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64화 (164/214)

제164화

“코르키, 달빛 가르기.”

[캬아앙.]

이안의 지시를 기다렸다는 듯 사냥개가 은색 꼬리를 휘둘렀다.

그러자 짧고 뭉툭하던 꼬리가 길고 풍성하게 일렁거렸다.

촤아아악.

흡사 채찍을 휘두르는 것 같은 파공음이 동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 울림이 닿은 불꽃은 삽시간에 크기를 키우며 불덩이로 변했다.

달빛 가르기로 인해 기술이 ‘증폭’된 것.

쇄애애액.

이안은 거대해진 불덩이를 연속으로 우두머리 표범에게 쏘아 보냈다.

그것이 옆구리를 강타하자 군청색 털이 구불구불 탔다.

“털만 타고 살가죽은 생채기조차 안 난다.”

[겉가죽이 손바닥 열 개를 겹쳐 놓은 것처럼 두꺼워서 그렇지 않누.]

“거죽 두께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뭐 그렇다 해도 저놈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니.]

어차피 진을 꺼트리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니 그저 끊임없이 공격하면 그만이었다.

불덩이에 증폭을 덧대 유효타를 입히고, 우두머리가 벼락으로 공격해 오면 피하고.

무한으로 반복되는 공방이 이어졌다.

그 사이 진이 두 개나 꺼졌기 때문일까.

아우우우우!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우두머리가 하울링을 하며 내달렸다.

목구멍에서부터 내뱉어진 파동은 놈의 주둥이가 벌어지는 방향대로 뻗어갔다.

촤아아아악.

그 결을 따라 두터운 얼음길이 녹스의 앞발까지 삽시간에 들이쳤다.

[어후야, 저것에 닿지 마라. 3초만 밟고 있어도 얼음 동상이 될 거다.]

“3초면 회피도 쉽지 않겠다.”

이안과 녹스가 구시렁대며 얼음길을 살피던 그때.

콰지직.

우두머리 표범이 이빨을 드러낸 채 얼음길에 벼락을 내리꽂았다.

이에 산산이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튀어 오르며 주변의 공기도, 돌도 얼려버렸다.

얼음길과 벼락.

두 개의 연계기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후우.”

상체를 비튼 이안은 벼락과 거리를 최대한 벌렸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줄 알았는데, 사냥꾼을 피했더니 사자를 만난 격이라.

공격을 피해 발을 디딘 곳이 하필 얼음길 옆이었다.

자칫하면 큰일 날뻔했다.

사라지지 않고 여기저기 산개해 위험 요소로 남은 얼음길.

저게 많아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슬슬 승부를 봐야겠는데.’

이런 싸움은 길게 끌어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

-녹스, 춤추는 비를 시전하면 내가…….

이안의 속살거림을 들은 녹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하자는 동조를 내비친 뒤.

슈슈슉.

녹스가 입김으로 토해낸 푸른 불길을 거칠게 발사했다.

우두머리 쪽으로 날아간 불길은 놈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다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놈을 촘촘히 에워쌌다.

그륵.

불길이 거치적거리자 우두머리가 그것을 불러낸 녹스에게 곧장 돌진했다.

몇 번이나 반복된 얕은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 돌진이지 거의 순간이동에 가까운 박치기였다.

“코르키, 증폭.”

[캬앙.]

푸른 불길이 사냥개의 기술과 융합되자 또 한 번 변형을 일으켰다.

뭉친 불길은 질척한 용암처럼 불똥을 뚝뚝 떨궜다.

불똥이 빗방울처럼 줄기차게 내리자 우두머리가 불비를 피하려고 몸을 연신 뒤틀었다.

놈의 신경이 불비에 쏠린 즉시.

이안은 공중을 박차고 튀어 올랐고, 그 뒤 녹스의 날개를 밟고 한층 더 솟구쳤다.

어느덧 우두머리 표범과 같아진 눈높이.

그는 불의 칼날을 쥐고 민첩하게 우두머리의 이마 정중앙을 내리그었다.

캐애애애앵!

지독한 화상을 입은 탓에 놈이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통을 마구 흔들며 비틀대는 게 생포할 기회였다.

.

.

.

우두머리 사향 표범을 생포한 직후.

이안은 놈이 앉아있던 곳의 지면을 살펴보았다.

“있다.”

반들반들한 비석이 교묘하게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비석의 중앙에는 군청색 곡옥이 박혀 있었다.

‘이쁘게 자리해있군.’

애초 이것이 목적이었기에 이안은 곡옥으로 손을 뻗어 살짝 힘을 줘봤다.

역시나 안 빠진다.

“이걸 빼낼 방법은 따로 있지.”

괜한 짓 한번 해본 그는 즉각 손바닥에 하얀 불꽃을 피워냈다.

순수한 불.

이를 사용해야만 곡옥을 획득할 수 있다.

그래서 혼자 온 것이고.

이안은 불순물 없는 하얀 불꽃을 곡옥에 가져다 대며 빙긋 웃었다.

“레브 그 녀석이 좋아하겠다.”

* * *

두 번째 굴에서 곡옥을 얻은 후였다.

