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내 가신 된 자로서 가지는 소박한 바람이 있습니다. 도련님이 이 바람의 속삭임의 극의에 달했으면 하는 것.”
“하하. 소박한 듯 보이나 지나치게 거창한 소망이십니다.”
“물론 제 세대에서 극의에 달한 자는 한 분뿐이긴 합니다. 가주님. 하나 도련님이라면 충분히 해낼 것이라, 이 노부는 자신합니다.”
바람의 속삭임의 극의.
그것은 내가 바람의 소리이고, 바람의 소리가 나인 경지이다.
쉽게 말해 이런 거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모든 소리가 숨 쉬는 것처럼 들리는 경지를 일컫는다.
합일의 단계인 셈.
1장로는 본심을 꺼내 보인 뒤 수염을 쓸며 주위를 환기했다.
“흠흠. 그러려면 하루하루를 성실히 쌓아나가야겠지요. 이 노부가 말한 대로 먼저 분노의 소리를 찾아보십시오.”
이안으로선 1장로의 소망이 과하게 느껴지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이왕 무언가를 시작했으면 끝을 보는 건 당연한 거였으니까.
이안은 중앙 광장을 휘도는 수많은 소리에 집중했다.
온갖 소리가 뒤엉켜 몰려왔다.
“……아. 역시 장사진을 이루는 곳이라 외상값을 안 갚는다며 싸우는 소리가 제일 많이 들립니다.”
“가장 보편적인 분노군요. 그럼 이번엔 조금 다른 분노를 찾아보시겠습니까.”
“어떤 것을 말입니까.”
“분노이되 다른 감정이 섞인 소리 말입니다. 이를테면 슬픔이라던가, 염려라던가.”
“아, 알겠습니다.”
이안은 이후로도 다양한 분노를 찾아 귀를 열었다.
짜증이 섞인 분노, 순수한 분노, 체념이 어린 분노 등등.
감정의 색깔이 다른 소리를 찾아내고 듣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괜히 광장에서 수련하는 것이겠는가.
수많은 소리가 뒤섞이다 보니 어려움은 배로 껑충 뛰었다.
집중하느라 귀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지만 이안은 이 시간이 즐거웠다.
일족의 누군가를 스승으로 둔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 * *
단순히 수련에만 매진했으랴.
1장로와 점심을 함께 먹으며 시시콜콜한 얘기도 나눴다.
마치 할아버지와 손주 사이처럼.
특히 1장로가 열을 올린 얘기는 그가 애지중지하는 정원에 관한 거였다.
걸핏하면 2장로와의 멱살잡이로 부서지곤 하는 그곳.
한데도 복구하고 또 복구하며 더 화려하게 가꾸는 소문의 그 정원.
그곳에서 핀 난초에 관해 듣다가 1장로와 헤어졌더랬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쩐지 1장로님 약간은 오기도 있는 것 같지 않아?”
이안은 뷔트시겐 저의 초입에 들어서며 녹스를 쳐다보았다.
주어가 빠진 말이라고 못 알아들으랴.
녹스가 와인이 함유된 초콜릿을 오도독 씹으며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내가 봐도 그런 것 같다. 망가진 정원을 그대로 두면 기 싸움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두 분 참 재밌게 노는 것 같단 말이야.”
[그리 수시로 멱살을 잡다가는 곧 정분도 나겠다.]
“그것도 볼만 하겠…….”
이안은 말을 하다 말고 정문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해를 등져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댕댕한 그림자.
그 선만으로도 어째 기시감이 몰려왔다.
“…….”
저만치 앞에 서 있는, 코끝이 빨간 그림자가 2장로였기 때문이다.
* * *
“2장로님, 어쩐 일이십니까.”
“도련님을 만나러 왔소이다.”
누가 그걸 몰라서 질문을 던졌나.
이안은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어딘가 불퉁한 2장로에게 말을 붙였다.
“제 잘난 얼굴을 뜯어보러 오신 겁니까.”
“흥. 그 유들유들한 혓바닥으로 변명을 해보십시오.”
“변명이라니요?”
“어찌하여 날 스승으로 두지 않고 거절하신 게요.”
“아.”
역시나였다.
2장로를 발견했을 때부터 그것 때문인가 했는데 짐작이 맞았다.
이안은 스승으로 1장로만 두고 2장로는 거절했다.
그 사실을 보름 내내 곱씹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찾아온 모양이다.
‘하긴. 보름이면 2장로의 성정에 많이 참은 거지.’
단순하고 거침없는 성정이라 저를 찾아와도 열두 번은 더 찾아왔을 터였다.
그간 잠잠했던 것이 오히려 수상할 지경.
