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력 없는 놈 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169화 (169/214)

제169화

“아라투스 마을로 가는 임무라.”

이안은 방으로 돌아와 떠날 채비를 하다 말고 중얼거렸다.

임무라고 해봐야 생도들의 수준에 맞는 것을 준다.

고난과 역경을 넘어야 성장할 수 있어, 라며 굴리지 않는다는 뜻.

그런데.

“이번 임무에서 리오의 팔이 잘려 나갔지.”

임무 도중 모종의 일로 리오를 제외하고 생도 셋이 죽었더랬다.

홀로 살아남았으니 어땠겠는가.

리오는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때의 일을 거론하는 것을 꺼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생도들뿐만 아니라…….

과거를 되짚는 이안의 귓가로 녹스의 가라앉은 음색이 날아들었다.

[운송 임무를 하다 그리되었다 하였지?]

“어. 아라투스 마을에서 레드니의 족쇄를 가져오는.”

[다섯 살짜리가 가도 성공하는 거랬으니, 그 아이의 일은 참으로 안타깝다.]

겉보기에는 무척 쉬운 임무였다.

뷔트시겐과 레드니의 족쇄의 생산지인 아라투스 마을을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되니까.

하나.

‘정령의 마력을 흡수하는 기물을 운송하는 것인데 쉬울 리가.’

세세히 따지자면 결단코 가벼울 수 없는 임무였다.

한데도 생도들에게 맡기는 이유는 하나다.

레드니의 족쇄가 지닌 무게를 알게 하기 위한 것.

체득으로 가르침을 주고자 함이라 안전장치도 마련해 두었다.

[본디 생도들을 보호할 호위대까지 티 나지 않게 따라붙지 않누.]

“따라붙지. 만일을 대비해야 하니까.”

[한데도 그 사달이 난 건 살리카가 끼어들어서라는 거고.]

녹스가 또 그 망할 살리카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경멸과 분노.

살리카의 ‘ㅅ’만 들어도 녹스는 이제 인상부터 구기고 본다.

이안 역시 비슷한 심정이라 낮게 뇌까렸다.

“살리카 그것들이 레드니의 족쇄를 훔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지.”

그들이 아라투스에서 족쇄를 훔친 까닭이야.

“그걸 이용해 4대 가문의 수장들을 죽이려는 심산이었고.”

[수장들의 정령만 무력화시켜도 전투가 수월할 터이니.]

“그리고 성공했지.”

남의 영지에 있는 기물을 훔치기.

참으로 위험천만한 짓이었지만 살리카 가주는 과감하게 실행을 했다.

그럴 수 있었던 밑바탕에 자신감이 있었음은 말해 뭐하랴.

자신의 계획을 위해 무려 10년 동안 공을 들였으니 그럴 만했다.

실패하는 게 더 이상한 지극정성.

이러니 아무리 아버지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이를 아드득 갈며 이번은 다를 거라 각오를 다졌다.

“그자의 수하가 리오의 팔을 자르기 전에 막아야지. 1장로를 위해서라도.”

그 김에 살리카의 계획도 하나 더 무너뜨리고 말이다.

* * *

츠스슷.

뷔트시겐 종가와 아라투스 마을을 잇는 워프 게이트.

이안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즉각 초소병들이 경례했다.

그들의 인사에 눈짓으로 화답한 후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눈밭뿐이었다.

어찌나 휑뎅그렁한지.

달랑 있는 뾰족한 첨탑의 워프 게이트 초소가 유독 쓸쓸해 보였다.

“역시 여긴 어느 때든 오가는 사람이 없다.”

“마을 사람들조차 외부로 나가지 않는다고 하니 더 그렇겠지.”

같은 임무에 배정받은 레브가 말의 꼬리를 물었다.

녀석의 뒤를 이어.

“유일한 외부인은 달에 한 번 오가는 식료품 상단이라고 그러던데.”

올리브가 이곳에 오기 전에 조사한 정보를 읊었다.

각자 한마디씩 하며 일제히 고개를 꺾고 초소를 쳐다보았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똑같은 몸짓.

“아, 저래서…….”

세 사람의 동작에 곧장 잇따른 건 누군가의 격한 끄덕거림이었다.

그 고갯짓은 리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에루리안에서 삼총사라고 불렸다더니 셋이 정말 닮았군.’

이안과 레브, 그리고 올리브.

실상 세 사람은 머리 색부터 외양까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풍겨오는 느낌이 겹쳐진 그림처럼 묘하게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히 일렬로 나란히 서 있을 때는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부대낀 시간으로 인해 자연스레 그리된 것일 터.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으려나.’

