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67화 (167/214)

제167화

“하아.”

리오는 자신의 집 연무장에서 수련하다 말고 한숨을 진하게 내쉬었다.

어느덧 보름이 흐른 수습 기간.

이날 동안 그를 포함한 생도들의 생활은 똑같은 듯 약간 달라졌다.

우선 똑같은 건 임무와 수련이 반복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달라진 점은.

“이젠 그들과 적대하지 않은 채 나름 원만하게 지낸다는 거고.”

에루리안 출신의 영입된 자들과 내정자들.

이 둘 사이의 껄끄러움과 낯설음은 어느 사이 차츰 희석되고 있었다.

이게 다 올리브란 소년 덕분이었다.

어찌나 친화력이 좋은지.

어느 날은 정원사와 노닥거리고 있고, 어느 날은 마구간지기와 노닥거리고 있고.

뷔트시겐에서 태어난 사람 같다고 해야 하나.

올리브는 이런 무지막지한 친화력을 내세워 내정자들을 공략했다.

그 결과.

니콜라스 무리를 제외하고는 얼추 그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배척하던 단계는 이미 지난 것이다.

이를 보면 나름 괜찮게 굴러가고 있긴 한데…….

“하아아아아.”

리오는 한숨을 늘어지도록 길게 뺐다.

어찌할 수 없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서였다.

정작 얻고 싶은 사람의 마음, 그러니까 이안의 호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수습 기간이 끝나버리면…….

“단련하는 것이 혹 한숨 쉬기이더냐. 이러다 조만간 연무장 바닥이 죄 꺼지겠구나.”

“……할아버지.”

불쑥 날아든 목소리에 리오는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연무장 입구에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서 있었다.

인자한 낯의 노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리오의 곁으로 다가왔다.

* * *

저만치 떨어진 거리를 단숨에 좁혀오는 걸음.

한때 질풍의 늑대라는 별칭을 달았던 실력은 노인이 되었다고 죽지 않았다.

그를 보며 리오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얼굴에 감정을 다 드러내는 풋내기가 귀여워서일까.

미소가 더욱 진해진 노인, 아니 1장로가 바닥에 앉으며 리오에게 은근히 물었다.

“좋아죽는 수련에 집중 못 하는 걸 보니 알겠구나. 혹 좋아하는 아이라도 생긴 게냐?”

“할아버지.”

“껄껄껄. 열일곱이면 한창 뜨거울 때지.”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면 아닌 게지 정색하긴. 하여튼 네놈은 매사 너무 진중해서 탈이다.”

“진중으로 치면 황제 폐하 저리 가라 하는 할아버지가 저한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욘석이.”

1장로는 장난스레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했다.

애정이 그득한 몸짓 후, 그는 열일곱의 앳된 소년을 바라보았다.

둘째 아들이 낳은 첫 번째 자식 리오 퐁텐블로.

가장 아끼는 손주 녀석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그 흐림의 연유를 어찌 모를까.

알면서도 1장로는 연장자로서 설교를 늘어놓지 않았다.

흐림을 해결하는 건 리오의 몫이니까.

대신 헤매고 있는 녀석을 위해 대화를 나눠볼 심산으로 말을 붙였다.

“그래, 이 할애비에게 말해보려무나.”

“무엇을 말입니까.”

“대차게 차인 것처럼 시들시들한 연유를 말이다.”

“그게…….”

리오가 머뭇거리자 1장로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그 때문일까.

어느새 리오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하아. 할아버지는 이럴 때 어떻게 하실 거예요? 만약 가주님이 할아버지를 싫어하신다면요.”

“흐음. 가주께서는 이 노부를 싫어한 적이 없으셨지.”

“…….”

“처음부터 날 어찌나 믿고 따르던지. 가주께선 병아리처럼 귀여웠단다.”

“병아리…….”

1장로의 단어 선택에 리오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병아리와 가주라니.

도저히 겹쳐지지가 않았다.

가주에게는 정점에 선 자가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흘렀으니까.

웃지 않는 눈으로 보면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서늘함이라던가.