이로 2장로의 속내를 살짝 유추해보자면, 아마 제자 될 놈이라 생각해서 참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차가운 슈바츠의 도시 남자라도 내 제자에게만은 따뜻하겠지, 뭐 그런 것일 수도.
어째 요즘은 2장로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종종 발견하는 것 같다.
과거에는.
<어차피 앞날을 안들, 현장을 모르는 예언자 나부랭이가 우리의 의견에 반대하는 게요. 이 작전은…….>
참으로 2장로의 혀끝이 매웠었는데 말이다.
피식 웃고 만 이안은 2장로가 원하는 대로 변명이라는 것을 했다.
“2장로님이 부족해서 거절한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인 게요.”
“제가 2장로께 가르침을 받으면 그간 2장로께서 밀었던 후보자는 어찌 되는 겁니까.”
“마음이 이리 물러서야. 후계자 경합은 경쟁입니다. 그걸 도련님께서는 망각하신 것 같소.”
2장로의 말투는 지극히 딱딱했다.
흡사 이안 그를 못 미더워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그렇더라도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왜냐면.
“에잉. 성정이 이러니 1장로 그 물렁한 인사 말고 내가 곁에 있어야 하는 건데.”
2장로가 들으라는 듯이 아쉬움을 흘렸기 때문이다.
결국, 섭섭함이 큰 만큼 불퉁한 말투가 튀어나오는 것뿐이었다.
말하자면 절 좀 봐달라는 시위에 가깝달까.
관심을 받으려는 일곱 살배기 꼬마와 비슷하달까.
지금만 봐도 그렇다.
툴툴대던 2장로는 혹여 이안이 못 들었을까 봐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리만 되면 도련님의 성정을 단단히 만들 수 있을 터인데.”
“2장로님.”
“왜 부르는 게요. 내게 뭐 할 말 있습니까.”
이안이 살갑게 부르자 2장로가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표현 그대로 초롱초롱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이안은 2장로가 기대하는 답이 아닌 후계자 건에 대한 것만 입에 담았다.
“후계자 선출이 경쟁인 것도 알고 봐줄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후계자 경합이라는 좁은 우물물만 봐서는 안 된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모를까 승냥이인 살리카가 주변을 어슬렁대고 있기에.
뷔트시겐에 틈이 생기면 어떻게든 물어뜯으려고 말이다.
벌써 후보자인 루시안을 틈이라 여기고 접근하지 않았던가.
다신 살리카가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의 입지는 2장로님으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2장로님이 추천하신 것이니까요.”
“내가 그랬소만, 후계자가 되는 것은 그 아이의 자질에 따른 것이외다.”
“압니다. 하나 2장로님이 돌아서면 불완전해집니다.”
“…….”
“불완전함은 때때로 그릇된 선택을 하게 만들지요. 하여 저는 2장로님이 예전처럼 후보자를 돌봐주시길 청합니다.”
“흠. 그 아이는 잘 돌보고 있소이다. 이 이상 해줄 것도 없고.”
“예. 단지 제 욕심에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후보자가 흔들리지 않게 2장로께서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셨으면 해서.”
2장로가 적극 루시안을 비호 한다고 판도가 한쪽으로 기울까.
그렇지가 않다.
후계자의 자리가 장로의 입김에 좌지우지되어서야 쓰랴.
가주가 될 자만이 거머쥘 수 있는 것인데.
일족을 돌보는 수장이 되려면 특정 장로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이안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의외로 2장로는 눈두덩이를 실룩거리는 것 빼고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지.
도리어 여태껏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알아챈 듯 눈매가 깊어졌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보는 2장로의 성정상 아마 별개로 여겼겠지.’
그의 스승이 되는 것과 루시안을 지지하는 것, 두 가지를.
하여 자신의 행보와 별개로 뛰어난 루시안이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세간에서 무어라 왈가왈부한들.
그저 강하면 모든 난관을 부숴버릴 수 있다고 여기는 2장로이니 오죽할까.
이안의 조곤조곤함에 2장로는 턱을 느슨하게 문질렀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헤아리고 있을 줄이야.’
2장로는 제가 저 어린 녀석에게 끌린 게 강함 때문만은 아님을 알아챘다.
보통 저 나이대는 주변의 상황에 휩쓸리기 쉽다.
자꾸 경쟁을 부추기면 없던 호승심이 생기고 더러 상대가 미워지기 마련.
한데도 이안은 중심을 딱 잡고 주변까지 아울렀다.
실로 가주감이지 않은가.
2장로는 생각의 끄트머리에 눈가를 갸름하게 좁혔다.
“알겠소이다. 도련님의 뜻이 그렇다면.”
