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와아. 진짜 반짝반짝 햇님 같다.”
다소 엉뚱한 서두였다.
맥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일곱 살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말이기도 했다.
해서 이안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상냥하게 대꾸했다.
“뭐가 햇님 같은데?”
“헤헤.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도련님한테서 광, 과앙…… 으응.”
“광채?”
“맞아요. 그거요. 막 빛이 뿜어져 나온댔어요.”
아이는 발꿈치를 들었다가 내리며 꺄르르 웃었다.
“우리 아빠처럼 대단한 사람 같아요.”
“아빠처럼?”
“헤헤. 우리 아빠도 막 빛이 나요. 그리고 막 재밌는 것을 만들어줘요.”
아이가 고사리손으로 크게 팔을 휘저었다.
아빠가 만들어줬던 것을 표현하는 손짓이 작달막해서일까.
뭉뚱그려진 추상화는 도통 뭘 표현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해석하기 나름.
손짓은 모르겠지만 올망졸망한 눈망울은 어딘가 익숙했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강아지의 눈빛과 흡사하달까.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표정에 이안은 눈꼬리를 접으며 입을 뗐다.
“아빠가 어떤 재미난 것을 만들어주실까.”
“불을 이케 붙이면 막 예쁜 불꽃이 하늘까지 날아가는 거요. 내가 조르면 공방 뒤편의 창고에서 만들어줘요.”
“아, 폭죽을…….”
“진짜 진짜 이뻐서 마을 사람들도 다 좋아해요.”
아이는 아빠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팍을 부풀렸다.
‘오빠의 아빠는 이런 거 못 만들지?’ 같은 거들먹거림도 한 스푼 덧대진 상태.
허세가 이다지도 귀여울 수 있을까.
이안이 싱긋 웃자, 손가락을 꼬물거린 아이는 연거푸 재잘거렸다.
“아빠를 다들 좋아하니까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뭐라 했는데?”
“곧 있으면 촌장 자리를 주겠다고, 막 아빠가 거절하니까 이케 등짝을 두들기며 말했어요.”
제 손등을 때리는 아이의 재연이 정말 찰졌다.
우연히 시작된 대화가 무척이나 유쾌했다.
다음에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할까 내심 고대하고 있는데.
“아실리.”
저 멀리서 아이를 부르는 부촌장의 음색이 들려왔다.
비록 뒷말은 없었지만, 똑 부러지는 음색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괜히 도련님 귀찮게 하지 말고 이쪽으로 빨리 오라고.
“치잇.”
엄마의 단호함에 여지가 없어선지 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아쉽다고 더 버티면 불호령이 떨어질 터라 아이는 살살 이안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요. 빠빠이.”
그런 뒤 팔락팔락 양팔을 흔들며 부촌장에게로 뛰어갔다.
아이가 멀어질 때까지 이안은 훈풍을 달고 쳐다보았다.
마냥 봄볕 같던 이안의 눈빛은 아이와 제법 거리가 멀어지자 차게 가라앉았다.
그 상태 그대로 그는 누군가가 볼 수 있게 손을 까닥거렸다.
이안이 보내는 신호를 받은 그 즉시였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호위대가 기척도, 소리도 없이 이안의 뒤에서 나타났다.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목소리는 들리는 상태.
마치 그림자 같았지만 이안 곁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리오만은 그 형상을 인지했다.
그렇기에 이안의 의도를 단숨에 알아챘다.
호위대를 부른 것은 밀담을 나누려는 것이라는 것을.
리오는 이안과 주민들 사이에 서서 이안의 입이 보이지 않게 가리고 섰다.
그가 가림막을 만드는 사이.
이안은 입술만 달싹거려 호위대에게 명했다.
“아이가 말한 창고를 샅샅이 조사해서…….”
***
다음 날 새벽이었다.
이안은 레몬트리의 울창함에 숨어 불이 꺼진 공방을 주시했다.
레드니의 족쇄가 보관된 곳.
사람이 드나들 때만 해도 운치 있던 곳이 어쩐지 으스스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귀퉁이에서 웅크리고 있던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달까.
음침한 분위기 속, 말없이 감시만 하는 게 지겨워진 모양이다.