그저 손을 들어 보이는 동작만으로도 시선을 붙든다던가.

뭐 그런 거 말이다.

병아리라기보다는 그분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이고 땅을 거니는 사자였다.

리오가 상념에 빠진 사이 샛길로 빠지지 말라며 1장로가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나와 가주님을 빌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 게냐.”

“그게…… 도련님께서 곁을 주지 않으세요.”

“도련님께서?”

“저희랑 곧잘 말도 섞고 잘 웃기도 하는데 왠지 미묘한 벽이 느껴져요.”

물론 리오도 이안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와 니콜라스의 관계만 봐도 알지 않은가.

녀석과는 태어났을 때부터 형제처럼 자라 가장 친밀한 존재였다.

그러니 니콜라스가 아무리 밉살스럽게 굴어도 결국, 용서하고 마는 거고.

이처럼 결국 친밀도는 부대끼며 산 시간과 비례한다.

이안에게는 몇 달 동안 같이 지낸 아카데미 녀석들이 우리보다 더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을 터.

그리 여기고는 있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라는 게 머리랑 똑같이 가는 것이던가.

이성과 정반대로 가서 마음인 거였다.

리오는 약간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손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물론 친밀도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사실…… 도련님을 그렇게 만든 건 우리니까요.”

“그럼 너희의 무엇이 그리 만든 것 같으냐.”

“그들을 배척하고 낮잡아보면서 존중하지 않았어요. 동료란 건 동등한 선상에 있을 뿐 급을 나눠선 안 되는 건데.”

“그러하지. 상대를 낮잡아보며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 것. 그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음이니.”

“후우. 군에 편입되면 생사를 함께 할 텐데 그런 태도를 보였으니.”

“흐음.”

“아마 우리의 이런 모습에 도련님이 실망하신 것 같아요.”

차라리 이안이 차가운 이유를 몰랐다면 마음만은 편했을 것이다.

차가움의 원인을 상대에게 미루고 내 탓이 아니라 치부해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명확한 이유가 있으니 리오로서는 한숨만 나왔다.

“첫 단추를 잘못 꼈는데 그것을 돌이킬 방법을 모르겠어요.”

“다시 끼우면 되는 것을.”

“다시…….”

“무엇이든 때가 있듯 잘못 끼운 줄 알았을 때가 가장 적절한 때이지.”

“…….”

“그때 망설이고 자존심 챙기다 어물거리면 정말로 늦어버리지. 적어도 이 할애비가 살아온 경험으로 그러했다.”

1장로의 진심 어린 조언에 리오는 재차 손등을 문질렀다.

할아버지의 말은 정곡이었다.

그리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섣불리 그들에게 다가가 철판을 깔 수가 없었다.

이리 망설이게 된 데에는 레브란 자가 해준 말도 한몫 거들었다.

<아, 이안이 차가워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 그 녀석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 녀석이 쪽팔린다고 그랬거든. 원래 우리를 데려오면서 이안이 그랬어. 적어도 뷔트시겐에서는 방계라고, 에루리안 출신이라고 덮어놓고 무시하는 자들은 없을 거라고.>

<그게 아버지가 만든 뷔트시겐이니 걱정 말랬는데, 보다시피 이런 상황이라 좀 많이 쪽팔린다고.>

<그래도 이성적인 놈이라 제 스스로 마음이 풀리면 곧 괜찮아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

이안이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뷔트시겐.

그리고 자신들이 보여준 뷔트시겐.

진짜 ‘빌어먹을’이었다.

레브의 말을 들은 뒤 리오는 쪽팔려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아아.”

“젊은 놈이 한숨은. 혹 도련님이 널 그리 대해서 서운한 것이냐.”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 맘은 진짜 티끌만치도 없어요. 그래도…… 도련님이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실수를 좀 해서 영 못 미더운 놈들로 보이겠지만.”

“친해지고 싶은 게로구나.”

“예. 저희에게도 곁을 좀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껄껄. 욕심이 크다. 아주 커. 역시 내 손주야.”

“아, 할아버지.”

1장로는 수염을 느른하게 쓸었다.

