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촌장의 태도는 무척 살가웠다.
얼굴 면면에 패인 주름마저도 어찌나 친절한지.
이안 일행을 열렬히 반긴다는 게 역력히 느껴졌다.
‘촌장이 저러는 건 그 때문이겠지.’
그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라서였다.
유례없이 열 가닥이나 수확된 레드니의 족쇄를 가져갈 손님.
족쇄를 가지고 있는 건 촌장으로서 꽤나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자칫 보관을 잘못해 분실이라도 한다?
거기다 그 족쇄가 문제를 일으키기라도 한다?
골칫덩어리를 오래 안고 있기 싫은 촌장으로서는 족쇄의 회수가 반가울 터.
“즉시 레드니의 족쇄를 내드리고 싶은데…… 실타래를 잇는 작업을 다 끝내지 못했습니다.”
“아.”
“서둘고 있으나 아무래도 내일 정오에나 끝날 것 같습니다.”
지난 생과 똑같은 흐름이었다.
하루의 시간이 더 필요해서 리오는 아라투스 마을에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에…….
이안은 슬쩍 리오의 오른팔을 보고는 그러지 않은 척, 도로 촌장에게 눈길을 두었다.
찰나의 찰나.
그냥 눈알을 굴리다 스친 거겠지 싶은 순간을 포착한 건 레브 뿐이었다.
미세하게 드러난 이안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직감한 레브.
레브는 한눈팔지 않고 이안의 순간순간을 관찰했다.
누구도 눈치채는 법 없는 미묘한 흐름 속.
“시간이 남는데 어떻습니까. 레드니의 족쇄의 진척 상황을 살필 겸 한 번 보러 가시겠습니까.”
“좋아요. 보고 싶어요.”
가장 먼저 답한 건 올리브였다.
허옇게 질린 와중에도 왕성한 호기심을 내보이며 신나 했다.
하여튼 저 성격이면 어디 가서든 잘 살 터.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니, 족쇄 관리자가 그간의 과정을 설명해 줄 것입니다.”
촌장은 고개를 돌려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남자를 불렀다.
“페트로.”
촌장의 부름에 미끈한 인상의 남자가 이쪽을 보았다.
왜 불렀는지 안다는 듯 호감형의 눈매가 이내 고갯짓을 보내왔다.
그런 뒤 안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미소를 짓고선 무어라 속닥거렸다.
재미있는 말을 들었나 보다.
꺄르르 웃은 아이는 토끼 인형을 꼭 끌어안고 폴짝폴짝 뛰어갔다.
발랄한 걸음.
평화로운 광경을 별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기익. 기이익.
‘……응?’
고막을 긁는 기묘한 소음이 이안의 신경줄을 건드렸다.
실로 기분이 나빠지는 소리였다.
무시하재도 무시할 수 없는 찜찜한 파동.
그것의 시작점을 파악하려 이안은 얼른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
애초 환청이었다는 것인 양 가차 없이 뚝 끊겨버렸다.
혹시나 해서.
-녹스, 무슨 소리 안 들렸어?
[소리? 올리브 저놈이 호들갑을 떠는 거? 아휴, 발발거리며 부산떠는 통에 귀가 다 따갑다.]
녹스에게 물어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더는 추적할 단서가 없는 상황.
이안은 내려간 눈썹머리를 구기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 * *
촌장과 함께 레드니의 족쇄를 보러 가는 길.
이안은 레드니가 사는 거미 숲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숲에서 눈에 띈 건 두 가지였다.
끈적한 액체가 발라진 마광석이 무척 많다는 것.
레몬트리가 마광석 사이사이 빼곡하게 자리했다는 것.
숫제 밀림 같았다.
빛을 가릴 정도로 촘촘하기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바닥도 생각보다 질었다.
‘소리가 묻히기 딱 좋은 지면 상태군.’
해서 발자국을 깊이 찍고 가는데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일행의 후미.
이안은 각기 다른 발자국들을 찬찬히 따라가며 관찰하다가 눈가를 좁혔다.
“…….”
전방의 나무뿌리에 희미하게 적혀있는 ‘Ö’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보고할 게 있다.’라는 호위대의 암호.
