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가주의 집무실.
알란은 그 안으로 들어서며 가주에게 짧게 묵례를 했다.
숨 죽은 듯 조용한 분위기가 팽팽하게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이에 알란이 미동을 하지 않자 가주가 눈짓을 보냈다.
잠깐 소파에 앉아있으라는 신호.
알란은 소리 없이 착석한 후 가주와 칼브란에게 시선을 두었다.
“떠돌이 약제사 무리에게서…….”
칼브란의 음색은 무척이나 은밀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은밀한 손길로 크리스털 병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염색약을 구했습니다. 우선은 반년 치입니다. 달에 한 번씩 복용하라고 했습니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도련님을 위한 것인데 이 정도는 수고랄 것도 없지요.”
염색약?
알란은 대화를 듣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에로스 제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것이 바로 염색약이다.
왜냐.
머리카락의 색깔이 곧 소속과 자질을 나타내기 때문.
오히려 다들 드러내려고 안달이지 감추려고 하는 자는 없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세작들이나 가문에서 쫓겨난 추방자들이 사용하지.’
어떻게든 신분을 감춰야 하는 자들이라 기를 쓰고 염색을 한다.
이로 인해 염색약은 범죄자들이나 손을 대는 것이라는 인식까지 있다.
‘한데 왜 도련님이 그걸?’
알란의 머릿속에서 똬리를 튼 의문이 무섭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를 알아챈 것일까.
칼브란과의 대화를 일단락 지은 가주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알란.”
“예, 가주님.”
“그대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니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이안이…….”
가주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
그것은 알란이 혼자만 알고 있다 여겼던 수호자에 관한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가주에게 보고를 해야 했던 그것.
단 한 번도 원칙을 어긴 적 없던 알란은 그때 함구를 택했었다.
불충인 줄 알면서도 그랬던 건 비밀을 지키겠다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가주님께서는 그것까지도 다 알고 계셨군.’
그뿐일까.
가장 지척에서 이안을 보호한 저조차 몰랐던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그 힘 때문에 도련님의 머리카락 색이 변한다는 겁니까?”
놀란 알란은 눈을 홉뜬 채 목소리를 키우고 말았다.
그의 반문에 쐐기를 박으려는 것처럼 가주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는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이지.”
“…….”
“그러니 수습 기간이 끝나고부터는 항시 잘 살펴야 할 터.”
“하면 가주님, 모든 일을 원칙대로 해도 되는 것입니까.”
“이미 내 뜻을 전했음이니.”
“그 말인즉슨 혹여 비밀을 캐려는 자가 있으면 쓱싹하라 이 말씀이군요.”
“차후는 그대의 판단에 맡기겠다.”
“알겠습니다. 알란 유피테르, 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알란은 어긋남 없이 행하겠단 뜻으로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의 몸놀림을 따라 빛이 각도를 달리하면서 가슴팍 부근의 무언가를 돋보이도록 만들었다.
“한데 알란.”
“예, 가주님.”
가주는 그 무언가, 알란의 가슴팍에 달린 황금 가지를 쳐다보았다.
영롱하기 그지없는 찬연함 때문인지 절로 눈길이 갔다.
생도 시절에 받았던 것을 이제 와 차고 다니는 연유라면 아마도.
“생도들의 교관직을 맡더니 그걸 다시 착용한 건가.”
“아.”
“관리를 참 잘했나 보군. 광채가 여전한 걸 보면.”
“크흠.”
가주의 예리함에 알란은 헛기침을 하며 일단은 표정 관리를 했다.
도련님이 제게 하사한 황금 가지.
이것의 내력을 알게 되면 과연 가주님이 저렇게 점잖은 반응을 보이실까.
절대 아니었다.
아마 저를 생으로 잡아먹으려 들겠지.
가주는 자신을 속이는 건 봐줄지언정 이안의 사랑을 뺏기는 건 못 참으시는 분이니까.
결과가 선한데도 알란은 은근슬쩍 자랑이 하고 싶어졌다.
참으려고 허벅지까지 무작스럽게 꼬집은들.
