는 무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몇 년을 붙어있었는데 니콜라스의 의중을 못 알아챌까.
시선을 받은 소년들이 원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다른 생도들을 부추겼다.
“도련님이 어찌하나 잠깐 보고 가도 늦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설렁설렁한다고 그쪽이 얼마나 앞서가겠어. 엄연히 등급 차가 존재하는데.”
“정 안 되면 보고 있다가 그쪽이 곤란해질 때 도와주지 뭐.”
선동의 결과.
소년들 모두가 니콜라스를 뒤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리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심 이안의 전투 방식이 궁금해서 니콜라스를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망아지 같은 선동자와 내정자들은 마을 밖으로 내달렸다.
눈보라를 뚫고 한참 설원을 내달렸을 무렵.
“저깄다.”
앞서서 가던 니콜라스가 멈춰 서더니 전방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리오의 시선이 매끄럽게 따라갔다.
눈밭에 흩뿌려진 비릿한 핏자국들.
그것이 끝나는 지점에 이안이, 그의 무리가 등등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전방의 사향 표범 무리와 대치 중이었다.
“아까처럼 공격 위주로 갈 거니까 부채꼴 진형을 유지해.”
이안의 명이 떨어지자마자였다.
올리브를 비롯한 발리올이 선두를 맡았고 뒤이어 루하흐들이 뭉쳤다.
치유를 맡은 레브는 후미였다.
“치유는 레브에게 맡기고 밀고 들어가.”
“접수했어, 대장.”
루하흐들이 보낸 신호에 물의 정령들이 액체화되었다.
그 뒤 얼어붙은 땅으로 스며들어 일대의 대지를 질척질척하게 만들었다.
습해진 땅.
그 위에서 이안은 끊임없이 바람을 일으켜 액체화를 확산시켰다.
“이만하면…….”
질퍽질퍽함이 거의 늪 수준이었다.
그에 따라 내달리던 사향 표범들이 찰진 땅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푹푹 잠겼다.
잠시나마 발을 묶어둔 셈.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사향 표범들이 늪지를 벗어나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하니까.
슈아아아악.
이안이 보내오는 바람결에 액체화된 물의 정령들이 제 몸을 얼리기 시작했다.
꽝꽝 얼어붙은 대지.
탈출하려는 몸부림까지 차단당하자, 사향 표범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우우우우.
그들이 목울음을 토해내자마자 묘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 향은 나른했다.
조금 맡는 것만으로도 눈꺼풀이 감기며 졸음이 쏟아졌다.
‘낙조의 황홀.’
향을 미량만 흡입해도 며칠 푹 자게 된다.
딱히 몸에 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흡입하는 양이 많아지면 사정이 달라진다.
세상모르고 몇 년간 잠을 자게 될 수도 있다.
더 무서운 것은 1분 30초 이상 맡게 되면 황천을 건너게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대열이 향기로 인해 허물어지려 하자.
“얘들아, 냄새부터 차단해.”
이안은 지체하지 않고 바람의 벽을 넓게 펼쳤다.
동시에 대지의 벽이 이안 무리를 단단하게 감쌌다.
“다음은 창의 감옥.”
츠즈즛.
이후 벽에서 돋아난 무수한 물의 창들이 비산했다.
그것들을 예쁘게 모아 이안은 정확한 지점에 내리꽂았다.
대지의 원소에서 갈라진 물의 원소, 물의 원소를 규합하는 바람 원소.
‘연계가 능숙하다.’
이안 무리의 전투를 지켜보다 리오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았다.
같은 원소도 아니고 하물며 각기 다른 원소였다.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으면 절대로 융합을 이룰 수 없는.
자칫 잘못 섞이기라도 했다간 원소 간의 반발로 폭발이 일어나기 십상인.
한데도 저들은 최소 10년 이상은 합을 맞춰본 것처럼 연계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고작 1년을 함께 보낸 게 다일 텐데.’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라 리오는 조금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 * *
사향 표범의 대장 격인 마수 일곱 마리 생포하기.
서로의 자존심을 건 내기는 결국 이안 일행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에르그 2성인 우, 우리가 페이라조한테 졌다고?>
믿을 수 없다며 웅얼거리는 니콜라스의 표정이 어찌나 고소하던지.
소화제를 마신 것처럼 속이 뻥 뚫렸었다.
그 사실을 안줏거리처럼 씹으며 이안 무리는 한곳에 자리를 잡았다.
내기는 끝났지만, 아직 임무가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쉴 수 있을 때 쉬어둬. 이제 곧 우두머리가 있는 굴이 열릴 테니까.”
“저기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 언덕에서 나온다 했나?”
“어. 달빛이 제일 센 시간에 나와.”
“우두머리가 셋이니까 조를 짜야겠네.”
이안은 이런저런 설명을 하다가 턱을 성기게 문질렀다.
세 개의 굴 중 중앙에 있는 굴, 그곳에는 혼자 가야만 했다.
거기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
그리고 그 일에는 무척 순수한 불의 원소가 필요했다.
“중앙의 굴은 나 혼자 갈게.”