그것을 확인한 즉시 이안은 슬쩍 앞쪽의 동태를 살폈다.
이쪽을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가장 먼저 레브와 눈이 마주쳤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목덜미를 문지른 녀석이 촌장에게 다가갔다.
“촌장님, 레드니의 주식이 마광석인데 거기에 별식으로…….”
주의를 끌 테니 볼일을 보라는 뜻.
역시 손발이 맞아야 도둑질도 해 먹는 법이랬다.
이안은 기척을 더욱 죽이며 슬금슬금 게걸음을 한 채 옆으로 빠졌다.
호위대가 남겨놓았을 또 다른 암호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길 얼마쯤.
레몬트리와 동화되어 있는 호위대를 발견했다.
본디 운송 임무는 지금껏 생도와 호위대가 접촉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지만, 이번은 특별한 경우였다.
레드니의 족쇄가 엄한 인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마을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하여 호위대에게 따로 명한 게 있었다.
한데…….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군.’
호위대의 미간이 잔뜩 구겨진 걸 보니 알만했다.
“도련님, 중간보고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문제가 생긴 건가.”
“예. 실은 그것을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흠.”
살리카 가주는 레드니의 족쇄를 훔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생산지가 남아있으면 역으로 자신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화근을 잘라내려 했지.’
이로 말미암아 가주가 어떤 선택을 했겠는가.
아라투스 마을 자체를 날려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살리카 가주가 직접 고안한 폭탄으로 말이다.
그 결과.
마을 주민 전부가 폭사 당해 뼛가루조차 찾을 수 없었더랬다.
하늘로 치솟아 있던 산이 야트막한 둔덕이 됐으니 오죽했으랴.
그야말로 참변 중의 참변이었다.
그 참담한 결과를 알기에 은밀히 폭탄부터 찾으라 명을 내린 거였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탓하듯 호위대가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께서 주신 단서를 토대로 기괴한 소리가 나는 곳을 샅샅이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리가 한 번 나고 마는 데다 미약해서…….”
“애초 쉬운 작업이 아니긴 하지.”
“마력으로 추적 가능한 기존의 마나 폭탄과 달라, 더 시간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마나 폭탄은 태엽 감는 소리도 나고 기감에도 걸리지만 살리카가 만든 건…….”
살리카 가주의 역작 중 하나인 에룹티오.
이놈은 소리도 없고 마력 감지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 카르디아인 호위대들이 이렇게 애를 먹고 있지 않은가.
확실히 물건은 물건이었다.
이 사실만 떼놓고 보자면 완벽한 폭탄처럼 보이지만 모든 물건에는 초창기라는 게 있는 법.
‘다행히 지금 것은 완성형이 아니지.’
에룹티오가 악명을 떨치는 건 현재로부터 5년 뒤.
아직은 개선해야 할 점이 있는 상태였다.
일정한 주기로 철판을 긁는 소리가 난다는 게 그것이었다.
기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우선 폭탄은 계속 찾아.”
“예.”
“나는 만일을 대비해 다음 수를 진행할 테니.”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이안은 허둥대지 않았다.
폭탄 찾기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짜 둔 다른 수가 있으니까.
“일단은 폭탄의 위치를 아는 자를 먼저 끌어내야겠군.”
* * *
호위대와 헤어진 뒤.
이안은 서두르는 법 없이 촌장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왔다.
줄곧 이 대열에 있었던 양 자연스레 스며든 후미.
그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입이 마르도록 떠들어댄 레브 덕분이었다.
“레드니의 환심을 사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얀 점박이 꿀벌의 꿀을 마광석에 듬뿍 발라 주면 된다고…….”
고생이 참으로 많았다.
이안은 할 만큼 한 레브 곁으로, 정확히는 촌장 곁으로 다가갔다.
굴속에 숨은 너구리를 끄집어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입구를 막고 불을 피우면 된다.
레드니의 족쇄를 훔치려는 인면수심의 도둑을 끄집어내는 방법도 비슷하다.
‘그놈을 궁지에 몰면 알아서 기어 나올 터.’
이안은 그 밑 작업을 위해 레몬트리의 꼭대기를 응시했다.