목구멍이 자꾸 간질거려와 결국 잇새로 말이 토해지고 말았다.
“이건 제 것이 아닙니다.”
“으응?”
“도련님께서 제게 주셨습니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반대편에 태풍을 만드는 격이었다.
알란이 가슴팍에 힘을 주며 투척한 한 마디.
그것은 짱돌이 되어 가주는 물론 칼브란의 마음에 내던져졌다.
그리하여 급기야.
‘희번덕’이라는 소리가 날 만큼 두 사람의 안광이 형형해지고 말았다.
‘그 귀한 것을 네놈한테 줬다고?’
진정 그 말이 사실이냐고 되묻는 눈빛에는 ‘아니어야 할 것이다’라는 강요가 담겨 있었다.
믿고 싶지 않단 일종의 부정 단계였다.
“황금 가지를? 평생에 한 번밖에 못 받는 것이라 가보로 물려주는 그것을?”
“예.”
“죽어서 더러 부장품으로 묻기까지 하는 그것을?”
“예에.”
가주의 되물음이 반복되자 알란은 얄궂은 미소를 내보였다.
자꾸 저러니 그만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가주에게 농을 걸어보겠는가.
자고로 기회는 왔을 때 낚아채야 하는 법.
“이것을 제게 건네시며 도련님께서 눈물을 글썽거리셨습니다. ‘알란, 너의 존재는 나에게 빛과 소금이야.’라는 말을 하시면서.”
물론 이안은 그렇게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말이라는 건 언제나 그렇듯 화자보다 청자가 중요하다.
듣는 사람이 그리 들었다면 그런 것.
알란은 과대 포장을 하며 개구진 투로 살살 약을 올렸다.
화르르 불타는 가주의 반응 덕에 어찌나 혓바닥이 잘도 돌아가는지.
“언제나 제가 있어 든든하시다며…….”
“든든하다며?”
말꼬리를 잡는 가주의 음색에는 약간의 조바심까지 담겨 있었다.
이안이 어떤 말을 했는지 모조리 캐내겠다는 심산.
저를 제치고 알란이 간택 당한 이유를 알아내야 알란을 밀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빤히 보이는 가주의 속내에 알란은 푸들거리는 턱을 거만하게 치켜들었다.
불난 집에 장작을 던지는 격이랄까.
“어찌나 절절하게 마음을 표하시던지, 듣고 있던 제가 다 울컥할 지경이었습니다”
알란은 주절거림을 끝내고선 황금 가지를 쓰윽 문질렀다.
타고 있는 장작에 제대로 기름을 붓는 손놀림.
그에 두 사람은 부정의 단계를 넘어 눈이 홱 돌기 직전의 단계에 돌입했다.
광인처럼 번뜩이는 4개의 동공.
‘저 동공이 사고 치기 전에.’
자고로 사람은 치고 빠질 때를 잘 알아야 하는 법이다.
“어이쿠, 가주님. 저는 수련을 하러 가봐야겠습니다. 도련님의 마음에 보답해야지요.”
자랑질인지, 염장질인지.
두 사람의 속을 벅벅 긁고서는 순식간에 알란의 형체가 흐려졌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다시 나타난 건 고양이의 등 위였다.
집무실 창밖에 있는 고양이의.
신속한 탈주였다.
그 뒤 알란은 가주와 칼브란에게 아주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주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중한 인사마저 약 올리는 것처럼 보인다면 억측일까.
안전거리 확보 후.
알란은 두 사람, 아니 여태 말이 없던 칼브란을 약 올리듯이 황금 가지를 흔들었다.
“하하핫.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집사장님.”
“저, 저.”
“조금 더 분발해 보십시오. 그럼 저처럼 될 수 있으실 겁니다.”
“알란!”
2장로에게 한 마디를 안 지는 성미는 어디 안 간다.
기어이 칼브란이 이를 득득 갈도록 만들며 알란은 잽싸게 도망을 쳤다.
지금 잡히면 황금 가지를 뺏길지도 모르는 일.
꽁지가 보이지 않게 도주하는 알란처럼 시간도 그러했다.
쏜살같이 흘러갔다.