“혼자? 괜찮겠어?”
“어. 문제없어.”
이안을 흘끗 본 레브는 더 캐묻지 않았다.
뭔가를 획책하고자 할 때만 나오는 이안의 눈썹 꺾기.
그 특유의 꺾임으로 보아 또 혼자서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머지 우두머리는 나랑 올리브가 알아서 잡을게.”
“그래. 우두머리 표범의 약점이 불이니까 가지고 온 화염 구슬 잘 쓰고.”
“알았어. 걱정하지 마.”
미리 준비한 터라 회의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점검을 끝낸 이안 일행은 몇십 분을 더 쉬다가 길을 나섰다.
목표는 우두머리 사향 표범이 나온다는 플로니아 언덕.
날씨가 좋지 못해 발밑이 푹푹 꺼지는 눈밭을 얼마쯤 걸었을까.
어느새 언덕인지 작은 산인지 모를 초입에 도착했다.
언덕은 봉우리 부분의 땅이 푹 패여서 뒤집힌 모자 같은 구조였다.
기껏 꼭대기까지 올라가도 다시 패인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뜻.
우두머리가 패인 곳 중앙의 굴속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찢어지자.”
“조심들 해라.”
“아, 레브. 이따가 내가 찾아갈 테니까 할 일이 끝나도 첫 번째 굴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 알았어.”
이안 무리는 길게 말을 늘이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헤어졌다.
첫 번째 둥지는 레브 무리가, 두 번째는 이안이, 세 번째는 올리브 무리가.
처리해야 할 몫을 정한 뒤 봉우리를 올라 각자의 굴 안으로 들어갔다.
“……꽃 냄새.”
아케랑코 꽃에 환장하는 사향 표범 아니랄까 봐 굴 안에서도 꽃향기가 진동했다.
그 탓에 있지도 않은 꽃나무가 환상처럼 보였다.
정신이 몽롱해질 것 같은 냄새를 들이켜며 걷길 한참.
[이안, 여기서 그것을 얻으려는 거지?]
녹스가 8살 꼬마의 모습으로 말을 걸어왔다.
재잘거리는 음색처럼 녀석의 걸음걸이 또한 통통 튀었다.
발랄한 모양새에 이안 역시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어. 두 번째 둥지에 있는 곡옥. 그게 있어야 첫 번째 굴의 비밀 문을 여니까.”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럼 스승님 이번에도 한바탕 즐겁게 놀아 보실까요.”
둘은 가뿐하게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두머리 사향 표범이 보일 때까지.
* * *
우두머리 표범은 다른 사향 표범과 비교해 무척 컸다.
흔한 표현으로 집채만 하다고 하는데 거기에 걸맞았다.
몸집에서 오는 위압감도 위압감이지만 지능이 뛰어난 마수답게 풍겨오는 기운이 남달랐다.
군청색 동공에서 현기가 넘쳐난달까.
아무리 멋들어진 마수라도 계속 넋 놓고 감상할 순 없는 노릇.
이안은 곧장 공격 신호를 녹스에게 보냈다.
“녹스, 서풍의 미소.”
신호가 떨어진 즉시였다.
녹스가 미끈한 몸짓으로 우두머리를 향해 서풍의 미소를 쏘았다.
푹. 푸욱.
우두머리의 발치에 깃털이 꽂히며 거세게 회전했다.
그로 인해 마찰열이 발생하며 무색무취의 불길이 확 솟구쳤다.
크르륵.
불길이 턱밑까지 닿자 언짢아진 우두머리가 군청색 꼬리를 추켜 올렸다.
꼬리에서 나는 파지직 소리.
그 즉시였다.
콰르릉, 군청색 벼락들이 무질서하게 사방으로 낙하했다.
아슬아슬하게 이안의 옆으로 스치며 내리꽂힌 벼락.
그것은 얼어붙은 땅을 움푹 덜어내고서야 사그라들었다.
잘못 맞았다가는 노릇하게 구워진 물고기구이가 될 판이었다.
[오호. 과연 우두머리답구나.]
호승심이 타오른 건지, 단순하게 신이 난 건지.
펑. 퍼엉.
벼락 세례에 녹스는 물 만난 고기처럼 서풍의 미소를 시전해댔다.
생포가 목적이라서 일부러 발치 위주로 공략했다.
‘우두머리의 발밑에 있는 저 진을 꺼트려야 해.’
진이 꺼지면 우두머리가 맥을 못 추기 때문에 그때 생포하면 된다.
이안은 우두머리의 발밑으로 시선을 끌어내렸다.
네 개의 발이 밟고 있는 진.
그것은 우두머리가 일정량의 타격을 받을 시 꺼진다.
그리고 네 개가 다 꺼지면 우두머리는 한동안 회복을 위한 잠에 빠져들게 된다.
진과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도 마찬가지.
하여 우두머리 사향 표범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이 습성으로 인해 우두머리를 상대하는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무작위 공격.
그렇다 하더라도 전투 시에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
화르르륵.
이안은 새하얀 불꽃을 피워낸 뒤 우두머리를 향해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사냥개를 보며 눈을 실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