“아, 연장자로서 조언을 해주시는 거라면 언제든 감사히 달게 받겠습니다.”
“가만 보면 말이외다. 어째 도련님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능글거림도 같이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뻰질거리는 1장로를 닮아 가는 것도 같고.”
“오, 새로운 견해군요. 다들 칼브란을 닮은 것 같다고 하던데.”
“흥.”
2장로가 또다시 콧바람을 대차게 뀌었다.
그 세찬 콧김에 녹아있는 마음 역시 섭섭함이었다.
닮을 거면 저를 닮을 것이지 왜 1장로를 닮냐는 거였다.
별걸로 경쟁심을 다 태운다.
그런 2장로가 귀여워 이안이 볼우물 패게 웃는 사이.
“이만 가보겠소이다.”
그래도 인사는 해준 2장로가 휘적휘적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본관으로 향하는 걸음으로 보아 아버지를 만나려는 모양이다.
망설임 없는 2장로의 뒤태.
평생을 제 성질껏 살아온 자의 걸음을 이안은 지그시 보았다.
시간이 기울어가는 것도 잊어버린 채.
* * *
이안이 제5 연무장에 들어서자마자였다.
“여기, 여기.”
올리브가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한 쌍처럼 붙어 있는 레브 역시 눈짓을 보내긴 마찬가지.
둘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린 이안은 서두름 없이 가서 앉았다.
엉덩이가 땅바닥에 닿은 즉시.
“형, 이번에도 발르와 가의 총회합에 참석할 거지?”
니콜라스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연무장 바닥에 쫙 깔렸다.
목청이 여느 때보다 높았다.
‘어쩐지.’
이안은 소리의 진원지인 니콜라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니콜라스 무리의 한 가운데에 후보자인 루시안 발르와가 있었다.
아이들을 아우르며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루시안.
그의 부드러운 태도로 인해, 아이들 모두 편안한 표정으로 얘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훈련생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라더니.]
-정말 이질감이 하나도 없네.
[그거 하나로 슬며시 섞여든 게 한 달째던가.]
-벌써 그렇게 됐나?
녹스가 콕 집은 후에야 이안은 실감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어느 사이 훌쩍 지났다는 것을.
[그나저나 저놈이 이리 뻔질나게 드나드는 건…….]
-아마도 불안해서겠지.
루시안이 바지런을 떨며 연무장에 출근 도장을 찍는 까닭이야.
생도들 사이에서 입지가 좁아질까 우려하는 것이었다.
하여 제 존재감을 각인시킬 요량으로 은근한 수를 쓰는 것일 터.
루시안의 행동은 곧 불안의 강도를 의미한다.
그만큼 초조하다는 것.
이안이 생각에 잠겨 루시안을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걸 축객령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슬그머니 일어난 루시안이 얕게 고개를 숙였다.
그만 가볼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안에게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간결한 몸짓을 내보인 후.
루시안은 니콜라스와 리오에게 뭐라 말하곤 곧장 연무장을 떠났다.
‘졸지에 쫓아낸 꼴이 되어버렸군.’
결단코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결과를 싫어할 놈이 있었다.
니콜라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입술을 악다문 채로 이안을 노려보았다.
‘저러다 눈알 빠지겠다.’
루시안을 쫓아낸 것에 대한 원한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사촌지간이기도 하고 유독 루시안을 따르는 녀석이니 그럴 수밖에.
뭘 한 것도 없이 욕만 바가지로 먹고 있는 사이.
“크흠.”
가슴팍에 단 황금 가지를 빛내며 알란이 단상에 섰다.
어째 가지는 시간이 갈수록 광택이 더 과해지는 것 같다.
교관이 등장하자 생도들은 곧장 각을 잡으며 정면을 보았다.
절도 있고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그들을 균등하게 훑은 알란은 곧장 교관으로서 충실하게 입을 뗐다.
“오늘은 수련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무엇이다?”
“임무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오늘은 단체 임무가 주어질 것이다. 호명을 받은 생도는 앞으로 나와…….”
수습 기간의 중반을 넘어서니 이따금 단체 임무가 떨어졌다.
적게는 2인에서 많게는 10인이 조를 이루는.
이름이 불린 생도 한 명, 한 명이 단상에 올라 임무지를 받았다.
그 뒤 같은 임무를 배정받은 자들끼리 뭉쳐서 의논을 시작했다.
“리오 퐁텐블로 나오도록.”
이 와중, 리오 차례가 왔다.
녀석은 절도있는 걸음으로 알란 앞에 섰다.
임무지를 받고 다시 제자리로.
그러는 동안, 리오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이안의 시선도 함께 굴러갔다.
정확히는 멀쩡히 붙어있는 녀석의 오른팔에 꽂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