이안은 레브가 있는 첫 번째 굴로 발길을 옮겼다.

굴은 텅 비어 있었다.

우두머리 사향 표범도 없고, 그것을 같이 잡았을 아이들도 없었다.

아마 제가 레브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한 것 때문에 다들 눈치껏 비켜준 것 같다.

“여, 레브.”

“기분이 좋아 보이네.”

“오늘 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

레브가 의문을 표했지만 이안은 대꾸 대신 녀석의 팔목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거기에 있는 팔찌를 보는 거였다.

암흑 속성의 부작용을 억제하는 빛의 정령서까지 짜 넣은 팔찌.

한데…….

‘중앙 부분이 벌써 까맣게 변색 됐군.’

정령서의 효력이 다해가는 것이다.

그를 새삼 확인한 이안은 공동 제일 깊숙한 곳을 향해 가며 레브에게 말을 건넸다.

“레브 오늘 어땠어? 다중 치유를 계속 썼잖아.”

“처음엔 괜찮았는데 나중에는 머리가 쿡쿡 쑤시더라.”

“두통이 생겼다는 건 다중 치유를 자제해야 한다는 신호인데.”

“그래서 팔찌를 새로 하나 장만해야겠다 싶더라고.”

“흠. 그것도 지금처럼 얼마 못 갈 텐데.”

“어쩔 수 없지. 이건 직계의 고유 기술이 가진 고질병이라 어차피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거니까.”

“…….”

루하흐의 고유 기술인 밤의 장막과 다중 치유.

암흑 속성인 이 기술은 사용할수록 시전자의 정신을 갉아먹고 종내는 미치게 만든다.

극강의 기술이나 실로 극악한 단점을 지닌 기술.

그나마 다행이라면 기술의 문제점을 보완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빛의 정령서가 부작용을 상쇄해주긴 하지.’

물론 이 방법도 몇 번의 교체를 거치다 보면 효력이 약해지고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런 임시방편 말고 완전한 해결책이 필요한 상황.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빚의 정령과 결속을 맺어야 하는데…….”

“빛의 정령은 좀체 찾기 힘들지.”

빛의 정령이 줄어들며 다중 치유든 밤의 장막이든 맥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격세 유전이라 발현하는 자도 드문데 말이다.

그 사실이 심란해서 레브는 팔찌만 계속 문질러댔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새 공동 제일 깊숙한 곳에 다다랐다.

막다른 길.

그곳에 서서 이안은 석벽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돌의 미끈한 질감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 감촉이 주는 결대로 나아가다가 그의 손이 석벽의 한 가운데에서 멈췄다.

중앙의 굴에서 얻은 곡옥, 그 모양대로 파여 있는 홈에서.

그 모양을 확인한 이안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근데 말이야. 내가 누구냐. 남들이 못 찾는다고 나까지 못 찾을까.”

그럴 리가.

이 석벽 너머에 있다.

레브가 고유 기술을 걱정 없이 쓸 수 있는 방법이.

득의만만한 기세로 이안은 울퉁불퉁한 홈에 곡옥을 끼워 넣었다.

달칵.

그러자 딱 들어맞게 곡옥이 자리를 잡으며 맑은 광채를 흩뿌려댔다.

열쇠는 끼웠지만, 석벽이 열리려면 과정 하나가 더 필요했다.

이안은 곧바로 손바닥에 불을 띄웠다.

화르르르륵.

손바닥에서 석벽으로 옮겨붙은 하얀 불은 끊임없이 타올랐다.

실로 사나워 전부 집어삼켜 버릴 것 같은데도 이안은 불의 몸집을 더 키울 뿐이었다.

이렇게 해야 곡옥이 열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테니까.

한데…….

‘이 정도로는 부족하단 건가.’

줄기차게 가열해도 여전히 곡옥은 빛만 뿌릴 뿐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이 석벽을 태우고 석벽 안의 비밀을 까발린 불.

플로나 마을을 뒤덮었던 불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녹스.”

도와달란 이안의 요청에 녹스는 기꺼이 입김을 불었다.

순수한 불에 불이 더해지니 기세가 흉포해졌다.

먹잇감을 통째로 짓이기는 짐승 같달까.

포효하는 불길.

그에 곡옥에서 뻗어나간 빛줄기가 석벽을 조각조각 내더니 급기야.

“……열렸다.”

“…….”

이안은 눈을 홉뜬 레브의 등을 떠밀며 석벽 너머로 발을 디뎠다.

볼을 부벼오는 공기가 여름 한낮 같았다.

약간의 후텁지근함을 만든 장본인.

새근새근 단꿈을 꾸고 있는 빛의 정령에게로 둘은 다가갔다.

정확히는 이안이 어리바리한 레브를 잡아끌다시피 한 거지만.

“빛의…… 정령.”

인간으로 치자면 열두 살?

그 정도 되는 소녀가 몸을 둥글게 만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인간형이었으나 쫑긋한 귀가 있었고 엉덩이에는 꼬리가 달려있었다.

그것도 아홉 개나.

흡사 여우 수인을 닮은 생김이었다.