“리오, 주군의 곁붙이란 자리가 어디 쉬이 얻는 것인 줄 아느냐.”

“…….”

“평생을 걸고 믿을 만한 놈인 것을, 쓸만한 놈인 것을 증명해야 하지. 하여 주군을 모시는 것은 평생을 짝사랑에 시달려야 하는 것과 같단다.”

“짝사랑이요?”

“주군이 쓰는 수많은 칼 중 하나가 된들. 더 자주 쓰이려면, 시선 한 번 더 받아보려면,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버둥거려야 하니 그와 비슷하지.”

눈가를 접은 1장로는 격려하듯 혹은 독려하듯 리오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의 손짓에 리오는 생각이 많아진 눈빛을 했다.

“그러니 이리 푸념할 시간에 노력하려무나. 거저 얻을 수 없는 무거운 그 자리를 가지고 싶거든.”

* * *

‘리오 그놈이 애닳을만 하지.’

1장로는 중앙 광장의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는 이안을 응시했다.

그가 보이는 행보들이 어디 평범한 것들이던가.

죄 범상치가 않았다.

아이루스 상단의 문제를 해결했을 때부터 조짐이 보이더니만.

이번에 플로나 마을의 참변을 막으면서 콧대 높은 히루푸스마저 이안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이로 보아 능히 짐작해볼 만했다.

이안 역시 가주처럼 수많은 인재가 절로 따라붙을 것이다.

흠모하는 이들도 많아지겠지.

‘그러하니 리오 그놈 솔찬히 고생 좀 하겠구나.’

도련님의 곁붙이는 무슨.

지금 이안의 마음 한 자락을 못 얻으면 다신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단정 지은 1장로는 얄궂게 히죽였다.

손주 놈의 마음고생이 예정되었을지언정 저는 도련님의 스승으로 발탁되지 않았던가.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이안의.

이 사실로 손주 놈을 놀려 먹으며 저는 느긋이 그 녀석의 행보를 감상하면 그만이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제 손주 놈과 이안.

둘의 관계가 어찌 이어질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 터이니.

“크흠. 도련님, 오늘도 어제의 수련을 이어가겠습니다.”

“예, 1장로님.”

1장로가 말을 붙여오자 이안은 등허리를 세우며 귀를 열었다.

참 희한한 게 1장로가 첫 스승이 아닌데도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아무래도 녹스와 가르치는 관점이 전혀 딴판이라 그런 것 같다.

녹스는 4대 원소를 다루는 자를 골자로 두고 저를 가르친다.

하여 통제력에 주력한다.

반면 1장로는.

“오늘은 바람의 속삭임 중 분노의 소리만을 찾아볼 것입니다.”

이런 다소 추상적인 수련을 가르친다.

뷔트시겐의 일원으로서 어린 뷔트시겐에게 건네는 가르침이었다.

이미 길을 걸어본 자가 주는 일종의 선물인 격.

이는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것이라는 걸 이안은 안다.

그렇기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열의를 보였다.

그 모습이 마냥 기특해선지 1장로가 애정 어린 눈빛을 장착하고선 입을 뗐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 하나 묻지요. 이 노부가 첫 수련 때 건넨 말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바람의 속삭임은 기본 기술이나 뷔트시겐의 정수라고 하셨던.”

“그렇지요. 노상 칼바람 부는 이 설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긴 기술이 바람의 속삭임이니까요.”

혹한의 괴이한 소리에 묻혀 인간의 기척이 잘 들리지 않는 환경.

이 때문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해도 듣지를 못했다.

도움을 줬다면 충분히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일이 부지기수였는데도.

이를 보완할 방법을 고심하다 터득한 게 바람의 속삭임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중시하기에 만들어진 기술.

“바람의 속삭임이나 바람의 선은 일종의 생존 본능에서 나온 것이지요.”

“소리를 구분해도 기동성이 빠르지 않으면 소용없으니까요.”

“그렇지요. 하여 이 두 가지는 뷔트시겐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이제 막 젖을 뗀 아기도 아는 사실이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지루한 말을 꺼낸 1장로의 본심.

그건 1장로가 이안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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