까놓고 말하자면 이번 임무를 받고 조금 들뜨긴 했다.

같은 임무를 배정받았으니, 도련님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 볼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미약하나마 유대를 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리오의 과한 시선이 어느새 잔잔한 기색의 이안에게로 못 박혔다.

이안은 전방에 펼쳐진 검푸른 암산을 차분히 올려다보았다.

저걸 검다고 해야 하나, 푸르다고 해야 하나.

빛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색깔을 내보여서 뭐라 꼬집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암산은 다소의 특이점까지 있었다.

‘벌집이 상당히 많군.’

여기저기 온통 하얀 벌집투성이였다.

그 탓인지 몰라도 하얀 꽃들이 검은 도화지 위에 피어난 것 같았다.

묘한 느낌을 주는 암산의 꼭대기.

일단은 저곳에 올라가는 것이 먼저였다.

아라투스 마을로 가려면 거쳐 가야 하는 곳이니까.

“어때?”

“뭘?”

“꼭대기까지 누가 먼저 도착하나 내기하는 거.”

이안은 짓궂게 씨익 웃고서는 말을 끝내자마자 내달렸다.

출발 신호는 없었다.

비겁하게 암벽을 타는 그의 뒤로 레브와 올리브가 곧장 붙따랐다.

“허, 저놈 치사한 것 봐라.”

“그렇다고 이 올리브님이 널 못 따라잡을쏘냐.”

벌집이 없는 지그재그의 길.

각종 방어 결계와 함정 술식이 깔려있었지만, 이미 안전한 길을 숙지하고 온 터라 나아가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이안을 앞지르려 두 사람이 겅중 도약한 찰나.

산자락 곳곳에 이안의 음색이 익살스럽게 울려 퍼졌다.

“하하. 어디 마음껏 해보셔.”

그와 동시에 눈덩이가 레브와 올리브의 오른발을 강타했다.

묵직한 눈은 그대로 발등을 덮으며 뿌리를 내리듯 얼려졌다.

콰드듯.

단단한 눈덩이를 먼저 뜯어낸 레브는 사선 방향을 쳐다보았다.

눈덩이를 가차 없이 내던지는 이안의 사냥개.

녀석의 몸놀림은 명백히 제 결속자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경쟁자의 발을 잠시나마 묶어 두겠다는.

“이안 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레브가 손을 튕기자 섬광이 터진 것처럼 눈앞이 새하얘졌다.

화아아악.

빛의 정령이 불러낸 빛살들이 망막을 점령한 탓.

시야 차단이었다.

실제 공격을 주고받으며 엎치락뒤치락 선두를 차지하려는 공방이 이어졌다.

‘무슨 내기를 이렇게 목숨 걸고들 하는지.’

리오로선 도통 적응이 안 됐다.

해서 나아가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그의 정수리로 이안의 목소리가 닿았다.

“뭐해, 리오. 평생 거기 살 거 아니면 얼른 따라와.”

“…….”

“뷔트시겐의 기대주라는 분이 제일 뒤처져서야 쓰나.”

“……제가 봐 드린 겁니다.”

“어쭈? 얘들아 들었냐. 봐 드린 거란다. 도발을 세게 하시는데?”

“그럼 받아줘야지.”

캬캬캬, 까마귀 웃음을 터트린 올리브가 건틀릿으로 암벽을 내리쳤다.

퉁. 투웅.

곧장 리오의 주변으로 별 모양의 암석들이 돋아나며 진로를 방해했다.

뿐일까.

바람의 주입으로 탄력과 속도까지 더해진 암석들은 빛을 발하며 곡선 형태로 터졌다.

군더더기 없는 연계기.

타닷.

폭발을 잽싸게 피한 리오가 끈적끈적한 슬라임을 불러냈다.

삽시간에 몸을 얇게 편 슬라임은 폭발하는 암석들을 모조리 받아냈다.

그러더니 그것들을 녹여 액체화시키곤 도로 뱉어냈다.

독 속성의 정령.

아끼는 정령을 꺼내 응전하는 리오까지 넷.

이후로 그들은 누가 보면 뭔 일 났나 싶게 죽자사자 암산을 올랐다.

* * *

암산의 꼭대기.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이안이었다.

그는 평평한 땅을 밟고 서서 맞은편의 암산을 내려다보았다.

희끄무레하게 알록달록한 지붕이 보였다.

저곳이 아라투스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빵을 굽는 모양인지 고소한 냄새가 훅 파고들었다.

오후 3시.

이 어중간한 시간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냄새였다.

“아라투스 마을의 벌꿀 빵은 맛있기로 유명한데.”

“어딜 가든 먹을 것부터 챙기지.”