“이 녀석이면 레브 네 문제는 해결됐네.”

“빛의 정령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그런 거까지는 알려고 하지 마. 비밀이니까.”

이안은 장난스레 손을 내저었다.

어떻게 알긴.

지난 생에 이 플로나 마을이 화재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방화범은 사냥개인 라이라프스였다.

그놈이 방화를 저지른 게 누구의 명이었겠는가.

살리카 가주 그 작자 말고는.

‘여기가 그자의 표적이 된 건 아케랑코 홍차 때문이었지.’

마력량을 올려주는 그것이 전쟁 때 뷔트시겐의 전력이 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저지른 만행이었다.

플로나 마을이 한순간에 잿가루가 된 후.

핏물이 시커멓게 말라붙은 땅에 남겨진 건 딱 두 가지뿐이었다.

이 비밀공간과 빛의 정령.

이안은 과거를 더듬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빛의 정령도 대면했겠다 이제 이곳에서 처리할 일도 딱 하나 남았네. 쥐새끼 잡기.”

* * *

이안이 뜻 모를 소리를 한 지도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

그 사이 플로나 마을에서 생도는 물론 정령 기사들도 모두 철수했다.

사향 표범을 경계선 밖으로 쫓아냈기 때문.

그렇게 조용해진 플로나 마을을 표표히 비추는 보름달 뜬 밤.

츠스스슷.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땅에 허겁지겁 뭔가를 그렸다.

이따금 어둠이 걷힐 때만 보이는 무엇, 그것은 술식이었다.

술식을 재빠르게 완성한 그림자는 순찰대가 올 새라 무언가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언어가 밖으로 나올 때마다 단출한 술식도 서서히 빛을 발했다.

화아아악.

섬광탄처럼 터진 빛에서 붉은 머리카락들이 어른거렸다.

총 열 명의 살리카.

그들 중 가운데 있는 남자가 술식, 아니 이동진을 그린 그림자의 어깨를 쥐었다.

“수고했다. 보상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저는…….”

막 대화가 시작되려는 참.

푸드득.

새의 날갯짓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어쩐지 불길한 소리였다.

미간을 구긴 남자는 안력을 돋아 어둠을 꿰뚫어 보려 했다.

그의 노력 덕분일까, 아니면 그의 불안을 부추기려는 걸까.

허공에서 마법등 하나가 빛을 발했다.

“!!”

찰나의 광휘 속에 남자는 똑똑히 보았다.

청백색 거대한 새와 늑대의 등에 날개가 달린 문양의 정복을.

‘히루푸스!’

자신들이 발각됐음을 깨닫자마자 남자는 지체하지 않았다.

“잡혀선 안 된다!”

명을 내린 남자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자결하려 했다.

가슴팍을 쳐서 마력핵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남자의 손이 심장께에 닿으려던 차 서늘한 뭔가가 날아들었다.

비소를 꼬리처럼 달고서.

“너희 같은 놈들의 종특이지. 죽음이 명예인 줄 아는 거.”

“끄아아아악!”

서늘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손목이 잘린 팔만이 남겨졌다.

솟구친 피는 남자를 적시며 비릿한 혈향을 풍겨댔다.

남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

“전부 생포해.”

비소의 주인공이 명하자마자 어둠을 뚫고 사슬이 날아들었다.

촤륵. 촤르륵.

사방에서 날아든 마력 구속구는 열 명의 살리카를 손쉽게 제압했다.

기습하려다 되레 기습에 당한 그들이 자결을 시도한 몇 초 사이.

“어디 쥐새끼들이 감히.”

달을 가린 구름이 서서히 걷히며 비소의 주인공이 드러났다.

이안이었다.

그는 살리카들에게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허리를 굽혀 살리카를 불러들인 그림자, 아니 중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플로나 마을의 참변.

마을에 살던 자들이 8할 넘게 도륙당했던 사건.

영지 내에 있는 아케랑코 나무의 7할 소실.

뷔트시겐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던 사건의 시작을 여는 자.

그런 자치고는.

“참 흔하게 생겼군. 스쳐 지나가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흔하게.”

“저,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뇌를 빼고 다니시는 모양이야. 그러니 뷔트시겐인데도 살리카가 시키는 대로 가족이며 이웃을 도륙하는 데에 동참한 거겠지.”

“끄윽. 투전판에서 만난 저 망할 새끼들이 절 협박해서…… 그저 살고 싶어서…….”

퍼억.

이안은 변명을 더 듣지 않고 남자의 턱주가리를 날려버렸다.

“꾸엑!”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른 남자가 게거품 물며 기절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쁜 놈의 같잖은 사연을 알아 뭐할까.”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굽은 상체를 편 이안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손목이 잘린 살리카 한 명, 신체가 구속당한 살리카가 아홉.

이들을 잡기 위해 마을을 떠나는 척했던 정령 기사와 생도들.

그리고 불타지 않은 플로나 마을.

어느 하나 다치거나 손상되지 않고 말짱했다.

이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전의 참변이 되풀이되지 않았다는 증거.

비로써 안도감이 든 이안은 콧잔등을 실룩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