리오가 뭔가를 골몰하다 이안에게 말을 붙여왔다.
“도련님.”
“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뭘? 살리카가 레드니의 족쇄를 훔치려고 하는 거?”
“예. 머리가 비지 않은 이상, 뷔트시겐에서 회수자가 온 마당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왔을 때 일을 저지르는 게 아니지. 저들이 레드니의 족쇄를 훔치려는 시점에 우리가 왔을 뿐.”
둘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살리카로서는 일을 미룰 까닭이 없었다.
레드니의 족쇄가 이 정도의 양까지 모이는 건 극히 드무니까.
도리어 이 기회를 놓치면 또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한다.
“게다가 다 죽일 심산이니 뷔트시겐의 생도야 뭐, 우스울걸.”
“아…….”
“방식이야 어떻든, 살리카 가주에게서 받은 임무를 완수만 하면 그뿐이니까.”
10년을 인내하고 인내한 결과물이 코앞에 있다.
먹음직스러운 상태로 말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면 살리카로서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파놓은 함정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뜻.
이안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저물어가는 새벽을 하나씩 세어갔다.
침착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한 모습.
그를 물끄러미 보던 리오가 이안의 곁으로 더욱 바투 붙었다.
언어가 없어도 전하는 몸짓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혹여 어떤 불상사가 생길시, 기필코 지켜내겠다는 것.
“…….”
리오의 확고부동한 태도에 이안의 시선이 절로 오른팔로 향했다.
영영 잃어버렸던 팔 한쪽.
리오가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던 그 사건.
이안의 의식은 삽시간에 어딘가로 떠밀려가기 시작했다.
기익. 기이익.
리오가 낡은 수레에서 내려 첫 번째 암산에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레드니의 족쇄를 확보했으니 이제 워프 게이트 쪽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
일절 임무에 관여를 않던 호위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범벅인 그들의 모습에 의문을 품기도 전.
콰과광.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땅 울림이 난폭하게 났다.
리오를 포함한 생도들은 당황했고, 호위대는 다급하게 마을 쪽 암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때 리오는 내막을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랬다.
호위대는 이미 살리카와의 결전을 한번 치른 뒤였다.
물론 폭탄의 존재는 알지 못한 채였지만.
심상치 않은 상황.
이에 호위대 대장이 생도 넷에게 명했다.
“지금부터 임무를 바꾸겠다. 무조건 워프 게이트까지 멈추지 않고 간다.”
“…….”
“그리고 반드시 뷔트시겐에 지원 요청을 해라.”
대장이 그들의 어깨를 툭 치며 다그치자 생도 넷은 워프 게이트를 향해 내달렸다.
묻지 않았지만, 충분히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뒤로.
‘살리카 개자식들!’ ‘막앗!’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호위대와 적들의 목소리가 한데 엉키며 피비린내를 풍겼으니까.
리오와 생도들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싸움에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레드니의 족쇄만은 지켜내야 했기에.
무너지는 산길을 어떻게든 기어 내려간 이유였다.
사실 파발의 역할은 실력 좋은 호위대가 맡아야 했다.
그런데도 생도들에게 시킨 이유를 어찌 모를까.
호위대는 지키려 한 것이다.
어린 뷔트시겐의 목숨을.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면 연장자로서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여긴 것.
그 마음이 절실히 와 닿아서 리오는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뒤쫓아온 살리카들에게 갈비뼈가 아작나고, 허벅지 살이 베여도.
생도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비록 내쫓기는 한걸음에.
“리오. 실력 좋은 네가 먼저 워프 게이트로 가. 나는 저것들을…….”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자란 녀석이 살리카를 막다 목줄기가 꿰뚫리고.
“내가 다리가 없다고 저 새끼들 한 놈쯤 못 조질까.”
또 한걸음에 다리가 잘린 녀석이 남겨졌을지라도.
그렇게 워프 게이트가 보였을 때는 단둘밖에 남지 않았다.
조금만…….
몇 걸음만 더.
단내가 나도록 내달려 워프 게이트를 목전에 둔 찰나.
“리오!”
남은 한 녀석이 그를 보며 새되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리오는 오른팔 삼각근 쪽에서 시작된 화끈한 통증에 휘청거렸다.