이안이 중얼거리는 동안 간발의 차로 레브가 도착했다.

바로 뒤이어 올리브와 리오도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며 숨을 골랐다.

일행이 다 모인 즉시였다.

“큼. 뷔트시겐의 생도분들, 반갑소이다.”

꼭대기에 있는 검문소, 그곳을 지키고 있던 중년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5피트(152cm) 정도 되는 키에 갈색 근육이 다부진 그녀.

그녀는 딴딴한 근육을 자랑하듯 한겨울인데도 셔츠만 입고 있었다.

정작 보는 사람이 한기를 느낄 지경.

“나는 뷔트시겐의 서단을 책임지는 기사단 국경 경비대 소속의 백부장이외다.”

여자, 아니 백부장은 호탕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백부장은 힐끗 이안을 봤지만, 딱히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소문이 장한 도련님을 이렇게 보네.’

딱 그 정도 수준의 눈빛.

“그럼 절차는 절차이니 검문을 하겠소이다.”

길쭉한 봉을 든 백부장은 이안 앞에 서더니,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봉으로 훑었다.

위장을 적발하는 마도구를 들고 꼼꼼히 넷을 살핀 연후.

이상 없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백부장은 우직한 생김만큼 무척이나 꼼꼼했다.

신분 확인을 끝낸 뒤에 그녀는 암산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다들 알고 있을 테니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저곳으로 가십시오. 그래야 마을로 갈 수 있으니까.”

“예.”

자세한 설명이고 자시고 없었다.

백부장은 정해진 수순을 그대로 밟아야 한다는 듯 이안 일행을 떠밀었다.

그 탓에 그들은 끌려가듯이 암산 끄트머리로 향했다.

백부장이 우뚝 멈춰 설 때까지.

‘이게 마을로 통하는 유일한 이동 수단이군.’

대롱대롱.

천 길 낭떠러지에 덩그러니 놓인 네모난 상자.

상자는 건너편 암산과 연결된 기나긴 외줄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었다.

심지어 오랜만의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듯 격하게 흔들거리기까지 했다.

“이 수레에 타면 됩니다.”

“…….”

수레는 밑바닥이 투명해서 낭떠러지 아래의 광경이 전부 보였다.

심약한 사람은 절대 타지 못할 것 같은 이동 수단.

이안 일행이 올라서자 삐걱삐걱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낡은 비명이 귓가를 어찌나 어지럽히는지.

이거 괜찮나, 라는 걱정이 이안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그때, 그런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는 양 백부장이 대뜸 작은 양동이를 내밀었다.

“아, 이거 받으십시오.”

“이건…….”

“가시는 걸음걸음 반드시 필요할 거외다.”

백부장의 표정이 어째 사악해 보였다.

그녀의 기색만큼 돌풍에 달랑달랑 흔들리는 양동이도 썩소를 짓는 것 같았다.

이안 일행이 양동이를 받자마자.

“즐거운 경험이 되길 바라오.”

안색이 질린 그들을 향해 백부장이 히죽이며 즐거이 손을 흔들었다.

어째 지옥으로 떠미는 배웅 같다고 해야 하나.

백부장이 손을 경쾌하게 튕기자 눈사람 정령이 숨을 훅 불어넣었다.

그 숨결에 수레가 꾸물꾸물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은 느렸지만 이내 가속을 얻으며 쏘아진 수레.

슈아아아악.

말 그대로 순간 이동하듯 미친 속도로 질주했다.

“우어어어억!”

올리브의 비명을 동력 삼아 말이다.

순식간에 나아가다가 수레가 갑자기 또 순식간에 덜컥 멈춰 섰다.

“…….”

외줄의 한 가운데에서 말이다.

이번에는 무엇 때문인가 했더니.

“중간 검문이 있겠습니다.”

푸드덕 소리와 함께 날아든 벌새 정령이 불시 검문을 했다.

재차 검사를 받은 뒤에야 수레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지.

똥구멍이 찔린 닭처럼 부리나케 내달렸다.

이렇게 총 세 번.

철두철미한 검문 과정을 거친 이안 일행은 수십 분만에 지면을 밟았다.

사방이 암산으로 둘러싸인 아라투스 마을에 당도한 것이다.

* * *

“우우욱!”

수레를 벗어나자 올리브가 양동이를 부여잡고 마구 비칠거렸다.

모든 과정을 겪고 나니 왜 양동이를 줬는지 이해가 갔다.

토하고 싶으면 하라는 거였다.

허옇게 질린 올리브가 짠해서 이안이 등을 토닥여주는 동안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그렇듯 손님을 맞는 것은 촌장이라 나이 든 노인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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