마침 그의 시선이 닿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꼭대기 쪽에서 날개가 달린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급 서신을 전송하는 전령.
전령은 허공을 디딜 때마다 흩뿌려지는 금가루를 남기며 이안의 팔뚝에 내려앉았다.
그러는 동안.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전령이 가는 대로 시선을 움직거렸다.
과도한 관심 속에 전령은 주둥이를 벌려 서신 하나를 떨궜다.
그것을 받아든 이안은 누군가 보란 듯이 서신을 훑어 내려갔다.
“흠.”
앞으로 꺼낼 얘기를 위해 충분하게 뜸을 들인 후.
이안은 곤란하게 됐다는 투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촌장님.”
“예, 도련님.”
“서신에 의하면 내일 아침, 아버지께서 서대륙으로 보름간 출타를 하신다고 하는군요.”
“아…… 혹여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입니까?”
의문이 어린 촌장에게 이안은 큰일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면을 튼 지 이제 고작 두어 시간째.
누군가에 대해 단정 짓기에는 무척 짧은 시간임에는 분명했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나 촌장은 의외로 간이 작아 보였다.
평생 레드니의 족쇄를 지켜온 자치고는 그랬다.
“간단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러 가신다고 하는군요.”
“아, 예.”
촌장이 큰일은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심 어린 염려에 이안의 양심이 살짝 찔려왔다.
왜냐하면.
서신 자체가 호위대와 짠 각본이었기 때문이다.
도둑놈을 낚기 위한 각본.
이안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태연히 말을 이어 나갔다.
“촌장님도 아실 겁니다. 레드니의 족쇄는 수장에게 직접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그게 원칙이지요.”
“그러니 떠날 시기를 조금 앞당겨야 할 듯싶습니다.”
“아직 실타래를 다 잇지 못하였는데…….”
“좀 수고스럽더라도 잇는 작업을 최대한 서둘러주십시오. 내일 아침에는 떠나야 하니.”
“아. 그럼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촌장님.”
예정대로라면 모든 일은 내일 오후에 일어난다.
한마디로 살리카의 계획이 전부 그 시간대에 맞춰줘 있다는 의미이다.
근데 여기에 똥물이 튀겨진 상황.
예상치 못한 흐름에 살리카들은 지금 꽤나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적인 동요는 곧 허점으로 이어질 터였다.
이안은 상대의 실수를 기대하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 * *
밑밥을 깔았으니 반응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안은 왁자지껄한 마을 회관의 앞마당에 앉아 숨을 골랐다.
“연회를 열어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도련님께서 즐겁게 지내다 가셨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기다란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 마을 주민들.
그들을 대표해 젊은 여자가 똑 부러진 투로 말문을 열었다.
촌장의 외동딸이며 부촌장인 여자.
그녀는 뼈대가 가늘고 체구가 작은 게 촌장을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께서도 그러길 바라고 계실 겁니다.”
“그러고 보니 연회를 열어준 촌장은 정작 참석을 못 했군.”
사람을 잔뜩 모아놓고는 정작 촌장 본인은 연회에서 빠졌다.
실타래를 잇는 작업 때문에 공방에 있어야 해서였다.
연회의 주최자가 일이 바빠 불참한 상황.
그 사실에 미안해졌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주민 전체를 대면할 수 있겠는가.
연회는 좋은 구실이었다.
저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구실 말이다.
‘살리카 가주가 이 마을에 사람을 심어놓은 지도 어언 10년째군.’
주민들의 관계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저들 사이에 참변을 일으키는 자가 이물감 없이 껴 있으므로.
그들의 틈을 파고드는 건 올리브가 도맡아 했다.
피와 세포가 친화력으로 구성된 녀석이라 적임자였으니까.
역시나.
녀석은 이곳에서 50년을 산 토박이처럼 주민들과 잘 섞여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발언권이 높은 노인 무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하면.
어느 틈엔 신혼부부들 사이서 넉살을 떨어댔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안냐세요.”
어느 사이 촌장의 손녀가 이안에게 다가와 배꼽 인사를 건넸다.
마을 회관에 들어섰을 때부터 제게 호기심을 보이던 아이.
아이는 칠흑 같은 동공을 빛내며 이안을 빤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