하루, 이틀…… 나흘, 엿새, 그렇게 보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 * *
워프 게이트 처소 앞.
이안은 정복을 각 잡고 입은 칼브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보름.
많은 일이 있었던 시간이었다.
특히 플로나 마을에 관한 배상 요구 건으로 준비할 게 많아 무척 바빴었다.
사실 며칠이면 끝났을 일이 지체된 건 전부 서류 작업 때문이었다.
날인해서 공증해야 할 게 뭐가 그리 많은지.
이것저것 처리하고 황제의 인가까지 난 후에야 얼추 정리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칼브란이 배상 건을 매듭지으러 오르니오 영지로 가는 거고.
‘사실 그쪽에서 서류 작업을 핑계로 질질 끈 면도 있지.’
그게 다 뷔트시겐에서 배상으로 요구한 것을 내놓기 싫어서였다.
“살리카 가주가 배 좀 아프겠는데?”
“케르도스의 생산지를 내놔야 하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남의 영지를 습격하려다 덜미를 잡혔으니 그 정도는 내놔야지.”
“그렇지요. 살리카가 가진 여섯 개의 생산지 중 그 한 곳만 확보해도 실로 고무적인 성과이지요.”
여섯 곳 중 하나.
비록 한 곳일 뿐이지만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왜냐면 7:3이었던 생산지의 비율이 5:5, 거의 동률이 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흡족한 이안은 입가에 호선을 띄웠다.
완만하게 위로 말아 올려진 곡선.
그걸 보며 칼브란은 저 미소와 똑같은 표정을 접했던 날을 떠올렸다.
이안이 플로나 마을에서 돌아온 직후 가주에게 제 견해를 말하던 그 날을.
<아버지, 살리카가 분탕을 친 것에 대한 배상 건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정령 치료제인 케르도스의 생산지로 받아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 듣자마자 가주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 바를 이안이 정확하게 짚었으니 그럴밖에.
그날, 가주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떨어질 줄을 몰랐더랬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칼브란은 찬탄의 눈길로 이안을 응시했다.
이런 최종방안까지 미리 생각하고 계셨다니.
칼브란의 질긴 시선이 따라붙어도 이안은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살리카 가주를 막으려면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뺏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 면에서 케르도스 생산지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유일한 정령 치료제의 독점은 훗날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니 지금 배상받을 그 땅.
살리카가 가진 생산지 중 규모가 가장 큰 그곳.
뷔트시겐의 오르니오 영지와 인접해 있어 관리까지 쉬운 곳.
그런 땅의 소유자를 바꾸는 것은 칼브란 말마따나 커다란 성과였다.
전쟁을 막는다는 목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이기에.
이안은 환하게 웃으며 칼브란의 어깨에 얹은 눈을 털어냈다.
“조심히 다녀와.”
“잘 마무리 짓고 오겠습니다. 도련님에게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하. 뭘 그리 비장하게.”
“호위대장 따위. 오늘같이 중차대한 일을 하러 가는 저보다 더 믿음직하고 멋질 순 없지요.”
“응?”
“그깟 놈이 도련님의 일 순위라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망둥이를 누를 방법은 영 순위가 되는 것뿐이겠지요.”
……대체 무슨 의미일까?
도통 저런 맥락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이안이 말을 좀 더 풀어보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칼브란이 외알 안경을 추켜 올렸다.
설명을 보태기보다 환기하려는 몸짓이었다.
“크흠. 도련님께서는 이 칼브란만 믿으시면 됩니다.”
“나야 우리 집사장님을 당연히 믿지.”
“그렇지요? 제가 제일이지요?”
“……으응.”
“그럼 도련님의 믿음에 보답해야 하니 서둘러야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칼브란이 정복을 멋들어지게 휘날리며 뒤돌아섰다.
때맞춰 바람이 불어와 소맷자락을 흔드는 걸 보니 다소 연출이 들어갔다.
‘흠. 알란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칼브란의 이상 행동에 관해 이안은 유추해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칼브란은 소맷자락을 연신 펄럭이며 꿋꿋하게 나아갔다.
제 근사한 모습을 잘 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