넘어지려는 저를 붙든 녀석.
녀석은 잘려나간 오른팔과 오른팔이 쥐고 있는 족쇄 상자, 그리고 살리카들을 번갈아 보았다.
빠르게 눈알을 굴리다 녀석이 작정하고 저를 워프 게이트 쪽으로 밀었다.
“대장이 말한 진짜 임무가 뭔지 너도 알잖아, 리오.”
염치없이 떠밀린 리오가 이동진의 빛에 휩싸여 본 마지막 잔상은…….
“살아남는 거. 누군가는 그 임무를 완수해야지.”
환하게 웃으며 어서 가라고 손짓하는 친구의 모습과.
하얀 하늘을 시뻘겋게 수놓은 화염 구름이 전부였다.
그렇게 리오는…… 살아남았다.
그 이후부터였다.
외팔이란 약점에도 불구하고 리오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더랬다.
저를 대신해 죽은 제 친구들의 목숨을 이어붙이듯.
어린 생도를 살리기 위해 희생을 자처한 호위대의 의지를 이어가려는 듯.
그 때문이기도 했다.
리오는 제 친구들 또래의 생도들을 전쟁터에서 만나면 어떻게든 살리려 애썼다.
사력을 다해 한 명이라도 더.
목숨 빚을 갚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냈고, 또 누군가를 악착같이 살려냈다.
그게 제가 아는 외팔의 정령 기사, 리오 퐁텐블로에 관한 전부였다.
“이번엔 구해야지.”
“예?”
이안의 중얼거림을 리오가 퍼뜩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이에도 이안은 그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릴 뿐이었다.
짓궂게 의뭉스러운 어깨가 도로 제자리를 찾기도 전, 때가 되었다는 듯 스산한 그림자가 공방에 짓쳐 들었다.
고요한 스밈을 본 이안은 가벼이 발길을 뗐다.
“가자, 네 오른팔 구하러.”
***
한 시간여 후.
이안은 마을 회관의 중앙 탁자에 삐딱하게 걸터앉았다.
그런 연후 제 발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망막을 점령하듯 박혀 드는 건 친숙한 색깔이었다.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봐온 검은색.
보기만 해도 반가워지는 그 색이 오늘따라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그 연유야…….
검은 머리카락을 레드니의 족쇄를 훔치려 한 자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리카 가주의 세작 놈들이.
“역겨운 새끼들.”
“…….”
“검은 머리카락을 내세워 이딴 짓거리를 벌여?”
이안이 머리카락을 뽑아버릴 듯 움켜쥐자 살리카가 얼굴을 구겼다.
적 앞에서 무력한 것이 짜증나서였을까.
아니면 아직 독기가 덜 빠져서였을까.
살리카가 무릎을 꿇고 있던 하체를 비틀며 사슬을 끊으려 했다.
이안에게 달려들려는 몸짓을 내비친 순간.
촤륵. 촤르륵.
호위대가 살리카의 전신을 옭아맨 사슬을 양쪽에서 잡아당겼다.
“크흐흑!”
고통에 몸부림치는 살리카를 이안은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본래는 저 쥐새끼들이 살리카를 불러들여 우리 쪽 전력이 밀렸었는데.’
지난 생은 그랬었다.
살리카가 불러들인 또 다른 살리카가 마을을 장악한 상황.
이것은 살리카 가주가 아이루스 상단을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몇 달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상단으로 위장한 군을 이동시켰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중간에서 진두지휘했던 건…….
이안의 뇌리를 스쳐 가는 무수한 상념의 끝에서.
“네, 네가 진정…….”
침중하게 내뱉는 촌장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회관을 울렸다.
촌장은 연신 ‘어떻게, 어떻게.’라는 말만 반복했다.
깨진 믿음을 어찌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혹감.
그리고 족쇄의 관리자까지 맡길 정도로 한 사람을 신뢰했던 데서 오는 배신감.
이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목소리는 꺼질 것처럼 희미했다.
이안은 부유하는 감정들이 고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중심에 미끈한 인상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페트로, 촌장의 사위인 자가.
조금 전 공방에 숨어든 그림자들, 그러니까 살리카의 대장이기도 한 자이다.